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 식탁, 나를 돌보는 다정한 태도

1화 프롤로그

by 김경희

어느 날 문득, 노인 초년생이 되다


거울 앞에 서면 어느덧 머리 위로 소복하게 내려앉은 흰 눈을 마주한다. 돋보기안경의 도움 없이는 한 자의 글도 읽기 힘들어졌고, 눈가와 입가에 새겨진 주름은 그간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묵묵히 증명하고 있다. 마음만큼은 여전히 풋풋한 이팔청춘인데, 어느덧 겉모습은 손주를 품에 안기에 더없이 적당한 할머니가 되었다. 서글프다기보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앞에 겸허해지는 나이, 인생의 황혼은 이렇게 예고 없이 깊어진다.


늙어가는 것은 비단 겉모습뿐만이 아니다. 예전에는 무엇을 우적우적 먹어도 거뜬히 소화해 내던 위장이, 이제는 조금만 급히 먹어도 ‘천천히’라며 신호를 보낸다. 아이들은 효도한답시고 젊은 시절 좋아했던 고기, 치킨, 피자, 탕수육, 짜장면을 식탁 가득 대령하지만, 마음껏 젓가락을 들기엔 겁부터 난다. 멋모르고 즐겼다가는 밤새 소화제에 의지해야 하거나 체하기까지 하니,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비로소 평온해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내가 기력이 다해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힘없는 구순의 노파인 것은 아니다. 이제 종심(從心)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60대 중반의 노년, 지하철 무료 탑승의 생경한 혜택을 누리고 공원마다 경로우대를 받는 '노인 초년생'이다.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노인이라 대접하기 시작한 이 나이는, 역설적으로 내 몸을 가장 정성껏 돌봐야 하는 시기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왜 일품(一品)이어야 하는가


나는 가족을 위해 부엌을 지켜왔다. 자식의 입에 들어가는 밥 한술을 위해, 남편의 기력을 보충해 줄 뜨끈한 국물과 '첩첩반상'을 차리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 이런 정성은 나를 향해 쏟고 싶다. 여러 접시를 오가며 기력을 쓰는 대신, 한 그릇에 모든 영양을 담아내는 간소함이 필요한 시기다. 한 그릇의 간편함은 가사 노동의 피로를 줄여주고, 남은 여유 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사색과 휴식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복잡한 차림새를 덜어낸 일품(一品) 요리는 노년의 삶과 참 많이 닮아있다. 겹겹이 쌓인 접시를 치우고 나면 비로소 식재료 하나하나의 맛이 선명하게 다가오듯, 우리 삶도 군더더기를 덜어낼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법이다. 이제 접시 하나로도 충분하다. 아니, 한 그릇에 담긴 정성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노년의 식탁은 화려함보다 '영양 밀도'가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소화 효소는 줄어들고 근육은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무정하게 빠져나간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절실히 느끼는 순간은 오랜 벗들과 함께할 때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나면 여기저기서 약통을 꺼내 드느라 손길이 분주해진다. 식탁 위로 번지는 약 먹는 소리는 우리가 인생의 해 저무는 길목을 함께 건너가고 있다는 서글픈 신호이기도 하다.


친구들의 분주한 손길을 보며 생각한다. 노년기에 단백질은 생존이지만 무작정 늘리면 신장이 아우성친다. 당뇨를 위해 잡곡밥을 먹자니 그 속의 칼륨과 인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근육, 혈당, 신장 사이의 까다로운 삼각관계를 조화롭게 푸는 것, 그것이 바로 ‘노년 식탁’이 제안하는 핵심 전략이다. 친구들과 더 오래 건강하게 마주 앉아 웃기 위해서라도 이제 '어떻게 영리하게 먹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담백함이 몸을 살린다


나는 식품영양학 전공자도 요리 전문가도 아니다. 하지만 수십 년간 부엌을 지켜온 주부의 경력은 나에게 어떤 학위보다 값진 지혜를 남겨주었다. 수없는 도마질과 불 앞에서 깨달은 것은, 식재료 본연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는 담백함이 결국 우리 몸을 살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노년의 식탁은 섬세해야 한다. 볶고 튀기는 거친 방식 대신, 수분을 이용해 찌고 삶고 데치는 한국식 전통 조리법은 나이 든 위장에 친절한 조리법이다. 이렇게 조리하면 질감은 부드러워지고 소화 흡수율은 높아진다. 필수 영양소가 빠짐없이 담긴 고밀도 레시피는 적게 먹어도 기력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우리는 흔히 '잘 먹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노년의 '잘 먹음'은 젊은 날과는 달라야 한다. 양껏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의 영양을 정갈하게 수용하는 것이 진정한 보양이다. 인생의 후반전에서 식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생존 행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변화하는 내 몸을 긍정하고 아끼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남은 삶을 어떠한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실천적 철학이다.


무엇보다 먹는 재료에 담긴 영양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내 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나아가 노년기 건강을 위해 사용하는 음식의 재료가 지닌 영양성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싫어했던 식품의 좋은 점을 알고 나니 거부감이 사라져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부엌은 더 이상 고단한 노동의 현장이 아니라 나를 귀하게 대접하고 스스로 치유하는 성소(聖所)가 되어야 한다. 식탁 위에 놓인 한 그릇의 요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이자 응원이다. 앞으로도 일품(一品) 요리를 애용함으로 어제보다 더 평온하고, 그 어느 때보다 정갈한 빛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란다.


雅林 김경희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