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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판 돈의 유혹

10화

by 김경희

25년 동안 살던 집이 드디어 팔렸다.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동시에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언젠가 오랫동안 살고 있는 집 떠날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그 ‘언젠가’가 정말로 눈앞에 다가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3년 전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평수가 넓어서 집이 팔리기 쉽지 않을 거야’라는 안이한 생각이 들었다. 팔리지 않으면 어쩔 수 없으니 리모델링하고 이곳에서 끝까지 살아가리라,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며 버텨왔다.

아이들이 결혼해서 모두 떠난 넓고 공허한 집은 우리 부부를 헐렁하게 감싸고 있었다. 겨울이면 난방비가, 여름이면 냉방비가 무자비하게 통장을 갉아먹었고, 그 위에 덧씌워진 관리비는 연금을 허무하게 파먹는 검은 구멍 같았다. 집은 더 이상 보금자리가 아니라 짐이었다.


딸은 자주 말했다. “엄마 아빠, 우리 옆으로 이사 오면 안 돼요?” 그 말에는 단순한 권유 이상의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반짝이는 신도시의 새 건물들,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서관과 공원, 녹지와 상권이 잘 갖춰진 동네. 그곳에서라면 부모의 노후도, 앞으로 태어날 손주의 미래도 한결 따뜻해질 거라 믿는 듯했다. 딸의 그런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부담되었다. 평수가 넓다 해도 지은지 25년이 넘는 구축 아파트를 판 돈으로 신축 아파트를 사기엔 돈이 턱 없이 모자랐다.






일이 되려니 집 팔리는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집을 보러 온 사람이 단 하루 만에 구매 결정을 내린 것이다. 불과 2주 뒤에 이사 날짜까지 잡혔다. 기쁘다기보다 오히려 겁이 났다. 너무 빠른 전개가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괜히 마음이 바뀔까 두려워 상대의 조건을 하나하나 맞춰주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정말 이렇게 흘러가도 괜찮을까.’


우리는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들처럼 부동산을 전전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딸의 집 바로 옆 동에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발견했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건 운명일지도 몰라.’ 하지만 문제는 전세자가 들어있는 집이었다. 세입자가 나가려면 무려 1년 8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누구라도 머뭇댈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집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기다림을 감수하자 마음 먹고 결국 계약을 했다.

곧 다른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새집으로 이사하려면 집 판 돈에다 가지고 있는 현금을 다 끌어 모아도 1억이 모자랐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마음에 들도록 리모델링까지 하려면 1억 5천만 원이 모자랐다. 이런 현실 앞에서 아들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자라는 돈은 융자받으세요. 조금만 더 자리 잡히면 제가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남편과 나는 동시에 고개 저었다.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 힘으로, 반드시 마련하리라. 그것은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로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사 날짜에 맞춰 우리는 팔린 집의 1/4 크기에 불과한 작은 아파트룰 구입했다. 정작 들어가 살고 싶은 아파트는 현재 전세자가 살고 있으니, 전세 기간이 끝날 때까지 살아야 할 집이 필요했다. 15평짜리 아파트는 방 2칸에 부엌과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앞 베란다에서 바라본 바깥 경치는 산을 배경으로 툭 틔어 있어서 뷰가 아주 좋았다. 나중에 월세로 내놓으면 노후에 어느 정도 고정수입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사하는 날, 버릴 수 있는 건 모조리 나눔 하고 처분했다. 아까워도 집이 좁아 가지고 가지 못할 것들이 수두룩했다. 이사 후에 좁은 방 안에 들어앉아 계산기를 두드렸다. 남은 돈을 헤아리는 순간,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작은 아파트를 사면서 지출한 돈을 제하고, 전세자금을 안고 잔금을 치르고 나니 통장에 남은 건 1억 6천만 원. 수치만 놓고 보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남편은 안전한 해답을 내놨다.

“이 돈, 은행이랑 신협에 나눠 넣자. 이율 높은 데 알아봐서, 그냥 이자로 불리면 돼. 그래야 입주할 때 전세금 내줄 거 아니야. 모자란 돈은 어떻게 마련해 봐야지. 소득공제용 연금저축을 해약하던지.”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감추려는 듯 들렸다. 평생 안정만을 좇아 살아온 사람다운 발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낯선 불빛이 번쩍였다. 고요한 물결 위로 던져진 돌멩이처럼, 새로운 파문이 마음속에 번져갔다.


숨을 고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보, 이 돈… 우리 주식에 투자해 볼까? 우리에게 1년 8개월이라는 시간이 있잖아.”

말을 내뱉고 나서야 심장이 미친 듯 뛰는 걸 느꼈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내가 무모한 제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의 눈동자가 순간 얼어붙었다.


그의 시선 속에 두려움과 불신,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흔들림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동시에 알 수 없는 설렘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길, 지금껏 단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이지만 걸어가 보고 싶었다. 1억을 반드시 벌어야할 목표가 생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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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