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 풍경은 부모님 세대에 머물러 있었다. 엄마는 장녀였고 아빠는 차남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맏이의 역할을 했다. 두 분 다 깡 시골에서 태어나 배곯면서 살았다.
엄마는 그 많은 동생들을 거두기 위해 장기적으로 보면 대졸자가 되는 게 이득이라 친척들에게 빌린 돈으로 겨우 대학에 갔다. (엄마는 할아버지의 이 계획이 당시에는 굉장한 신식 아이디어였다고 했다.)
우리 엄마아빠는 부모 그늘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 가장이었다. 20살이 된 순간부터 돈벌어 동생들 대학 졸업 시키고 결혼자금 마련해서 시집 장가보냈다. 그러면서도 늘 좀 더 못해준 동생, 대학 공부를 못 시켜준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 남녀가 꾸린 가정의 장녀인 나에겐 맏이 역할이 당연하게 부여됐다.
어릴 적 우리 집엔 늘 이모, 고모, 삼촌들이 같이 살았다. 작은 외삼촌이 군대를 가서 나가면 대학에 입학한 막내고모가 집에 들어오고, 고모가 나가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모가 들어오고 이런 식이었다.
이모와 삼촌들은 우리 집에 살며 나와 동생들을 돌봐주시기도 했다. 그러다 이모 삼촌들이 다 떠나고 집안일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동생들을 챙기고 식사를 차리는 건 당연했다. 나는 평생 식욕이 없이 살았는데 두 남동생들은 늘 식욕이 왕성했다. 초등학교 4학년쯤부터는 집에 오면 거의 매일 장을 봐서 저녁밥을 차리고 애들을 먹였다. 부모님이 퇴근 후에 드실 것까지 넉넉히 했다.
부모님은 주 6일을 꽉 채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셨다. 한 번은 일을 좀 줄이면 안 되냐 했다가 크게 혼났다. 집에 오면 뒷정리를 하다 지쳐 잠드는 부모님께 밥 하는 게 힘들다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10시간이 넘게 서서 일한 엄마의 다리는 항상 부어있었다. 엄마가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 딸이 최고야. 엄마는 딸 덕분에 사는 거야.
동생들이 하필 너무 착했다. 누나한테 대들기나 하면 다 놓을텐데 늘 누나 고마워하는 마냥 순한 애들이었다.
밥 하는 것 외에도 나를 지치게 한건 많았다. 집안일은 안 하는 사람은 모르지만 하는 사람에겐 끝도 없다. 밥하고 청소하고 동생들 씻고 이 닦았는지 확인하고 숙제했는지 확인하고 빨래하고 빨래 널고 빨래 개고... 빨래는 왜 3단계나 거쳐야 할까.
동생들이 삐끗하면 내가 혼났다. 숙제를 안 했을 때도, 친구와 싸웠을 때도 맏이인 나에게 책임이 있었다. 뒤치다꺼리도 지겨웠다. 둘째가 가방에 우유를 터트려오면 내가 빨아서 널어야 했고 막내가 버스에 열쇠를 놓고 내리면 내가 찾아와야 했다. 가끔은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 종아리도 맞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야자를 하며 어느 정도 집안일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토요일 자습 전에 세탁기를 돌리고 동생들 밥을 차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친구들이 생각보다 더 놀라했다. 어렴풋이 다른 집은 안 그렇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귀를 의심하며 몇 번이고 물어보는 친구들을 보니 우리 집이 정말 특이하긴 한가 보다 싶었다. 그때쯤 엄마아빠에 대한 미움도 커졌다. 고등학교 때는 항상 엄마아빠와 부딪혔고 동생들은 내 눈치를 많이 봤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땐 엄마 아빠와 한 공간에 있는 것도 싫었다. 우리 집에 살았던 작은 외삼촌의 집에서 한 달간 같이 지냈다.
갈등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난 장녀이기에 항상 특출 나게 우수해야 했다. 모든 면에서 그랬다. 어릴 적부터 남들은 칭찬받는 등수를 받아오면 호되게 혼났다. 부모님이 정해준 대학의 마지노선이 있었다. 사는 게 지겹고 힘들었다. 공주처럼 해맑은 애들을 보면 쟤는 뭐가 저렇게 즐겁지? 싶었다. 친구들은 그때쯤 첫사랑도 했는데 나는 누군가에게 설레는 일도 없었다. 모든 일에 시니컬해진 나 자신도 별로 안 좋아했다. 내가 예민한 편이라 안 불행해도 될 정도까지 불행해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 후 내가 부모님에 대한 미움을 나름 풀어버린 건 내가 대학 입학식을 앞두고 알바 자리를 구한다고 말했을 때의 일이다. 자식 아끼는 것 치고는 좀 유난이고 심했다. 내가 알바자리를 구하겠다고 하니 펄펄 뛰었다.
