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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도감자 Sep 27. 2024

남자친구의 114살 생일상(번외 편)

만두의 늪


맨날 남자친구에게 얻어먹은 것만 쓰다가 이번엔 내가 요리한 날을 써보려고 한다.


한 달 전 그의 생일이었다.

그와 5년간 만나며 그의 생일에 함께한 건 두 번뿐이었다. 특히나 내가 미안했던 건 그의 20살 생일이었는데, 대만은 만 20세에 성인이 되기에 그날이 특별한 날이다. 그런데 그때 그는 한국에 교환학생을 하러 들어왔기 때문에 20살 생일을 시설격리하며 혼자 보내야만 했다. 그 후로 생일을 같이 보낼 때는 꼭 한 끼는 직접 차려주기로 다짐했었다.




이번 생일엔 그가 애정하는 대만 집밥을 해주겠다고 하자 그가 대만음식 말고 한국음식을 해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 문제는 없었지만 나는 그동안 가족들 생일상을 차릴 때면 항상 소갈비찜과 소고기미역국을 놓았다. 하지만 그는 소를 먹지 않기에 국과 찜에 들어가는 재료를 조금 바꿔야 했다.

그러던 찰나에 그가 미역줄기볶음이 먹고싶다 했다. 잠깐... 그러면 미역이 겹치는데?

생각해 보니 한국음식을 먹고 싶다고 꼭 한국식 생일상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평소에 그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음식으로 차려줘야겠다 생각하니 제일 먼저 만둣국이 떠올랐다.  


강원도에서는 만두가 중요한 음식이다. 명절때마다 꼭 만두를 빚고, 중요한 손님이 오면 항상 만두를 만들어 대접한다.

연애 초반에 남자친구가 우리 집에 인사 왔을 때 엄마랑 고모가 만두를 빚어주셨다.

김치가 들어가고, 무와 두부가 들어가 심심한 만두가 그의 입맛엔 잘 맞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그는 만두 한판이 쪄지면 그 자리에서 다 먹고, 또 한판 찌면 또 먹고... 매번 첫판을 먹는 것처럼 무한으로 먹었다. 고모가 웃으며 말했다.

감자야 너 대만 남자한테 시집가도 만두는 계속 빚어야겠다!

 

어릴 적에 동생들이 만두를 너무 좋아해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만두를 빚었다. 집을 떠나온 이후로는 만두빚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김치만두에 빠지게 된 이후로 나는 그가 한국에 오면 종종 만두를 만들어주었다.

소롱포보다 훈툰(만둣국)을 좋아하는 그는 한국만두도 만둣국으로 먹는 걸 제일 좋아했다.


만두피 반죽을 해놓고 그가 좋아하는 포레누아 케이크를 사 왔다. (이때 잘 확인했어야 했다...)

만두를 빚는데 한입 크기의 만두에 익숙한 그를 위해 만두를 작게 빚으니 애기들이 먹는 만두 같아서 귀여웠다.

만두만들기는 물기짜는게 전부다. 다짐육 500g 이면 작은만두가 60~70개정도 나온다.


건새우마늘쫑볶음, 감자샐러드, 미역줄기, 콩나물, 가자미구이.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다 만드니 이제 그가 오기까지 15분 정도가 남았다. 케이크에 초를 꽂아두려는데 어? 초가 없었다.


집 앞 빵집으로 뛰어갔다. 숫자초가 없었다. 점원에게 길쭉한 기본 초를 살 수 없냐 물으니 케이크를 안사면 따로 구매가 불가하다고 했다. 좀 더 걸어 아이스크림집에 갔다. 이럴 수가! 모든 숫자가 다 있는데 숫자 2만 재고가 없었다.

다른 선택지는 happy birthday 초였다. 하지만 그 초로는 나이를 표시할 수 없었다. 생일은 매년 돌아오지만 24살 생일은 그의 인생에 하루뿐인걸...


그가 올 시간이 거의 다 되고 있었다. 어떡하지 하다가 간단한 수학이 떠올랐다. 1 더하기 1은....?


집에 돌아와 케이크에 114를 나란히 꽂아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114살 같았다. 1 간격을 조금 줄여서 붙이고 4를 떨어트려놔 보았다. 망했다. 여전히 114살이었다. 남자친구를 장수하신 할아버지로 만들어버렸다.


약속시간이 되고 그가 집에 왔다. 초를 붙이고 그를 맞았다. 생일 축하 노래를 크게 불러보았지만 114살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그가 활짝 웃으며 다가오다가 케이크를 보고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이게 뭐냐고 비웃길래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너 114살까지 살라는 여자친구의 이 깊을 뜻을 모르냐!


다음엔 꼭 숫자초를 미리 사놓으리라...



식사 후 커피도 마시고 산책하다 집으로 가는데 그가 말했다.

감자야 혹시 만두 더 만들어놓은 거 있어?

오잉 그게 전부였는데 왜? 더 먹고 싶어?

아아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

야 너 아까 만두 50개 먹었어!

그는 멋쩍게 웃었다.


좀 더 걷는데 그가 말했다.

감자야..... 나 만두 더 먹고 싶어....!!!!!!!  ˃̣̣̣̣̣̣o˂̣̣̣̣̣̣  

그걸 그렇게 처절하게 말할 일이니...


마트에 들렀다 집으로 갔다. 영화를 보며 만두를 더 빚었다. 빚어놓은 만두가 애기 궁뎅이 같다고 했더니 그가 무슨 그런 이상한 말을 하냐며 기겁하길래 웃겼다. 반은 쪄주고 반은 국으로 끓여줬다. 그는 그날 만두 100개는 먹었다. 옆에서 보는데 신기했다.



잘 먹어줘서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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