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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블리지에서 블리지안으로 살아가기(들깨 떡국)

by 김경희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


열네 살의 나이가 되어 맞이했던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다. 교회에서 중등부가 되어 처음으로 맞이했던 성탄절은 주일 학생 때와는 별개의 세상이었다.


주일 학생이었을 때는 성탄절 전야제(합창이나 연극을 하던 축제)를 마치고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중등부에 올라가자 성탄절 전야제를 마치고 중등부실에 모여서 밤새 노래와 게임을 하며 놀았다.


중등부실 한가운데는 장작을 집어넣으면 시뻘겋게 타오르는 난로가 놓여 있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는 생강차가 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끓어올랐고 책상 위에는 사탕, 과자, 귤이 소복소복 쌓여있었다. 중등부의 크리스마스 이브날의 파티에는 하나의 법칙이 있었으니 그것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서로 섞여 앉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엔 양쪽에 앉은 남학생 때문에 어색해서 몸을 배배 꼬았다. 하지만 all- night의 시간이 점점 깊어지면서 옆에 있는 남학생의 무릎을 치기도 하고 등을 때리기도 하며 언제 어색했냐는 듯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나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선배들 모두가 그랬다. 부장 선생님의 기타 소리에 맞춰 부르던 노래와 짓궂은 게임의 영향이었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한층 고조되었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새벽 송을 나가기 위해 조를 나누었다. 게임을 하며 좀 더 친밀해진 남학생과 여학생은 그때 자연스럽게 같은 조원이 되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꽁꽁 얼게 했지만 조금 전까지 신나게 놀았던 젊은 기운을 뒤집어쓰고 하얀 눈 쌓인 골목길을 그저 마냥 즐겁게 걸었다.


내가 속한 조는 남학생 넷, 여학생 셋으로 7명이 짝을 이루었다. 첫 새벽 송은 파란 대문 앞이었다. “거룩한 밤 고요한 밤”으로 시작되는 찬송가를 불렀던 것 같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입에서는 찬양 소리와 함께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찬양 소리를 듣고 기다렸다는 듯 집안에 환한 불이 켜졌다. 찬송가를 부르고 나니 대문을 열고 나온 집사님이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계피 향이 나는 달콤한 차를 따라주었다. 그다음 집에선 과자를 내놓았고, 또 다른 집에서는 쌀을 주기도 했다. 산타 할아버지의 자루를 맨 남자 선배는 성탄절 오후에 보육원에 가져갈 자루가 점점 커지자 어깨에 둘러메면서 “아이고” 소리를 냈다.


꽁꽁 언 손을 입김으로 불어가며 마지막으로 도착한 교인의 집 앞에서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찬송을 불렀다. 새벽 송을 마치자 집사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대접하듯 들깨 떡국을 끓여놓았다며 집으로 잠시 들어오라고 했다. 밥상 위에 차려진 떡국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중등부가 되어 처음으로 all-nigh 후에 먹는 들깨 떡국의 맛은 따끈하게 데운 우유처럼 국물이 진하고 들깨의 고소한 향이 났다. 하얀 떡살의 쫄깃함은 입안에서 쫀득쫀득 재미있게 놀았고, 가끔 부드럽게 씹히는 감자 덩어리, 달큰한 파의 맛, 알싸한 마늘 향은 서로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한국의 크리스마스 맛이었다. 시린 발을 뜨듯한 방바닥에서 녹여가며 노곤해진 몸으로 먹던 그때의 떡국은 산타할아버지의 선물 대신 포근한 어른의 선물이었다.


유럽이나 미국에선 크리스마스 때 먹을 대표 음식으로 칠면조 구이(Rosted Turkey)나 진저 브레드 (Gingerbread)를 떠올린다고 하지만 한국 사람인 나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중학교 1학년 때 새벽 송을 마치고 언 손을 후후 불어가며 먹었던 들깨 떡국이 떠오르곤 한다.








블리지에서 블리지안으로 크리스마스 맞이하기


네이버 블로그에 블로그 마을이 있다. 마을 주민이 전체 회의를 통해 정한 것은 아니지만 몇몇 세련된 주민들에 의해 블로그 마을은 ’블리지‘, 블로그 마을의 주민은 ’블리지안‘이라 부르게 되었다. 블로그 안에 있는 블리지는 가상 공간이다.


