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빠랑 헤어지고 싶지만 친구들이랑은 헤어지기 싫다
친구들은 다들 태권도를 다니거나, 웅변학원을 다녔다. 나도 학원을 안 다닌 것은 아니다. 태권도를 해보았지만 많은 사람들과 뭔가를 같이 하는 게 쑥스러웠다. 남들은 곧잘 하는 것도 난 어리숙하게 따라 하여 동작을 하나하나 할 때마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웅변학원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미술이나 피아노도 엄마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배우다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었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해온 바이올린은 계속 연습해야 했다. 엄마는 무서울 정도로 바이올린 연습을 시켰다. 수많은 동그라미에 줄을 하나씩 그어가며 연습할 때는 정말 끝이 안 보였다. 몰래 동그라미에 줄을 세 개씩 그어도 여전히 동그라미는 많이 남아있었다.
난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해서 가끔 큰 무대에서도 바이올린 연주를 하곤 했다. 그런 무대가 있을 때면 우리 반 선생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다른 반에 찾아가 바이올린 연주를 시키셨다. 사람들 앞에 혼자 서있으면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런 자리에 절대 안 나가는데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는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여덟 반을 돌며 미뉴에트를 연주하고 돌아왔다.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나서 내가 모르는 다른 반 친구들이 나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나는 쑥스러워서 제대로 인사하지는 못했지만 친구들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거 같아서 좋았다. 미술시간에 친구 얼굴 그리기를 했는데 다른 친구들이 모두 내가 바이올린 연주하는 모습을 그렸다. 쑥스러워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기분이 좋아서 집에 돌아가 엄마한테 친구들이 다 내 얼굴을 그렸다고 자랑했다.
학교에서 학예회를 하는데 선생님께서 나보고 거기 나가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라고 하셨다. 바이올린 연주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서 알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또 선생님께서 나를 데리고 반을 도셨다. 우리 반에서 연주를 마치고 옆 반으로 갔다. 옆 반에 들어가서 교실 뒤편 사물함 위 초록색 벽을 보았는데 거기에 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림들이 붙어있었다. 다른 반 친구들도 미술시간에 나를 그린 것이다. 기분 좋았지만 쑥스러워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친구들이 다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좋다.
"야 철수가 니 데려오래"
점심을 먹고 책상에 앉아있는데 처음 보는 애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철수가 부른다면서 나랑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철수가 누군지 안다. 철수는 싸움을 엄청 잘해서 아무도 철수한테 못 까분다. 철수한테 맞은 친구도 있다.
'철수가 나를 어떻게 알지?'
나는 무서웠다. 왜 나를 부르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철수랑 같은 반이 돼 본 적도 없고 같이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다. 근데 왜 철수가 갑자기 나를 부르는 것일까 궁금하고 두려웠다. 나를 데리러 온 친구와 함께 운동장으로 나갔다. 운동장에는 형들이 축구를 하고 있어서 축구 골대 뒤쪽 나무들이 있는 길로 그 친구를 따라 걸었다. 그냥 반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철수가 우리 반으로 찾아올 것 같았다. 그래서 다 포기하고 그냥 따라갔다. 나를 데리러 온 친구는 뺑뺑이가 있는 쪽으로 갔다. 그리고 동그란 뺑뺑이 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철수 얘 데리고 왔다."
나는 뺑뺑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엔 햇빛 때문에 눈이 너무 부셨다. 그러다 철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철수는 왼쪽 눈과 코 사이에 기다란 상처가 있는 무섭게 생긴 친구였다.
"마 니 영희 좋아하나?"
영희? 철수는 나를 보자마자 영희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곧바로 영희라는 애는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영희 모른다꼬?"
"어 영희 잘 모르겠는데?"
"알았다 가라"
나는 응이라고 짧게 대답하고 곧바로 뒤돌아 교실로 걸었다. 사실 영희를 안다. 영희는 우리 엄마 음악 학원에 다니는 얼굴이 이쁜 친구다. 근데 진짜 그 애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냥 이쁘다고만 생각했지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것보다 철수한테 맞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안 맞아서 다행이다. 근데 갑자기 영희를 좋아하는 건 왜 물어본 건지 모르겠다.
다음날 철수는 우리 반으로 찾아와 나를 끌어당기고 복도로 갔다.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나보고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알겠다고 대답했다. 도대체가 나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친구들이 나를 좋아해 줘서 좋긴 하지만 무서운 친구까지 나랑 친구 하자고 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서운 친구랑은 친구 하기 싫은데 싫다고 말도 못 하고 고민이다.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가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고 했다. 아빠한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서 학교도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제 우리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좀 사귀었는데 다른 곳에 가면 어떻게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새롭게 이사를 간 곳은 거창이라는 시골이었다. 엄마는 거창읍이라는 곳에 음악 학원을 새로 열었다. 학원의 남는 교실 하나에 침대와 장롱을 넣었고 또 다른 방에 냉장고와 가스레인지를 놔두었다. 화장실은 학원 밖에 있었는데 화장실에는 남자가 오줌을 누는 소변기 하나와 쪼그려서 싸는 재래식 변기 세 개가 있었다.
엄마는 이제 여기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다른 것보다 밤에 어떻게 화장실 가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아파트에 살 때도 무서워서 화장실 갈 때면 엄마를 깨워 나를 보고 있어라고 했는데 말이다. 난 이제 밤에 화장실에 못 갈 것이다. 만일을 위해 자기 전에는 오줌을 꼭 누고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