너 대학 가서 공부해야 될 시간에 돈 버는 게 얼마나 서럽고 힘든 줄 알아? 절대 하지 마. 엄마가 돈 다 대줄 수 있는데 네가 일을 왜 해?
아빠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때 내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다. 그들에겐 돈 벌어다 주는 일이 최우선이었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그게 양육의 전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엄마아빠의 엄마아빠는 돈 벌어 자식 밥먹이는일 조차 못해줬었으니깐.
그리고 몇 년을 거치면서 부모님과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 보통의 부모 자식 관계 정도는 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 아빠를 이해하는 게 내가 덜 상처받는 길이라는 걸 상담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엄마아빠를 이해했다. 상담선생님께서 집안을 건사해야 하는 같은 목표가 있는 같은 처지의 두 남녀가 만나서 의지했다는 건 다행인 일이고, 부모, 동생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며 자식들도 챙기는 건 힘든 일이라는 걸 인정해야 된다 하셨다. 나는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인정했다. 엄마아빠의 인생도 참 고됐다.
서울로 상경한 나는 혼자만의 자취방에서 어떤 집안일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쌀도 안 사고 햇반도 안 샀다. 식욕이 없으니 하루 한 끼 정도만 밖에서 대충 때우면 됐다. 배가 고프면 잔뜩 사놓은 컵시리얼에 우유를 부어먹었다. 나에게는 먹는 즐거움보다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즐거움이 컸다.
왜 나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식욕이 없었을까? 이 질문의 궁금증이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해결되었다. 다 내 손으로 내가 한 밥이기 때문이었다. 밥을 할 때는 음식 냄새가 그렇게 좋지 않다. 냄새가 뭐랄까... 지겨워진다. 밥 하는 도중 간을 계속 보다 보면 혀도 지겨워진다. 몸은 땀에 절고 지친다.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에 첫 술을 뜨는 즐거움은 나에겐 없었다.
나는 남자친구가 우리 집에서 밥을 하는 게 유난히 미안했는데 아마 내가 요리를 즐기지 못하고 항상 노동으로만 생각했기에 남자친구가 그 힘든 일을 한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요리를 할 때면 매번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했고, 나에겐 그 모습이 참 낯설었다.
남자친구는 연애초반에 나보고 너는 줄줄만 알고 받을 줄을 모르는 사람 같다고 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나와 함께 하면서 받는 거에 익숙해질 거야. 그때는 그게 안될 줄 알았다.
남자친구가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주었을 때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 어릴 적엔 김밥은 없고 유부초밥만 있었다. 그게 손도 덜 가고 만들기가 쉬었기에 엄마는 항상 유부초밥만 만드셨다. 웃긴 건 유부초밥을 싸가면 친구들은 늘 내 유부초밥을 탐냈고 나는 친구 엄마들이 정성껏 싸주신 김밥을 유부초밥과 바꿔가며 하나씩 다 맛볼 수 있었다.
친구들한테 자주 들은 얘기가 있었다. 사 먹는 김밥은 한 줄이면 배부른데 집김밥은 끝없이 들어가서 세줄 네 줄도 먹을 수 있어. 나는 그게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모르는데 애들은 너도 나도 다 그렇다고 끄덕였다. 그렇구나 싶었다.
아직도 그에게 과거의 얘기나 내 마음에 남아있는 감정을 얘기하진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내 어린 시절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다. 그가 본 우리 부모님은 우리가 본가에 가면 버스터미널에 마중 나와 바로 짐을 들어주시고 우리 손을 잡는 분들이다. 그는 언젠가 웃기다며 말했다.
아빠가 감자한테는 공주라고 하는데 동생들한테는 이놈이라고 하시는 게 너무 웃겨. 공주랑 하인들 같아.
그는 정말 내가 공주처럼 자란 줄만 안다. 이젠 막내까지 성인으로 다 컸다. 그는 내가 뭐라하면 동생들이 따까리처럼 구는 모습만 보았다.
김밥을 먹다가 사실 누가 나한테 직접 김밥을 싸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네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어쩌다 보니 말이 울적하게 나왔다. 그는 앞으로 김밥을 많이 싸주겠다 했다. 그리고 정말 도시락으로 김밥을 자주 싸줬다. 아무것도 아닌 날에 김밥을 받아먹다니.. 이거 너무 황송하잖아!
그와 몇 년간 함께하며 나는 최근에서야 요리의 즐거움을 찾았다. 얼마 전 부러진 쇄골을 부여잡으면서 그의 생일상을 차릴 궁리를 하는데, 메뉴를 적다가 보니 조금 많아졌다. 그런데 장 보러 가는 시간부터 요리를 해서 식탁에 내놓기까지 너무 설레고 재밌었다. 사랑하는 사람 밥 해 먹이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구나 싶었다. 동생들한테는 사랑하는 마음이 덜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