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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법사와 손오공의 긴고아(緊箍兒) (사과잼)

김경희

by 김경희


나는 과일 중에서 사과를 가장 좋아한다. 얼마만큼 좋아하는가 하면 풋사과가 나오는 7월 중순 무렵부터 먹기 시작해서 이듬해 풋사과가 나오기 직전까지 먹는다. 사과를 일 년 내내 먹는다는 말이다. 아오리, 홍로, 홍옥, 황금, 감홍, 부사 등등 사과의 품종이 실로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후지라고 부르기도 하는 부사를 제일 좋아한다.


부사는 서리가 내리기 직전에 따기 때문에 찬 바람이 불 때 먹어야 제맛이다. 크기는 사내의 주먹보다 약간 작은 편인데, 손으로 만지면 껍질은 거칠지만 육질이 단단해서 다부져 보인다. 모양은 아리따운 여인의 엉덩이처럼 둥글고, 햇볕에 그을린 붉은색은 고루 퍼져있어서 누구라도 가다가 뒤돌아볼 만큼 아리땁다. 부사를 한 입 베어 물면 사각거리는 소리가 경쾌한데 씹을 때 끝까지 아삭아삭 소리가 난다. 사과를 먹을 때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과즙과 향긋한 냄새는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지난주에 사과가 내게로 돌아왔다. 사과가 돌아왔다고 하니 ‘사과가 언제 집을 나갔었나?’하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집 나간 사과가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선물했던 사과가 내게로 돌아왔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남편에게 기분 좋은 일이 생겼다. 최근에 발간한 책이 3쇄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출판사 사장님께 전해 들은 것이다. 남편은 초반에 이런 행진이라면 효자 노릇을 할 녀석 같다며 기분이 좋아져서 책이 나올 때마다 진심으로 손뼉 쳐주는 형제들에게 사과 한 상자씩을 보내주자고 했다.


남편의 형제는 다섯, 내 형제도 다섯이다. 우리 부부를 빼고 8 상자의 사과를 남편의 이름으로 보냈다. 아울러 알고 지내던 세 곳의 출판사 사장님에게도 보냈으니 총 11 상자의 사과를 단골 과수원에 주문했다. 사과를 보내고 나니 선물 받을 때의 마음보다 더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사과처럼 마음이 붉게 물드는 것은 줌으로써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었다.






이틀이 지나자 사과를 받은 형제들에게 잘 먹겠다며 카톡 창으로 빨간 사과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느 출판사 사장님은 사과가 달아서 마치 설탕물에 적신 것 같다는 표현을 했다. 시차를 두긴 했지만, 서울, 경기, 군산, 익산, 전주에서 모두 잘 받았다고 연락이 왔는데 서울에 사는 언니한테 보낸 것이 문제가 되었다.


주택에서 사는 언니는 시댁에 김장하러 가느라 대문을 잠그고 갔다고 한다. 다음 날 집에 돌아왔더니 택배기사가 담 너머로 사과 상자를 던졌는지 상자 모서리가 쪼그라들어 있더란다. 상자야 사과를 보호하는 장치에 불과하니 사과만 괜찮다면 무슨 상관있겠냐는 생각으로 사과 상자를 열었는데 사과가 심하게 멍들어 있더란다. 택배기사한테 전화했더니 미안하다고 하기는커녕 썩은 사과를 보낸 사람이 잘못이지 왜 자기한테 뭐라고 하느냐며 오히려 큰소리를 치더란다. 화가 난 언니가 대문이 잠겨 있으면 받을 사람한테 어떻게 해야 할지 전화를 했어야지 과일 상자를 담 너머로 던지면 어떡하느냐고 했더니 과수원으로 반품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더란다.


언니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고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난감한 상황이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과수원 잘못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서울, 경기 쪽에 보낸 다섯 상자의 사과들이 멀쩡하게 잘 들어갔으니 말이다. 나는 과수원 잘못은 아니니까 택배기사와 다시 통화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고 처리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다음 날 언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택배기사와 택배 회사에 전화했더니 자기들이 사고처리를 하고 다시 주문해 주겠다며 사과 상자를 가져갔다고 했다. 언니 집 대문 앞에 CCTV가 있으니 확인해 보겠다고 하자 꼬리를 내리더란다.






사과 한 상자가 길에서 헤맨 사건은 여기서 일단락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 근무하던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택배기사가 사과 상자를 살펴보니 두어 개 정도밖에 멍들지 않았는데 받는 사람이 저리 생떼를 쓰니 이 사과를 어찌해야겠느냐며 남편에게 사과를 다시 가져가면 안 되겠냐고 하더란다. 남편은 그 말을 듣고 그러라고 했단다.


남편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 사람 왜 거짓말을 할까? 언니가 보내온 사진만 봐도 심하게 멍든 사과 개수가 10개가 넘던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라며 삼장법사 앞의 손오공이 되어 펄펄 뛰었다. 내 반응에 심각한 말투로 남편이 말했다.

“각시야. 나는 그냥 우리가 그 사과를 받고 다시 한 상자 주문해서 처형한테 보내고 싶어. 여기서 그냥 끝내자.”

