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노년 식탁
남편은 '한국인은 밥심'이라 믿는 골수 밥돌이다. 나는 고구마든 빵이든 배만 차면 끼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한 번은 교회에서 목사님이 남편에게 아침 식사 여부를 물으셨다. 그런데 남편이 태연하게 "아직 안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목사님은 "아이고, 사모님이 남편 아침도 안 해주시나 보네요."라며 웃으셨고, 나는 졸지에 남편의 아침을 굶기는 아내가 되어버렸다. 분명 아침에 고구마, 삶은 계란, 사과까지 깎아 대접했는데 말이다. 밥이 아니면 먹은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편과 나의 서로 다른 끼니의 기준을 확인한 씁쓸한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억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음 써서 준비한 아침 식사가 남편의 입을 거쳐 공복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때면 정성이 단숨에 휘발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식사에 대한 팽팽한 평행선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화의 계기를 맞이했다. 우연히 접하게 된 <채소 과일식>이라는 서적 한 권이 우리 부부의 식탁을 바꿔놓았다.
이 책은 아침부터 들이키는 뜨끈한 쌀밥과 국물이 오히려 몸을 무겁게 할 수 있다고, 대신 살아있는 효소가 가득한 채소와 과일로 몸을 깨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남편에게 제안했다. 딱 한 달만 아침 식탁 혁명을 해보자고. 처음엔 반대하던 남편도 반복되는 피로감 때문이었는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우리 집 ‘아침 식탁 혁명'이 시작되었다. 밥과 국을 끓이는 대신 채소 씻는 물소리와 사각사각 사과 자르는 칼 소리가 아침을 열었다. 시험 삼아 한 달만 해보자던 과일야채 식은 3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 부부의 아침 끼니는 이제 접시 위에 색색의 과일과 야채가 담긴다. 껍질 벗기지 않고 자른 사과와 방울토마토, 보랏빛 블루베리, 살짝 데쳐 올리브 오일과 후추 소금을 뿌린 브로콜리와 당근, 파프리카, 여기에 단백질을 보충해 줄 삶은 계란 두 알이 식탁 위에 놓인다. 겨울철에 잘 어울리는 따뜻한 대추 생강차 한 잔과 함께 말이다.
*씹을 때 아삭아삭 소리 나는 사과는 12등분해서 껍질째 먹는다. 사과 껍질 속 펙틴 성분은 장운동을 부드럽게 도와 밤사이 정체되었던 소화 기관을 깨워준다. 풍부한 유기산은 아침의 활력을 더해준다.
*방울토마토는 작지만 붉은 에너지를 전달한다. 강력한 항산화 성분인 라이코펜이 들어있어 몸속 염증을 줄여준다. 또 피부와 혈관을 보호해 준다.
*보랏빛 블루베리는 안토시아닌의 보고다. 맑은 정신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뇌세포의 노화를 막아주고, 스마트폰과 모니터로 피로해지는 눈 건강을 챙겨준다.
*초록색 브로콜리는 살짝 데쳐 올리브오일을 만났을 때 영양이 배가된다. 레몬보다 풍부한 비타민 C가 면역력을 높여주며, 설포라판 성분은 몸 안의 독소 배출을 돕는다. 특히 초록색 야채 속에 들어있는 비타민K는 혈액 응고를 조절해 혈관 건강을 지킬 뿐만 아니라, 칼슘이 뼈에 잘 흡수되도록 도와 골다공증을 예방해 준다. 또 활성 산소로부터 세포를 보호해 노화를 늦추고 루테인 성분까지 들어있어 눈 건강에 좋다.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 주황색 당근은 지용성 비타민 베타카로틴이 들어있어 호흡기와 안구 점막을 튼튼하게 해주고 피부에 윤기를 더해준다. 비타민 A는 눈의 점막을 촉촉하게 해 주고 안구 건조증을 완화시켜 준다.
* 파프리카는 모든 채소를 통틀어 비타민 C 함량이 가장 높다. 특히 빨간 파프리카는 다량의 비타민 C를 함유하고 있어 감기 예방에 탁월하다. 혈관 건강에 좋고 수분이 풍부하며 식이섬유가 많아 포만감을 준다. 노란색과 주황색 파프리카에는 루테인과 제아잔틴 성분이 들어있어 시력 저하를 막고 노인성 안질환을 예방하는데 효과적이다.
*완전식품인 계란은 근육의 생성을 돕는다. 노른자 속 콜린 성분은 근육의 생성을 돕고, 기억력과 집중력을 높여주며 비타민 D는 뼈 건강까지 챙겨준다.
*따뜻한 대추 생강차는 섭취한 과일과 채소의 차가운 성질을 중화시켜 소화력을 높여준다. 생강의 알싸한 진저롤 성분은 체온을 높여주고 혈액 순환을 촉진한다. 대추는 천연 신경안정제라 불릴 만큼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 준다. 설탕 역할을 하는 다당류 성분은 기력을 보호하고 소화기를 따뜻하게 감싸준다.
과일야채 식을 하고 난 후 놀라운 것은 변화의 주체인 남편의 반응이었다. 처음 며칠은 밥알이 씹히지 않는다며 허전하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가벼워진다고 했다. 이제 누가 남편에게 아침 식사를 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네, 아주 멋진 혁명 식사를 했습니다."라고.
과거의 나에게 끼니가 그저 배를 채우는 행위였다면, 그리고 남편에게 끼니가 반드시 밥이어야만 했다면, 지금 우리에게 아침은 서로의 건강을 돌보는 시간이 되었다.
식탁 위의 풍경이 바뀌니 삶의 태도도 바뀌었다.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보다 몸을 가볍게 비우고 좋은 영양으로 채우기 시작하자 여유가 깃들었다. 무거운 포만감 대신 가벼운 생기를 선택한 덕분에 아침을 먹는 시간이 아닌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노년기의 여유는 바로 건강한 아침 식탁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