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의 대만 집에 갔을 때였다. 어머니께서 그의 이름이 적혀있는 사진첩을 꺼내주셨다.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는 모습을 열심히 눈에 담고 있었다. 그러다 다음 장을 넘겼는데 그의 누나가 학교 체육복을 입은 누군가와 나란히 서있었다.
그때 그의 형이 웃으며 외쳤다.
“니 첫사랑初戀 이다!”
당시 나는 중국어를 막 배우는 단계였는데 일단 내가 아는걸 의심해 보았다. 初戀? 추리엔이 첫사랑이 아니었나? 추리엔에 누나라는 뜻도 있나?
아니. 初戀에 누나라는 뜻은 없었다.
똑단발을 한 소녀가 남자친구의 누나 옆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표현은 비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게 느껴졌다.
내가 언니랑 아는 사이냐 묻자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라고 했다. 언니는 나보다 한 살 위였다. 뭐야 그럼 네 첫사랑이 나보다도 나이가 많다고?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 자리엔 그의 누나와 그의 형이 있었다. 나는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다음 사진들을 보아도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두 남자가 해맑게 사진마다의 의미를 설명할 때, 언니만이 내 기분을 알아차렸다. 언니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말했다.
“내가 그 사진을 찢어버릴게”
그 섬뜩한 말이 고마웠다.
그 후로 내 뇌리에 박힌 그녀는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게 했다. 그녀가 떠오를 때면 마음이 답답했다.
그 앨범은 가족앨범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 적힌 그의 앨범에서 첫사랑의 사진이 나왔다는건 무슨 뜻일까. 남자친구가 언니가 가지고 있던 사진을 훔쳐서 본인 앨범에 소중히 보관해 놨다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무엇때문에 이렇게까지 속이 뒤집히는걸까. 단지 사진을 보관해둬서? 아니면 그의 첫사랑이 내가 아니라서?
나 말고 그의 사랑을 받은 여자가 지구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은걸까. 그게 이 끓어오르는 질투심의 이유라면 너무나 미성숙하다는 걸 나도 알았다.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데 그는 아직도 그 여자 생각을 할까? 그리고 그녀가 정말 무덤까지 간다면 너무 좌절스러웠다. 나는 그의 인생에 늦게 나타난 죄로 그 여자한테 질 수 밖에 없었다.
하루는 질투심을 없애는 방법을 검색해보았다. 미국의 어떤 박사님이 고안한 해결책이 나왔다. 잘 해나가다가 ‘질투의 대상과 내 공통점을 찾아본다.’ 부분에서 막혔다. 사랑에 빠진 그의 눈빛을 보았다라...
더 열이 받았다.
그로부터 1년 뒤 내 자취방에서의 일이었다. 한 일본영화의 한국 리메이크 판이 내달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그 원작이 참 좋다고 했더니 마침 그도 그 영화를 좋아한다며 영화 얘기를 한참 했다.
내가 말했다. “츠네오의 마음 한구석에 조제가 평생 박혀있을 거야."
그러자 그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치. 조제가 첫사랑이었으니깐.
이 한마디에 그동안 간신히 틀어막아놨던 마음이 펑 터졌다.
“아니? 첫사랑 아니었어. 내 말은 츠네오가 도망쳤기에 잊지 못하겠다는 뜻이었어. 갑자기 첫사랑 얘기가 왜 나와? 너한테 첫사랑이 그런 의미야? 평생 못 잊는 존재?"
그가 벙쪘다. 내가 갑자기 흥분해서 따지는 이유를 몰랐다. 나는 하면 안 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한거야 사랑한거야?”
“누구?”
“네 앨범 속 첫사랑이라는 그 여자! ” 라고 말하자 그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너무 어릴 때라 그런 것도 몰랐어. 그냥 보면 가슴이 뛰고 이런거였지!"
그는 내 속도 모르고 더 나불댔다.
고백도 못해봤어. 갑자기 베트남으로 이민을 가는 거야. 그 집 아버지가 사업을 하던 분이었거든. 그래서 내가 베트남말도 못 하는데 어떻게 하냐 물었더니 국제학교를 다녀서 괜찮대! 어쩌구 저쩌구
참을수가 없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그는 어쩔 줄 몰라했다.
감자야 왜 그래...
일단 집을 뛰쳐나왔다. 가지 말라는 손을 뿌리치고 혼자 있고 싶다고 나왔다. 다른 여자한테 가슴이 뛰었다니. 그게 여자친구 앞에서 할 말이야? 그가 미웠다.
