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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도감자 Sep 11. 2024

베란다에서 나는 수상한 소리

오이가 왜 거기서 나와?

 그가 교환학생을 왔을 때 나는 아주 조그만 베란다가 딸린 6평 원룸에 살고 있었다. 부엌 중문도 없는 구조라 침실이 곧 부엌이고 거실이었다. 그는 잠이 없어 내가 오전강의가 있는 날이면 나보다 먼저 일어나 도시락 준비를 했는데, 나는 잠귀가 어두운 데다가 안대까지 끼고 자서 그가 일어나 왔다 갔다 거려도 잠에서 잘 깨지 않았다.

어느 날 내가 자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덜그럭 소리가 나는 걸 들으면서 깰 듯 말 듯 잠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 내 잠을 깨우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는데...

퍽 퍽 퍽

잘못 들었나?


퍽 퍽 퍽

가깝지만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가 났다. 이게 뭐지? 안대를 벗고 당연히 그가 있을법한 부엌을 봤는데 그가 없었다. 어딨지? 두리번거리며 화장실로 가보려는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악!

내가 깜짝 놀라자 암막커튼을 헤치고 나온 그도 놀랐다. 그의 한 손엔 지퍼백이, 나머지 한 손엔 돈가스 고기 펴는 망치가 들려있었다.


베란다에서 뭐 했어?

오이 때렸어...

왜?

파이황과 할 거라서

아니 근데 왜 거기서 때려?

시끄러우니까! 혹시 소리 들렸어?


그는 오이를 부숴서 만드는 파이황과를 하려고 베란다에 나간 것이었다. 상황파악이 되자 웃음이 나왔다.


베란다랑 침대랑 1m도 안되는데 당연히 들리지!

안 들릴 줄 았았는데!


 그는 아쉬워했다. 새삼 참 섬세한 남자구나 싶었다. 그를 알게된 후 생각지도 못한 배려를 받아 놀라고 감동하는 일이 많았다. 이 날도 내 잠을 지켜주려 베란다로 나간 그에게 고마웠다. 그렇지만 베란다는 항상 추웠고 그에게 다음부터는 나가지 말고 그냥 안에서 부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파이황과를 반찬으로 싸줄 때마다 베란다로 나갔고 그 뒤로 잠결에 베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생각했다. 또 파이황과 하는구나... 맛있겠다...




 하루는 조조영화를 보기로 한 날 아침이었다. 내가 먼저 일어나 나갈 준비하고 뒹굴거렸는데 그는 피곤한지 볼을 찔러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챙겨 놓을 게 뭘까 둘러보니 원두가 보였다. 그는 드립커피를 아주 좋아하는데 전날에 갓 사온 신선한 원두로 내린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가 영화 보자며 신나 했었다. 내가 미리 커피를 내려놔야겠다 싶었다. 핸드밀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천천히 손잡이를 반바퀴 돌리는데 그가 움찔했다.

영화 시간 생각하면 20분 정도는 더 잘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가 깨면 내릴까 싶다가도 갓 내린 커피를 텀블러에 담으면 너무 뜨거울 거 같았다. 냉동실을 열어봤는데 얼음이 한조각도 없었다. 어쩌지 싶던 내 눈에 베란다가 들어왔다.

와 진짜 베란다가 보이는구나...

패딩을 챙겨 베란다에 나가서 문을 꽉 닫았다. 천천히 원두를 갈고 있었는데 커튼이 확 걷혔다. 쪼그려 앉아 원두를 갈고 있는 나를 본 그가 내 모습이 웃긴지 크게 웃었다. 사진도 찍어갔다.




소고기김밥. 가지나물. 복숭아. 파이황과.



파이황과 (拍黃瓜)

황과는 오이를 뜻하고, 파이는 '치다'라는 뜻이다. 오이를 쳐서 으깬 다음 듬성듬성 잘라서 양념에 무친다. 식초가 들어가 새콤하고 깔끔하다.

원래는 도마에 오이를 올려놓고 중식도로 쳐서 한 번에 부순다. 하지만 우리 집엔 중식도가 없기도 하고, 그의 말로는 한국에서 사는 오이는 수분기가 많아 칼로는 대만오이만큼 잘 부서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지퍼백에 넣고 망치로 부숴서 넣는다. 대만에서 오이를 사보았는데 정말 속이 건조하게 바스러지듯 부숴지고 씨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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