“무슨 소리야. 잘못은 누가 했는데 왜 우리가 그걸 책임져야 해? 안 돼!”

“후유. 생각해 봐. 택배기사들이 약자들인데 왜 그 사람들하고 다투려고 해,”

“아니, 약자라니. 택배기사는 소비자들에게 안전하게 물건을 배달하는 것이 직업이고 그들의 의무잖아. 그러니까 약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묻자는 거지. 처음부터 미안하다고만 했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텐데 끝까지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면서 거짓말까지 하니까 괘씸해서 그러는 거야.”


물러서지 않는 나의 태도에 남편은 한숨을 쉬며 저녁에 다시 얘기하자면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화가 가라앉질 않았다. 사과를 선물한 사람에게 오히려 책임을 전가하는 택배기사를 용서할 수 없었고, 그런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며 옹호하는 남편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과 다시 사과 사건으로 설전을 벌였다. 나는 도저히 이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했고 남편은 약자에게 그러면 안 된다며 택배기사가 두어 개 정도만 상한 거라고 하던데 그냥 우리가 먹자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다음 날 늦은 오후에 문제의 사과 상자가 우리 집으로 배달되었다. 남편과 나는 어디 보자며 내기하는 아이들처럼 상자를 개봉했다. 사과는 거의 다 멍들어 있었다. 어떤 것은 멍든 정도가 아니라 움푹움푹 파이기까지 해서 기가 막힐 정도였다.


나는 심하게 멍든 사과를 열 개 정도 꺼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정도로 상했는데 두 개 밖에 상한 것이 아니라고?’ ‘이 사람 가만 놔두지 않겠어’라고 중얼거리며 깎았다. 남편도 상한 사과를 직접 보더니 내 앞에서 강경하던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깎아놓고 보니 사과를 깎아놓은 것인지 더위에 지쳐 농익어 뭉개져 버린 복숭아를 깎아놓은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상한 사과를 쟁반 가득 담아두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카톡으로 사진을 보냈다. 왜 그런 사진을 자기에게 보내느냐고 의아해하는 남편에게 핸드폰을 내놓으라고 손을 벌렸다.

“나는 여보야처럼 부처님이 아니야. 그러니까 택배기사한테 이 사진이라도 보내게 해 줘. 그리고 택배기사에게 몇 자 적게 해 줘.”


비장한 태도에 남편은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나에게 내주었다. 남편 핸드폰을 받아 들고 카톡에서 사진을 내려받아 택배 기사에게 문자로 보냈다. 사진 밑에 남자의 글투로 이렇게 적었다.

“기사님 사과받았습니다. 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겠으나 훼손 상태가 아주 심하군요. 상한 것을 다 깎을 수 없어서 일부만 사진 찍어 보냅니다. 과일을 운송할 때는 신경 쓰셔야 소비가가 손해 보는 일이 없겠습니다. 누구의 돈이든 다 귀한 것이 아닙니까. 속상한 마음 여기서 접겠으나 이런 사정은 기사님도 알아야 할 것 같군요.”


택배기사는 밤늦게까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죄송하다는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미안하다는 답신이라도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사과를 좋아한다지만 쟁여놓은 사과에 멍든 사과까지 합쳐지고 보니 그날만큼은 사과가 예쁘게 보이지 않았다.


사과 한 상자를 다시 주문해서 언니에게 보냈다. 다음 날 문제의 택배기사가 언니네 집에 사과상자를 배달했다고 한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만일 그때 택배기사에게 남편이 사과를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는 분명히 과수원 할아버지가 일 년 내내 구슬땀 흘려가며 농사지은 사과를 생으로 내놓아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과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아직도 남편의 태도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나 남편이 하자는 데로 일을 처리하고 나니 마치 삼장법사 앞에서 긴고아(緊箍兒)-손오공 머리에 채워진 머리 테-를 쓴 손오공처럼 씩씩거리던 마음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잼을 만들기 위해 멍든 사과를 믹서기에 넣고 갈았다. 사과를 갈아 놓고 보니 성한 사과를 간 것이나 상한 사과를 간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불 위에서 활화산처럼 들썩이며 끓고 있는 사과잼을 보고 있으니 택배기사 때문에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던 내 모습 같아 보였다. 사과잼이 되직해질 때까지 졸이다가 설탕 약간과 시나몬 가루를 넣고 휘휘 저은 다음 불을 껐다. 갈색으로 변한 촉촉한 사과잼이 언제 들썩였냐는 듯 냄비 안에서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내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주먹구구 레시피 (사과잼)


재료: 사과 10알, 설탕 2 큰 술, 시나몬 가루 2 작은 술.

1. 사과는 껍질을 벗겨 믹서에 갈아준다.

2. 간 사과를 냄비에 넣고 센 불에서 10분 정도 끓이다가 과즙이 졸아들 때까지 약한 불에서 저어가며 뭉근하게 끓인다.

3. 완성된 사과잼은 뜨거울 때 소독해둔 유리병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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