정처없이 앞을 향해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그 미운 감정이 곧 나 스스로에 대한 한심스러움으로 바뀌었다. 그 여자는 지금 베트남에서 행복하게 쌀국수 먹고 분짜 먹고 그럴텐데... 내 존재도 모르는 여자를 이렇게나 신경쓰다니. 난 뭐가 문제일까. 보통의 여자들도 자기 남자의 첫사랑을 이렇게까지 질투하는 걸까?
하염없이 걷다 보니 다리가 아팠다. 어디에 앉아있고 싶었는데 하필 그때는 카페에서 매장 내 취식이 불가했다. 날씨가 추웠다. 눈앞에 맥도날드가 보여 저기 앉아서 커피를 마셔야겠다 싶어 들어갔다. 커피를 시키자 점원이 말했다. “지금은 매장 안에서 커피 드실 거면 햄버거나 다른 음식도 같이 시켜서 드셔야 돼요.” 나는 햄버거도 하나 시켰다.
그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맥도날드야.”
“거기서 뭐 해?”
“햄버거 먹어.”
“......햄버거?...“
햄버거를 먹게 된 경위를 설명해야 하는데 기운이 빠져 설명하기가 싫었다. 점원 눈치가 보여 한입만 먹은건데... 졸지에 나는 화내고 뛰쳐나가 치사하게 혼자 햄버거 먹은 사람이 됐다.
전화를 끊고 나니 그에게 미안해졌다. 그는 나 하나만 보고 학교도 못 가는 이상한 교환학생을 하러 한국까지 왔는데... 내가 이러면 안되는건데...
버거 세트를 포장하고 가는길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였다. 그가 좋아하는 아몬드봉봉도 포장했다. 집에 가서 봉투를 내밀며 그렇게 일방적으로 화내고 나간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자 그가 다다다다 속사포처럼 말했다.
“감자야 나 억울해! 못 본 지 10년이 다돼서 이제 이름도 잘 기억 안 나. 그리고 그때 초등학생이었는데 무슨 사랑이야 그게!”
“초등학생이라고 뭐가 달라. 가슴이 뛰었다며!!"
멈칫.. 그는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깐 가슴 안 뛰었어.”
뻔뻔한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그냥 하는 말인 걸 아지만 가슴이 안 뛰었다니깐 기분이 좀 좋아졌다. 내가 웃는 걸 본 그는 버거를 먹었다.
같이 아몬드 봉봉을 먹으며 약속을 받았다.
대만 가면 앨범에서 그 사진을 빼놓을거지?
빼놓는 게 아니고 버릴거야!
다음날 평소처럼 그가 도시락을 싸는 걸 구경하려는데 그가 철통 방어했다. 완성된 도시락을 보여줬는데 도시락속에 하트가 있었다. 귀여운 하트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지금 그가 사랑하는 건 나야.
누군가가 그와 만나면서 싸운 적 있냐 물었을 때 딱히 그런 적이 없기에 이 날이 떠올랐다. 얼마 전 둘이 같이 이 질문을 듣고 돌아오는데 그가 말했다.
“감자야 너 예전에 그 첫사랑 얘기하다 집 나간 날 기억나?"
민망해진 나는 얼버무리며 그날 내가 너무했었다 말했다. 그러자 그가 뜻밖의 이야기를 해왔다.
"나 그날 엄청 좋았는데?"
“응...? 왜?”
“감자가 나 없이 못산다고 했잖아.”
응? 이게 무슨 소리람.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는 진지했다. 그는 내가 뛰쳐나가기 전의 대화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가슴이 안뛰었다고 말을 바꾼것도, 아몬드봉봉을 먹은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그날은 이랬다.
“그때 내가 감자한테 내가 그렇게 좋냐 물으니깐 감자가 너무 좋아서 나 없으면 못산다고 했잖아!”
내 기억엔 전혀 없는 부분이었다. 그는 내가 기억해내지 못하자 답답해했다.
“정말 기억 안나? 나 없으면 못산다고 그러길래 ‘맨날 내가 쫓아다녔는데 사실 감자가 날 더 좋아하는구나?’ 했단말야. 그러니깐 감자가 맞다고 인정했어. 어떻게 이걸 잊을수가 있어?”
정말 누가 내 머리를 비운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그 날의 일기까지 찾아봤는데 그런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이걸 차라리 잘됐다고 해야할까...
싼베이지三杯雞는 3컵 치킨이란 뜻으로 간장, 쌀주, 참기름이 같은 비율로 3컵 들어간다는 요리이다. 하지만 요리하는 걸 옆에서 보면 비율이 많이 달라보였다. 원래는 대만 바질이 들어가는데 바질이 없어 파를 넣었다. 중국술인 샤오싱와인과 생강이 많이 들어가 한입 먹으면 입안에 대만의 맛이 바로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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