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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을 알고 나니 가벼워지는 마음 (해물야채죽)

김경희

by 김경희

12월에 들어서면서 어릴 적 동무들과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라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올해 마지막 달 모임이라 유기그릇이 번쩍이는 한정식집에서 고급지게 식사를하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동무들과 나는 12월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정겹게 느껴진다는 둥, 마지막으로 달린 한 장의 달력 때문에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자극된다는 둥, 또 한 살을 더 먹게 되니 서글프다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더니 눈알이 빠질 듯 아파져 왔다.


몸 상태가 점점 좋지 않으니 만날 땐 반가운 마음 가득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수다 보따리를 다 풀어헤친 후에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났는데 등까지 쑥쑥 쑤셔왔다. 점점 여기저기 몸이 쑤시면서 근육통이 심해져 움직일 때마다 입에서는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혹시 코로나 재감염 증상이 아닐까 의심이 갔다.


20년 넘게 드나드는 이비인후과가 있다. 아들과 딸이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이 병원은 이제는 내가 자주 다니는 병원이 되었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때마다 목감기가 먼저 시작되는 나는 이비인후과 단골 환자다. 원장님은 같은 연배라 친근감이 있기도 하고 긴 세월 동안 같이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면이 많아서 진료실에 들어서면 동네 아줌마와 동네 아저씨처럼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루어진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오늘은 또 어디가 아파서 왔을까?”

“맨날 아픈 데 있잖아요.”

“그래요. 어디 맨날 아픈데 한 번 봅시다. 입 벌려봐요. 아!”

“침 삼킬 때 아프던데 많이 부었어요?”

“야가 또 성이 났구먼요. 한 사흘 약 먹으면 되겠어요. 주사는 오늘도 안 맞으실라우?”

“예. 주사는 무서워서 싫어요. 호호”

“그래요 그럼. 하하하! 물 자주 마시고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무쇠도 막 쓰면 병난다잖아요.”

이렇게 오래 다니고 있는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병원을 찾을 때마다 약 처방과 함께 넉넉하고 구수한 대화로 심신의 아픔을 완화시켜주곤 한다.


동무들과 만나고 온 다음 날, 몸이 쑤시는 증상으로 밤새 끙끙 앓다가 아침이 되어 단골로 다니는 병원에 가서 코로나 검사와 독감 검사를 했다. 어인 일로 이리 자주 자기를 만나러 오냐며 넉살 좋게 반기던 원장님은 비갑개 쪽까지 깊게 후벼가며 검사를 하더니 한 참 후에 나온 결과에 아무 이상이 없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히 독감이든 코로나든 둘 중에 한쪽은 결과가 나왔어야 맞을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증상 해소를 위한 약을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와서 약을 먹고 나면 통증이 약간 둔해지다가 약 기운이 떨어질 때면 다시 등골을 타고 뼈마디가 쑤셨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 앞에서 통증이 멈추지 않으니 마음이 답답했다. 지난번 코로나 걸렸을 때와는 전혀 다른 증상이다 보니 큰 병이라도 걸렸나? 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아들과 며느리가 휴가를 내고 파리로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즐거운 여행길에 누가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아픈 것을 참고 있다가 아무래도 알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파리의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 문자를 넣었다. 곧바로 연락이 왔다. 의료인인 아들과 며느리는 직업의 특성상 그러는지 전화나 문자를 하면 즉각 반응하기 때문에 급할 때는 좋은 면이 있다.


이곳저곳 불편함을 호소하자 며칠 동안의 행적을 캐묻던 아들이 내가 동무들과 점심 먹던 날 아침에 먹었던 이반드론(골다공증 치료제)이 문제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사람에 따라 이반드론을 처음 먹을 때 인플루엔자 유사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니 쉬면서 저절로 좋아지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원인을 알고 나니 묵었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오늘도 아들은 나의 주치의가 되어 주었다.


아들과 통화를 마치고 난 후에도 등골이 묵지근하게 아픈 증상은 남아있었지만, 마음이 가벼워지다 보니 이제야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툼한 코트를 차려입고 마트에 나갔더니 오똑하게 솟은 새빨간 코를 자랑하며 매대에 앉아있는 딸기가 눈에 들어왔다. 어찌나 싱싱하게 생겼는지 열여덟 소녀의 볼처럼 탱탱했다. 값은 봄철 딸기의 두 배나 되었지만 ‘나 지금 환자니까 맛있는 것 먹어도 돼’라고 생각하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카트에 담았다. 해물 죽도 먹고 싶어서 새우, 갑오징어, 낙지, 전복도 튼실한 것으로 골라 담고 당근, 호박, 표고버섯, 팽이버섯, 양파도 사 들고 돌아왔다.


뚝딱뚝딱, 똑똑. 도마 위에서 재료 다지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잘 다져진 재료들은 단풍이 든 가을 산처럼 알록달록하면서도 수많은 모래알처럼 어깨와 어깨를 부딪치고 있었다. 멸치를 넣은 육수 물이 펄펄 끓어오르자 밀려오는 파도 냄새가 났다. 불린 찹쌀과 다진 재료를 냄비에 넣고 끓이니 보글보글 죽이 끓는 동안 집안 가득 바다향과 들녘의 곡식 익는 냄새가 뒤섞였다. 코를 벌름거리며 맡는 죽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소금을 한 꼬집 넣은 다음 간을 보기 위해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음~ 소리와 함께 구수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해물 죽이 침과 함께 버무려져 목을 타고 몸속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몸이 아플 때면 언제나 끓여 먹는 해물 죽은 내가 많이 좋아하는 죽이다. 해물이 사는 바다가 좋은 것인지 죽이 좋은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주먹구구 레시피 (해물야채죽)

재료: 불린 현미 찹쌀 2컵, 육수 6컵, 새우 6마리, 갑오징어 1마리, 낙지 1마리, 전복 1개, 양파 1/4, 브로콜리 약간, 당근 1/3 쪽, 표고버섯 2장, 팽이버섯 한 줌, 애호박 1/4


찹쌀은 1시간 정도 미지근한 물에 불려둔다.

육수가 끓는 동안 해물과 야채를 잘게 다진다.

육수에 재료를 넣고 끓이다가 약한 불에서 저어가며 쌀이 퍼질 때까지 뭉근하게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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