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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도감자 Sep 20. 2024

소 안 먹는 남자의 소고기 요리

그와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가 소고기를 안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만에서는 소를 먹지 않는 사람이 흔한데, 그 이유는 다양하다.

첫 번째 이유는 과거에 대만이 농경 사회였을 때 소를 먹는 게 금기시되었던 역사가 길기 때문이다. 농사에 필수적인 소를 먹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여전히 많은 노인 세대가 그 기억으로 소고기를 피한다.


하지만 소고기가 널리 보급되고 소고기를 중심으로 한 식문화가 발달하면서, 지금 중년 나이의 세대부터는 소고기를 즐겨 먹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수의 젊은 세대가 여전히 소고기를 섭취하지 않는데, 제일 흔한 이유 중 하나는 점쟁이가 점사를 보았을 때 소를 먹으면 불운이 닥칠 거라고 소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미신이 많이 믿는 나라이다. 부모님들이 점사를 보고 소고기를 먹는 일이 자식에 인생에 방해가 될지를 알아본다고 한다.

또한 시험을 준비하거나 앞두고 있을 때도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시험의 신이 소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소를 먹으면 신이 노하여 시험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기에 승진시험을 자주 치러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이 이유로 평생 소고기를 피하기도 한다.

그리고 농가의 자녀들도 소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심으로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소를 안 먹는 이유는 이 여러 이유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가 소를 먹지 않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에 있었다.

아버지께서 어릴 적 늘 왕래하고 지내던 이웃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 할아버지께선 평생 농사를 지으셨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의 밭에서 일하던 소가 나이가 들어 힘을 못쓰는 상황이 되자, 할아버지는 평생 자신과 손발을 맞춰온 늙은 소를 도축장에 파는 대신 먹이를 주며 소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돌보셨다고 한다.


아버지께선 그 이웃 할아버지의 소에게 가끔씩 밥도 주고 목욕도 시켜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소와 친구가 되었고 '소와 눈을 맞춰본 경험'이 있기에 그 후로는 소를 먹지 않게 되셨다고 한다.


 남자친구는 아주 어릴 적 문득 아버지께서 항상 가족들을 위해 소고기 요리를 하시면서 본인은 드시지 않는 걸 보고 아버지와 함께 소를 안 먹는 쪽이 되어서 아버지를 외롭지 않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소를 먹지 않게 되었다.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어린 시절의 그가 참 사려 깊고 깜찍하다고 생각했다.


 소를 먹지 않는 사람과 연애하는건 그닥 힘든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소는 비싸서 자주 못먹는 음식이었기도 했고, 혹시 모르고 그에게 소를 먹일까봐 걱정할일도 없었다. 코로나전까지는 항상 그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생각해 놨다가 그가 한국에 오면 식당으로 데리고 갔기 때문에 애초에 내가 미리 사진으로 반찬에 소고기가 있는지 살펴보면 될 일이었다.


 처음 대만에 방문했을 때, 나는 그의 아버지가 소고기 요리를 해주시는 걸 보고 조금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남자친구의 어머니와 형, 누나는 소고기를 정말 좋아하는데 나에게도 대만의 소울푸드라며 우육면을 여러 번 먹여주셨다.

아버지는 내가 마늘쫑과 소고기를 볶은 대만 반찬을 맛있게 먹으니 출국하기 전까지 두 번을 더 해주셨다. 남자친구는 대만에선 식문화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에 어울려서 사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고 했다. 그렇기에 채식주의자들도 그들의 신념을 존중받고,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가족을 위해서 고기요리를 해주는 것도 흔하다고 했다.


 그가 처음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렇지만 상황에 맞춰서 먹기도 한다며 엄격한 수준은 아니라고 덧붙였었다.

그가 교환학생을 온 후 한창 한국 요리에 흥미를 가졌던 시기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궁중떡볶이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떡볶이 속에 소고기만 피해 먹었기에 나는 속으로 음식에 소고기가 들어있어도 골라 먹으면 되는 거구나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소고기 뭇국을 끓였는데 나만 떠주고 자기는 안 먹겠다고 했다. 내가 국물이 맛있으니 국물이라도 먹어보라고 하자 그는 소고기 육수가 우러났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당연히 다시다 육수도 먹지 않았다.

또한 소고기 요리를 할 때면 꼭 간은 내게 보게 했다. 그가 상황에 맞춰서 먹는다는 건 '소고기가 살짝 닿은 음식도 먹기는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둘 식사만 차려서 우리 둘만 먹는데 내가 혼자 먹을 소고기 요리를 그가 해준다는 게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내가 소 말고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냥 소 먹지 말자고 하니 그는 자기가 미안하다며 가끔씩 소고기 요리를 해줬다.


나는 그에게 요리를 해주며 소가 안 들어간 요리를 시도해 보았는데 예를 들면 꼭 소를 넣어야 된다고만 생각했던 뭇국에 바지락을 넣어 끓여보기도 했고, 미역국에 황태나 전복을 넣어보기도 했다. 해산물을 식재료로 쓰는건 엄두가 안나던 일이었는데 막상 써보니 정말 깔끔하고 시원했다. 소고기를 안 먹는 그와 함께 하며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식재료를 써보는 좋은 경험을 했다.


 그러다 하루는 그가 땀을 흘리며 육개장을 끓였는데 통마늘을 종으로 반 잘라 껍질 채 지지듯 볶은 다음 정성껏 끓였다.(대만에서 마늘향을 우려내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는 퉁퉁 불은 고사리를 좋아하는데 엄마가 보내준 고사리를 넣으며 잠시 후 먹을 생각에 행복해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음식을 같이 먹으려는데 그가 내 그릇만 떠줬다. 소고기를 넣기 전에 자기가 먹을 그릇을 떠놓는걸 깜박했다며 나 혼자 먹으라고 했다.

아... 내가 옆에서 보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그날은 그가 정성껏 만든 음식을 먹는데도 미안해서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와 함께 있을 땐 소를 먹지 않겠다는 말을 확실히 했고 그도 더 이상은 소고기 요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주먹밥, 키위, 니쿠자가

그가 자주 해줬던 추억 속의 소고기 요리이다. 나는 감자를 좋아해서 가끔은 김치찌개에도 감자를 넣어먹는다. 그가 하루는 불고기에도 감자를 넣냐고 묻길래 내가 그렇게는 먹지 않지만 넣으면 맛있겠다고 했다.

그는 불고기에 감자를 넣는지 검색해 보다가 한국 불고기와 비슷한 일본 음식을 찾아냈다. 니쿠자가라는 일본 가정식 요리인데 불고기보다 깊은 맛은 덜하지만 훨씬 깔끔한 맛이 난다. 찾아보니 돼지로도 만든다길래 그도 맛보게 하고 싶어 얇게 저민 돼지 앞다리살로 만들어주었다. 이제는 나도 소를 먹지 않으니 항상 돼지로만 만들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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