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에는 접은 우산을 휘두르며 걷는 사람이 보였다. 비에 젖은 나뭇잎은 생기를 되찾아 더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조용하고 평온하며, 소음이 줄어들어 마치 자연과 도시가 하나로 어우러진 것 같았다.
세현은 아파트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마음이 느른해져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없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왕위 앞에서 긴장했던 마음이 풀려서 그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현아!"
등 뒤에서 그녀를 부르며 형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세현은 고개를 돌려 형우를 쳐다보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형우가 점점 가까워지자 세현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세현아! 어디 갔었어. 내가 오전에 오겠다고 했잖아.”
“볼 일이 좀 있었어요.”
“무슨 볼 일?”
“그냥 누굴 좀 만났어요.”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음...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사람이에요."
“누군데 그래.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해지는데?”
“나중에요. 나중에 말해줄게요. 근데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예요?”
“열시 반에 왔으니까 두 시간쯤 기다렸나 봐.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이 없길래 무얼 사러 갔나 하고 차에서 기다리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어. 전화했는데 자기가 전화도 안 받았잖아.”
세현은 그제야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일부러 무음으로 해둔 핸드폰에 형우의 전화가 4통이나 찍혀 있었다.
“무음이라 전화 오는 줄 몰랐어요. 미안해요.”
“아니야. 어제는 너무 미안했어.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기가 가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아니에요. 형우 씨도 형우 씨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까 그랬던 거죠?"
"아무튼 정말 미안해. 근데 자기야 우리 뭐라도 좀 먹을까? 아침을 안 먹었더니 나 지금 배가 많이 고파.”
“그래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냉면 먹으러 갈까?"
세현과 형우는 풍납토성을 지나 유천 냉면집에 가서 물 냉면과 만두를 시켰다. 갈 때마다 대기 번호표를 타고 기다렸던 냉면집은 점심시간을 약간 비켜나서 그런지 빈자리가 제법 많았다.
형우는 국물이 슴슴한 평양식 물냉면을 좋아했다. 세현은 형우를 따라 주문한 냉면과 만두가 나오자 냉면 그릇에 두 눈을 묻은 채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했다. 형우는 말이 없는 세현을 힐끔 쳐다보다 만두를 두어 개 집어먹더니 가늘고 차가운 면발을 후루룩후루룩 들이켰다. 냉면 그릇을 들고 시원한 국물까지 마신 형우는 세현을 다시 바라봤다.
“자기야! 만두도 좀 먹지 그래.”
형우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가로로 가볍게 저을 뿐이었다. 어제의 일 때문에 세현의 마음이 상해있다고 생각한 형우는 세현이 냉면을 다 먹을 때까지 다른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다 먹었어?”
“네”
“우리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좀 할까?”
"네"
형우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우가 계산대로 성큼성큼 다가가 계산을 하는 동안 세현은 형우 뒤에 서서 생각했다. 어디에 가서 얘기하는 것이 좋을까? 오늘은 형우에게 모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카페나 공원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어서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계산을 마친 형우가 세현의 등을 감싸며 밖으로 나왔다.
“자기야!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형우 또한 조용한 곳에 가서 세현의 마음을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저희 집으로 갈까 봐요.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어요.”
“그래 그럼. 세현이가 좋을 대로 해."
둘은 세현의 집을 향해 걸었다. 거리엔 넓적해진 플라타너스 잎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습한 공기를 머금은 후덥지근한 바람이 형우와 세현의 얼굴과 목덜미를 휘감았다. 세현과 형우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는 없었지만 마음속으론 각자 수많은 말을 하며 집에 도착했다.
”잠깐 소파에 앉아 계세요. 제가 커피 좀 내려올게요. 시원한 것 드시죠?”
“응. 냉커피 마시고 싶어.”
세현은 네스카페 커피 머신에 전원을 켜고 컵과 얼음을 준비했다. 돌체구스토 캡슐 보라색을 넣고 버튼을 누르니 커피가 내려왔다. 커피가 컵에 닿자 거품을 일으켰다. 이어서 물과 함께 쪼르르 커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커피 머신 앞에 서 있는 세현을 바라보던 형우는 커피 머신에서 커피가 내려오자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받았다. 커피잔을 들고 세현이 형우에게 다가와 앉았다.
“음. 맛이 아주 좋아. 자기가 내려주는 커피는 언제나 맛있어.”
“에이 기계가 내리는 거지 제가 직접 내린 것도 아닌데요 뭘.”
“그래도 자긴 언제나 커피 캡슐 고를 때 신중하잖아.”
세현은 형우에게 피식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입 두입 형우의 입술이 커피잔에 닿을 때마다 커피잔에 담긴 커피의 키가 성큼성큼 줄어들었다.
“근데 자긴 왜 안 마셔? 자기 커피 되게 좋아하잖아.”
“오전에 마셨어요. 조금 있다 마시고 싶을 때 마실게요."
“그렇구나.”
“근데 형우 씨! 저 형우 씨한테 할 말 있어요.”
“나도 자기한테 할 말이 있는데 자기가 먼저 해."
“형우씨! 우리 그만 헤어지는 것이 좋겠어요.”
형우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가 눈꺼풀이 힘없이 아래로 스르르 내려갔다.
“형우 씨를 위해서도 민희 찬희를 위해서도 이제 우리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자기는..... 자기를 위해서는 우리 헤어져도 괜찮아?”
형우의 물음에 세현의 볼 위로 눈물이 말없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으로 눈물을 두어 번 훔치다가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올라오자 두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세현의 가슴속으로 날개 달린 슬픔과 아픔이 상실감을 동반하고 날아들었다. 순간 가슴을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세현을 바라보던 형우의 눈에서도 눈물이 툼벙 떨어졌다. 그녀에게 헤어지자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형우의 가슴속으론 애절함과 쓸쓸함이 날아들었다. 세현 없는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자기야! 자기 없이.... 난.... 못 살 것 같은데.... 자긴.... 나 없어도... 돼?”
"......"
형우는 울음이 가득 찬 목소리로 세현을 향해 구해달라는 듯 손길을 내밀었다. 세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한껏 젖은 눈으로 형우의 눈을 깊이 바라봤다. 이해를 바란다는, 결단하자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상황을 받아들이자는, 당신의 행복을 빌겠다는 눈빛이었다.
세현의 눈빛에서 무언가 한 가닥 읽은듯한 형우가 그녀를 와락 부둥켜앉고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세현도 형우의 품 속에서 견딜 수 없이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어깨를 들썩이며 구슬프게 울었다. 둘 사이엔 한참 동안이나 폭발적이고 강렬한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러다 점점 부드럽고 가벼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