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소나기처럼

김경희

by 김경희



이른 아침의 명동거리는 매우 특별하고 매혹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지난밤의 혼잡함에서 벗어나 말끔하게 씻은 도심의 얼굴은 대체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습한 공기가 바람을 타고 가끔씩 불어오다 멈추길 반복했다. 아직은 어두운 그늘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가로등 빛이 거리를 밝혀주고, 부지런한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환한 불빛은 도시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현 씨 우리 뭐 좀 먹을까요? 저는 한국의 콩나물국밥 먹고 싶습니다."

"콩나물국밥 좋아하세요?"


"두 번 먹어봤는데 아주 맛있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종로 쪽에 제가 아는 콩나물국밥집이 있으니까 거기로 가요. 한 십분쯤 걸어가면 될 거예요."


"세현 씨하고 얘기하면서 걸어가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세현 씨도 콩나물국밥 좋아하십니까?"

"네. 저도 좋아해요."


"다행입니다. 하하하"

"호호호"


세현과 왕위는 해뜨기 전 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가르며 나란히 걸었다.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지만 거리에는 사람들의 미묘한 움직임이 보였다. 휴일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하려 아침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상점들의 쇼윈도 너머로 디스플레이 되어있는 의상과 액세서리는 단잠을 자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양한 건축양식과 색상이 독특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작은 골목을 지나 비사벌 콩나물 가게로 들어갔다.


"저희 콩나물 두 개 주세요."


세현이 주문을 하자 검정 앞치마를 입은 아줌마가 물컵을 가져다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콩나물국밥을 가져왔다.


"감독님! 계란에 김을 부셔 넣고 비벼서 먼저 드셔보세요."

"아. 계란을 이렇게 먹는 거군요?"


"네. 우리나라에선 이게 정석이에요. 후훗"


왕위는 곁눈질로 세현을 따라서 계란 반숙이 담긴 스테인리스 공기에 김을 부셔 넣고 비벼서 먹었다.


"음..... 맛있어요."

"맛있죠?"


"네 정말 맛있습니다."


왕위는 뜨거운 콩나물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먹더니 콩나물을 듬뿍 떠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왕위의 콧등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세현은 밤잠을 설친 탓인지 혀가 까실해져서 국물만 두어 번 떠서 천천히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 콩나물을 아작아작 깨물었다.


"어젯밤에 스태프들하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콩나물국밥을 먹으니 너무 좋습니다."

"그러셨군요? 한국 사람들도 술 마신 다음 날 해장으로 콩나물국밥 많이 먹어요. 감독님도 어제 술을 마셨으면 속이 시워해지겠어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속이 후련합니다. 하하하."


왕위 감독이 콩나물국밥을 다 먹자 세현이 계산대로 나가 카드를 내밀었다. 곧바로 뒤따라 나와 한사코 자기가 밥값을 내야 한다는 왕위 감독에게 그녀는 커피를 사라며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활기찬 에너지가 공중에 떠돌고 있었다.


"세현 씨! 아는 카페 있습니까?"

"네. 있긴 한데 혹시 감독님 오늘 여유 있나요?"


"저는 시간 넉넉합니다."

"그럼 우리 외곽으로 나갈까요? 정말 멋진 카페를 알고 있거든요."


"저야 좋습니다."

"차를 명동성당 주변에 주차해 두었어요. 거기까지 다시 걸어가야겠네요."


세현과 왕위는 명동성당을 향해 걸었다. 여기저기 상점들이 문을 열면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가게 주인들은 상품을 진열하고 있었다. 도시의 활기와 상업적인 분위기가 손을 잡은 것 같았다. 빵집 앞을 지나치자 구수한 빵 냄새가 세현의 마음을 푸근하게 감쌌다. 상점 유리창에 반사된 세현과 왕위의 모습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인 같아 보였다. 갑자기 앞쪽에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오더니 세현의 머리카락을 할퀴고 지나갔다. 세현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려 하는데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머? 오늘 비 소식 없었는데 비가 오려나봐요."

"저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어쩌죠?"

"어거 가까운 곳으로 들어갑시다."


세현이 두리번거리며 잠시 피할 곳을 찾고 있는데 빗방울이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강렬한 자연의 힘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비에 젖은 흙냄새와 함께 땅이 젖어 들었다. 왕위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세현과 자신의 머리 위에 둘렀다. 세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왕위의 팔 안으로 뛰어들었다.


"감독님! 우리 뛰어요. 저기 맞은편에 있는 카페 보이죠?"

"예! 보입니다."


세현은 빗길을 뛰면서 "끼약~"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마치 얽매였던 곳에서 빠져나와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끼는 청춘의 사람 같았다. 청춘의 열정과 에너지가 소나기와 어우러져 세현을 자유롭게 춤추게 하고 소리 지르게 하는 것 같았다. 왕위도 소나기 속에서 자신의 활력과 열정이 발산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몸 아주 가까이에서 뛰고 있는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비누 향과 샴푸 향이 어우러진 세현의 냄새는 부드럽고 온화했다.


왕위는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보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로 인해 함께 뛰고 있는 시간이 눈이 부시고 어릿어릿하면서 찬란하게 느껴졌다. 나이대에 어울리는 유연하고 유치한 모습, 자유로운 태도, 경쾌한 웃음소리, 윤기 넘치는 그녀의 건강한 긴 머리는 왕위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한 발 한 발 같이 뛸 때마다 자신의 발걸음에 맞춰주는 그녀의 배려심은 왕위의 심장을 더욱 강하게 터치하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들어선 작은 카페에서 커피향이 풍겨오자 왕위는 편안한 마음과 함께 아리따운 그녀와 함께 있는 순간이 소중하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세현 씨! 많이 젖어버렸네요. 미안합니다. 잘 받쳐주고 싶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니에요. 감독님이 저보다 더 많이 젖었잖아요. 감독님 아니었으면 전부 다 젖어버렸을 거예요. 감사해요."


세현은 계산대 옆에 놓인 티슈를 가져다 왕위에게 내밀고 자신의 얼굴과 팔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축축하게 젖은 옷 때문에 몸이 으슬거렸지만 주문한 커피가 나와 서너 모금 마시자 온몸에 온기가 돌아왔다. 마실 때마다 코를 타고 머릿속까지 가득히 적셔주는 커피향 때문에 카페 안이 더욱 아늑하게 느껴졌다. 세현은 문득 어젯밤에 왕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근데 감독님! 어제 저랑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아 예."


왕위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두 어번 긁적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만드는 영화 여주인공이 하차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중들에게 복잡한 사생활이 공개되어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세현 씨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싶습니다."

"예? 저를요?"


"세현 씨가 하차하는 여 배우와 많이 닮기도 했지만 왠지 꼭 세현 씨와 함께 일해보고 싶습니다.“

"글쎄요..."


"꼭 영화 때문만은 아닙니다. 실은......"


왕위는 잠시 망설이며 머뭇거리다 세현을 슬쩍 바라봤다.


"세현 씨를 명동성당에서 처음 만나고 난 이후로 하루도 잊지 못했습니다. 세현 씨와 진지하게 사귀어 보고 싶습니다. 물론 저보다 먼저 사귀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세현 씨를 향한 제 마음 진심입니다."


커피잔을 잡는 왕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세현은 고개를 숙인 채 애먼 커피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왕위 감독에게 일에 대한 갑작스러운 제안과 소나기처럼 퍼부어대는 고백을 받은 탓이기도 했지만, 형우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해야 할까? 말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오늘 오전에 집에 오겠다고 했던 형우의 문자가 자꾸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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