웹상에서 아바타를 이용하여 사회, 경제, 문화적 활동을 하는 메타버스처럼 블리지의 12월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를 허문다. 세컨드 라이프와 같은 블리지에서는 12월 1일이 되면 블리지 이장님이 초대장을 발행한다. 발행된 초대장은 누구나 받을 수 있고 초대에 응할 수 있지만 특히 발 빠른 블리지안들은 초대장이 발행되는 순간에 망설임 없이 초대에 반응한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열렸던 작년의 크리스마스 축제에 이어 올해는 “아침은 커피 향이 열고 밤은 별빛 향이 닫는다”는 아이슬란드로 블로그 마을이 이동했다.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블리지안들은 서로 앞다투어 아이슬란드에 입주하고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글루 도서관이 세워지고 은행이 들어서며 인쇄소, 여행사, 빵집, 서점, 카페, 기념품 가게, 레스토랑 등등 수많은 기관과 상점이 들어섰다.


무엇보다 올해의 강령은 ’우리는 모두 작가입니다’이고 주제는 ’책 마을의 꿈‘이다. 책마을의 꿈을 이루기 위해 블리지안이라면 누구나 블리지에서 ’가상의 책’을 출간할 수 있다. 책 표지, 제목, 콘셉트, 가격, 바코드, 추천사까지 모두 작가 마음대로 기획해서 포스팅을 올리면 출간이 마쳐진다.


출간된 책은 자동으로 <블로그 마을 도서관>에 들어가는데 지금까지 블리지에서 출간된 책들은 상상의 나래를 달고 만들어져 블리지 공무원에 의해 아이슬란드 이글루 도서관에 차근차근 진열되고 있다.


나는 블로그에서 이웃을 맺고 가깝게 소통하던 이웃의 권유로 이탈리아 친퀘테레에서 진행되었던 <블로그 마을 시즌 1>부터 블로그 마을 축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실제로는 미국 메릴랜드주에 살고 있지만, 블로그 마을에서는 이장직을 맡고 있는 밤호수라는 블로거와 이웃이 되었다. 그런 그녀를 올여름에는 실제로 북 토크를 통해 만나기도 했다. 블로그를 찢고 나온 그녀는 밤호수라는 닉네임이 주는 짙고 방방한 느낌보다는 청순하고 늘씬한 미인이었다.


블리지의 축제가 횟수를 더해가면서 규모도 방대해지고 아이디어도 세련미를 더해가고 있다. 무엇보다 예술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섬네일과 블리지 지도는 공모전이 있다면 단연코 대상을 거머쥘 만큼 예술적인 가치가 돋보인다. 블리지 마을의 지도는 한 폭의 고급스러운 그림과도 같아서 블리지에서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는 블리지안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블리지안 나비스트의 블리지 지도

2022년의 12월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다. 현실에서는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런저런 모임에서 식사 약속이 잡혔다. 하지만 블리지에서는 내가 오픈한 가게에 출근해서 분주히 일하고 도서관에 소장된 새로 나온 책들을 읽으며 블리지에 사는 작가들을 만난다. 때론 현실의 세계인지 상상의 세계인지 가끔 혼동되기도 하지만 상상하는 그것만으로도 산타 할아버지를 손꼽아 기다리며 착한 마음을 품던 동심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블로그 마을의 12월,

블리지 송이 만들어져 울려 퍼지자 불리지 송 부르기에 도전하는 꿈의 블리지안들, 도전하는 그들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내는 마음 따뜻한 블리지안들,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책을 구매하고 리뷰를 쓰고 북 토크에 참석하는 지적인 블리지안들, 블리지에 들어서는 가게마다 꽃을 선물하고 빵을 구워 나르고 가게의 물건을 두 손 가득 사 들고 돌아가는 정다운 블리지안들, 이글루마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달빛을 끌어다 차를 끓이고 별빛 한 줄기씩을 꺼내어 서로의 마음에 자수를 놓아 주는 섬세한 블리지안들. 생동감 있는 이런 풍경이 바로 블리지에서 블리지안들이 12월을 멋들어지게 살아가는 방식이다. 상상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블리지의 매직 덕분에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이런 블리지안들을 보며 혹자는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이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블로거들도 있다. 이렇게 말한들 어떻고 저렇게 말한들 어쩌랴.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참여하면 참여할수록 나의 블리지가 되고 주인의식이 있는 블리지안이 되는 것을.








블리지에 쉽게 적응하는 유형이 있다(?)


자기 행동의 원인을 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정서를 건강하게 만드는 합리적인 방법을 찾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융의 네 가지 유형론에서 시작된 MBTI는 사람의 개성을 네 가지 차원에서 보고 있다.


