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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머무름의 섬

무계획주의자들의 제주 한 달 살기-에필로그

by 김경희

한 달이라는 시간이 섬처럼 느껴졌다. 제주에서 살아낸 날들은, 긴 인생의 강물에서 조용히 건져 올린 빛나는 조각 같았다. 다른 기억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아무와도 섞이지 않은 채 오롯이 하나의 계절로 남아, 앨범 속 첫 장에 고이 눌러 담긴 사진처럼 내 마음을 밝히고 있다.


그곳의 새벽은 바람이 창문을 열고 들어와 잠을 흔들어 깨웠다. 파도 소리에 젖은 공기는 늘 촉촉했고,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바다의 숨결이 온몸을 감쌌다. 오름의 흙길을 밟으며 들었던 발자국 소리는 오래 묵은 내 안의 무거움을 조금씩 털어내게 했고, 숲 깊숙이 번져있던 초록의 숨결은 잊고 있던 내 생명의 맥박을 다시 뛰게 했다.


비가 내리던 오후에는 작은 창가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한 잔을 손에 감싸 쥐었다. 창밖으로 흩날리는 빗줄기가 바다 위에 은빛 실을 엮어 놓은 듯 반짝였고, 그 물결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바다에 스며들어 있는지 바다가 내 안에 흘러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경계에 서 있음을 느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작은 돌담, 해안선 끝자락에서 붉게 타오르던 석양의 숨결까지. 제주는 날마다 다른 얼굴로 나를 맞이했지만, 그 모든 순간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머무름’ 때문이었다. 떠나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가만히 머물러야만 들을 수 있는 시간의 낮은 목소리였다.


한 달 동안 만난 제주는 끝없이 밀려와 부서지고 다시 이어지는 파도 같았다. 거세게 몰아치면서도 결국은 나를 감싸 주었고,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나는 파도 속에 잠시 마음을 담그고, 다시 삶의 바다로 흘러가야 했지만, 파도와 함께 밀려왔다 밀려가던 순간은 내 안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 ‘머무름의 섬’이라 불릴 한 달의 기록은, 삶이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부드럽게 불러낼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한 달이, 언제든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며, 또 다른 길을 건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사람들은 왜 제주에 가는 걸까. 제주는 지친 몸도, 무거운 마음도, 기대와 설렘도, 아무에게 털어놓지 못한 고독까지 모든 것을 품어준다. 제주의 바다는 묵묵히 출렁이며 하루를 토닥이고, 바람은 머리칼을 스치며 작은 위로를 속삭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섬에 안기기 위해 가는 것 같다. 누군가는 말한다.

‘바다가 좋아서.’

‘올레길을 걷고 싶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음을 쉬게 하고 싶어서.’

이 모든 말들이 다른 듯 같은 대답이다. 모두가 자신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제주는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말없이 받아 준다. 결국, 우리들은 각자의 이유를 들고 제주에 가지만, 떠나올 때는 같은 마음을 품고 돌아온다.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조금은 너그러워진 눈빛으로.


머무름의 섬은 말하지 않고도 알려준다.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여기서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그리고 길을 떠날 때가 오면 다시 잘 걸어갈 수 있을 거라고. 제주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그곳은 마음의 안식처, 세상에 지친 이들이 기대어 쉴 수 있는 거대한 품. 사람들은 그 품에 안기기 위해, 다시 살아가기 위해, 제주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 부부 역시 그랬다.






제주 한 달 살기를 마치고 돌아와 그때의 과정을 기록하는 지금, 마음속에는 제주에서 흘러간 하루하루와 그 속에서 마주한 감각과 감정이 가득 차 있다. 한 달의 기록은 단순한 여행의 흔적이 아니라, 나를 조금 더 세심하게, 조금 더 부드럽게 바라보게 해 준 시간의 기록이다. 제주, 한 달의 숨결 속에서 나는 조금 더 나답게, 조금 더 조용히, 그러나 깊이 숨 쉬었다. 그리고 그 숨결은 여전히 내 안에서 잔잔히 흐르고 있다.


제주 한 달 살이의 경험은 우리 부부의 적은 모험이자 큰 배움이었다. 강진 살이나 대천 살이를 준비할 때도 그 시간은 든든한 뿌리처럼 작용했다.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일은 언제나 설렘만큼 두려움과 심난함을 동반하지만, 제주의 품에서 한 달을 살아낸 경험은 그 두려움을 녹여 없애 주었다. 길 위에서 머무는 삶이 더는 낯설지 않게 된 것이다.


또한, 제주는 우리에게 미니멀한 삶의 가치를 깊이 일깨워 주었다. 적은 짐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필요 이상의 물건들이 얼마나 마음을 짓누르는지를 몸으로 느꼈다. 단출한 그릇 몇 개, 입을 옷 두어 벌, 그리고 그날그날의 바람과 햇살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덕분에 삶이 가벼워졌고, 마음이 환해졌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제주를 다녀온 뒤에도 종종 제주를 떠올리며 다시금 그 섬 위에 서 있는 시간을 꿈꾼다. 다시 갈 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날 벗을 그리워하는 기다림과도 같다.


제주에서의 한 달은 봄의 계절과 함께였다. 4월의 유채꽃이 흐드러지고, 바람은 따뜻함과 차가움 사이를 오가며 계절의 경계를 노래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또 어떤 계절을 맛보러 가면 좋을까? 그이는 일 년의 첫 달인 1월을 살아보고 싶다고 한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 속에서, 텅 빈 들판과 고요한 바다를 온전히 마주하며 새해의 숨결을 맞이하고 싶다고.


그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욕심이 번져가고 있다. 1월도, 2월도, 3월도. 한번 더 살아보는 4월도, 그리고 5월, 6월, 7월... 12월의 깊은 겨울까지. 모든 달을 살아보고 싶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맞닿아 살아내고 싶다. 바다도 달마다 다른 빛으로 물들고, 같은 바람도 달마다 다른 목소리로 불어오는 ‘머무름의 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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