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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데르센 거리에서

가을 이야기

by 김경희

인천에서 코펜하겐까지 몇 시간 걸렸을까? 젊은 시절에 다니던 여행에선 일일이 비행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계산하곤 했었는데 갈수록 그마저도 하기 싫었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네 편의 영화를 보고 두 끼니의 기내식을 먹고 나니 두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직항이 아니라 두바이 공항을 경유 해서 비행기를 옮겨타고 다시 코펜하겐으로 향했다. 요즘 실속있는 젊은이들이 저가 항공인 아랍에미리트 비행기를 많이 이용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여행사 덕분에 우리도 실속있는 젊은이들이 된 듯했다.


코펜하겐에 오전 11시경에 도착했다. 덴마크 현지 가이드가 공항에 나와서 점심 식사할 식당으로 안내했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북유럽의 음식 문화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특색있는 음식이 없고 -왜 없을까마는- 뷔페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가이드의 말을 들으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내가 먹어본 뷔페식 중에 덴마크에서 먹은 뷔페식이 최고로 맛있었다. 온갖 채소들을 잘라 소금 후추 간을 해서 올리브유에 절이거나 익혀서, 치즈나 버터를 넣은 되직한 감자 소스에 버무려낸 각각의 음식들은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덕분에 여행 첫 끼니를 몇 접시나 가져다 먹었는지 모른다. 고기는 하나도 없는 채식 뷔페였는데 음식마다 내가 좋아하는 샐러리 향이 살짝살짝 나는 것도 아주 좋았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북유럽식 샐러드를 여러 번 해 먹었으니 코펜하겐에서 먹은 여행 첫 끼니가 정말 인상 깊었다.


점심을 아주 배불리 먹고 코펜하겐의 가장 아름답고 여유로운 랑엘리니 공원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인어공주 상이 나왔다. 백 년이 넘도록 코펜하겐의 상징이 되고 있다는 인어공주 상이 저리 조그맣다니. 청동으로 되어있어 더 작게 보이는 인어공주 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왕자를 죽여야 마법에서 풀려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이지 않은 인어공주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항구 주변에 내려앉아 있는 것 같았다. 랑엘리니 산책로를 따라 되돌아 나오니 “냐아오, 냐아오” 소리 내어 우는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파도 소리와 함께 부두에 정박해 있는 하얀 크루즈 선 위에 부서져 내렸다.


랑엘리니 공원 앞에서 탄 버스는 우리를 안데르센 거리로 데려갔다. 키가 쭉쭉 뻗은 덴마크 사람들의 모습 앞에 갑자기 땅꼬마가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왜소해진 마음을 달래느라 그이와 손을 잡고 안데르센 거리를 걸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동행하고 있는 여행객들이 여럿 있었지만 마치 우리 둘이서만 안데르센 거리에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안데르센 거리를 걷다가 가이드가 잠깐의 여유시간을 주길래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과일이 있는 매대를 둘러보다 “아니 이게 무슨 과일이야. 납작 복숭아잖아”라고 소리치니 그이가 두 봉지를 집어 들었다. 5개씩이나 들어있는 납작 복숭아 두 봉지를 말이다. 순간 너무 많이 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이 여행 첫날이니 서너 차례 나눠 먹으면 될 것 같아 그이가 계산하는 동안 눈을 질끈 감았다.


티볼리 공원 쪽에 있는 안데르센 거리와 시청 앞 광장, 시청사 근처 스트뢰에 거리를 구경하고 나니 항구도시임에도 짠 내가 전혀 나지 않는 코펜하겐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코펜하겐이 북유럽의 대도시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맑은 공기를 가진 도시였기에. 자전거를 대중교통 수단으로 이용하니 청정한 공기야 당연지사였겠지만 말이다.


저녁 식사 후 호텔로 들어가 후식으로 납작 복숭아를 씻어서 하나씩 나눠 먹었다. “오잉!” 우리는 납작 복숭아를 한입씩 깨물자마자 서로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이거 너무 맛있잖아” 놀란 토끼 눈으로 하나씩만 더 먹자던 우리는 그날 그 저녁 그 자리에서 납작 복숭아를 순식간에 다 먹어 치우고 말았다. 내일 슈퍼에 들리게 되면 납작 복숭아를 또 사자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 뒤로 납작 복숭아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에구 그때 한 봉지마저 더 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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