외부 세계에 대한 개인의 태도(외향성/내향성), 개인이 정보를 모으고 간직하는 방식(감각형/ 직관형), 의사를 결정하는 방법(사고형/감정형), 어떤 상황을 마무리 짓고 정리하는 방법(판단형/인식형)이다.


나는 여기서 개인이 정보를 모으고 간직하는 방식이 상상의 공간, 가상 공간인 메타버스에 쉽게 적응하느냐 더디게 적응하느냐의 차이를 결정한다고 본다.


감각형은 영어로 Sensing, 직관형은 Intuition이다. 감각형(Sensing)의 사람들은 냄새를 맡고, 만지고, 듣고, 맛보는 오감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사실에 관심을 둔다. 어떤 것이 진실임을 확인할 때까지 자기 의견을 바꾸지 않으며 지금, 현재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사실적인 사건의 묘사를 선호한다. 비교적 정확하고 엄밀한 경향이 있고 판에 박힌 절차를 지겨워하지 않기 때문에 반복적인 일에 싫증을 내지 않는다.


반면 직관형(Intuition)은 짙고 푸른 하늘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상세한 자료보다는 육감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의지한다. 또한, 생각나는 데로 모든 가능성을 제시하며 신속하고 비약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이들은 판에 박힌 일을 지루해하면서 복잡한 일 앞에서도 쉽게 질리지만,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을 잘하고 사물의 의미와 중요성을 알고 싶어 한다.


가상현실 플랫폼인 메타버스처럼 블리지 또한 상상의 마을이다. 상상의 마을이기에 직관형(Intuition)의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블리지 소식에 보다 빠르고 쉽게 적응한다. 반면 블로그 마을을 처음 접하면서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지?” “한참을 봐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네.”라고 말하는 대부분 사람은 감각형의 성향이 짙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직관형이라고 해도 한 개인 안에는 직관적인 성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성향이 어느 정도 그림자로 자리 잡고 있고, 감각형이라고 해도 직관적인 성향이 그림자로 깃들어있기 때문에 시차가 있을 뿐 누구나 관심을 가지면 블리지의 블리지안이 되어 12월을 신나게 즐길 수 있다.


보다 성숙한 사람들은 감각형과 직관형의 성향을 적절히 균형 잡아가며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한 개인의 성향이 노력으로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성격도 나이에 따라 변화한다고 했던 <나는 왜 이럴까>의 저자 마크 피어슨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 안에 있는 반대 성향의 에너지가 발휘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MBTI 검사상 직관형이다. 선호 점수가 24로 분명한 편이다. 그러니 블리지에서 일어나는 가상의 사건들 속으로 쉽게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때론 블리지에서 블리지안으로 살다가 현실로 돌아오곤 한다. 12월이 시작되면 블리지에서 블리지안이 되어 파티 준비로 바쁘면서도 즐거워하듯이 현실의 나도 아이들이 어릴 때처럼 온 집안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며 즐거워한다. 마치 이웃 블리지안들이 찾아와서 차를 마시며 놀다 갈 것 같은 생각 때문에. 그러니 나의 12월은 블리지안이 된 이후로 현실이 가상이 되고 가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들 속에서 줄타기하며 지낸다.


블리지의 올해 파티 장소인 아이슬란드는 지금 블리지안들의 발길로 거리가 북적이고 있다.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상점마다 블리지안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얼음과 눈덩이로 둥글게 만들어진 이글루 도서관에는 새로나온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있다. 이런 도서관을 달빛이 멀리서 환하게 비춰준다. 이글루 도서관 내에 자리 잡은 나의 기념품 가게는 아르바이트생들의 천국이 되고 내가 낸 신간 <블리지 사용설명서>는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사랑을 이루고, 모르던 이웃과 이웃이 연결되어 정다운 마을을 이루어 가며,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꿈을 이루는 블리지에서 12월의 하루하루가 달달하게 지나가고 있다. 내일은 도서관 확장 공사로 고생하는 블리지안과 골목마다 청소하며 추운데 고생하는 블리지안들을 위해 들깨 떡국이라도 한 솥 끓여야겠다.








주먹구구 레시피<들깨 떡국>

재료(2인분): 떡국 떡 한 줌, 감자 1개, 양파 1/2개, 파, 마늘, 들깻가루 3큰술, 멸치 육수 5컵.

1. 육수 5컵에 감자를 둠벙둠벙 잘라서 끓인다.

2. 감자가 익으면 씻어둔 가래떡과 양파를 잘라서 넣고 끓이다 들깻가루를 넣는다.

3. 대파 썬 것과 다진 마늘을 넣고 한소끔 더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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