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고민을 하지 않고 하루를 지나가 본 일이 있었나?’ 따져볼 만큼 고민과 함께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누구에게나 고민의 시간이 비슷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고민하는 내게 ‘왜 그런 걸로 시간을 잡고 있어?’라고 나를 판단할 때도 있고, 도리어 내가 누군가가 하는 고민에 대해 ‘왜 그런 걸로 오래 고민해?’라고 판단할 때도 있는 것을 보면 고민은 개인마다 그 강도와 판단하는 잣대가 제각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준은 다르지만 어쨌든 사람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고민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데 제 고민의 기준은 좀 더 예민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때로는 예민한 고민의 기준 때문에 혼자만 너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고민 속에 고민을 한 적도 많습니다. 그런 제게 작가님의 책은 ‘당신은 유별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위로하는 듯 느껴졌습니다. 스스로 고민하는 깊이 있는 시간들이 더 나은 스스로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통해 나의 외로웠던 고민의 시간들도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홉 가지 테마를 통해 작가님의 고민과 생각과 경험들을 밑바탕으로, 작가님의 인생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의 방대한 이야기를 적절하게 곁들여 주셔서 읽는 내내 삶의 지혜를 공짜로 얻는 듯한 기분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특히 작가님을 표현하는 많은 단어들 중에서 ‘재일교포’라는 수식어가 눈에 띄었는데요. 작가님께서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자세하게 다 알 수는 없지만 수식어를 통해 느껴지는 묵직한 삶의 무게가 저에게는 더 공감이 되는 글로 다가왔다는 솔직한 마음을 고백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공감을 통해 위로를 받고 책을 덮고 나니 작가님의 고민의 흔적들을 따라가며 제가 느낀 소감과, 저의 고민의 시간들, 그리고 몽글몽글 피어나는 생각들을 작가님께 들려드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편지글을 통해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먼저 작가님의 첫 번째 질문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첫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두 단어를 꼽아본다면 ‘자기중심주의’와 ‘진지함’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주의를 가진 사람들을 쉽게 비판하고 나무라면서 의외로 자신의 자기중심주의적 성향은 못 보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부터도 반성하게 되는데요. 자기중심주의 혹은 스스로의 연민에 빠져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나를 우선시하면서 다른 사람의 자기중심주의적 성향을 보고는 성급히 그것을 탓하기에 바쁘지 않나 생각합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내로남불이라는 단어가 정치 분야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지만, 과연 이 단어의 적용이 정치권에만 한정되어 있는지 주위만 쓱 둘러봐도 너무 쉽게 보여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남에게 빈틈없는 기준으로 뾰족한 시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지적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적 사람을 나무랄 자격이 비로소 주어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사실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은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거나 나무라기보다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언제나 그렇지 못한 마음들이 문제겠지요. 아직 성숙한 마음에 제대로 이르지 못한 저도 쉽게 타인에게 조언을 하려고 나서기보다는, 스스로 더 성숙해지기 위한 단련에 부지런히 힘써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이야기를 빌려 말씀해 주신 ‘진지함’에 다가가야 한다는 작가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진지함과 자기중심주의는 어쩌면 연결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지하게 고민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를 멀리하고 타자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요. 요즘은 유머가 있는 사람이 인기도 많고, 매력적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과대 포장되어 진지한 사람은 재미없고 매력 없는 사람으로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말도 좀 더 가볍고 농담처럼 하거나, 인싸 아싸라는 말로 구분하여 진지함을 추구하는 것을 별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요즘은 이 관계라는 것이 진지함을 경시하면서 스트레스의 주범이 될 만큼 피곤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진지한 관계가 아니라 피상적인 관계에만 집중하고, 내면을 공유하는 것에 피곤함을 느끼며 수박 겉핥기식 관계를 지향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작가님의 글을 통해 ‘지피지기’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도 알아야 하고 ‘나’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알려고 하는 자세와 마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정성스럽게 나를 알려고 하는 진지함을 보일 때 저는 왠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집니다. 빠르고 편한 관계를 쉽게 선택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 냄새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시대로 급작스러운 변화를 맞은 요즘은 사회가 연일 어수선합니다. 왁자지껄하기보다는 조용함을 추구하게 된 요즘 진지함을 진심으로 추구하는 자세를 연습해 보면 어떨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힘든 시기 정확한 해답을 찾기 어려운 ‘나’와 ‘타인’, ‘관계’에 대한 지혜로운 길이 보이지 않을까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두 번째 질문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 돈 때문에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윤리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본의 논리 위를 걸어갈 수밖에 없다… ’ 입니다. 이 문장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돈을 완전히 속물로 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추구하지도 않는 중간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릴 때는 돈을 추구하는 것이 속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고, 삶을 살아가다 보니 돈으로 인해 사람이 평가되기도 하고, 가장 가까운 가족간의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지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를 돕는 역할을 통해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뜨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돈은 없는 것보다는 있을 때 많은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본의 논리 위를 걸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사실상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작가님의 말씀대로 그 위를 걸어가며 갖는 마음은 어려움은 있겠지만 내 의지로 조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돈에 의해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윤리를 판단하지 않는 것. 내 마음을 먼저 움직이고 윤리를 먼저 생각하고 그 마음에 따라 돈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성인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생명도 붙어 있지 않은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생명도 붙어 있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람이 돈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는 것은 어쩐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사실 그 자존심 상하는 일이 일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내 마음인데도 돈 앞에서 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그래도 노력하면 조정할 수 있는 게 내 마음이지 않을까요. 배신의 변수가 충분히 많은 돈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롭게 움직일 수는 내 마음을 단련하는 것이 더 현명한 투자가 아닐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래도 작가님의 말씀처럼 마음을 흔들리지 않고 자본의 논리 위를 가뿐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보겠다고 다짐합니다.
네 번째 질문 ‘청춘은 아름다운가?’에 대한 내용은 반복해서 몇 번을 되뇌일 만큼 인상 깊었던 부분입니다. 아마 파릇파릇한 나이를 힘겹게 지나고, 아직 청춘이라고 불리는 시기를 한창 지나고 있기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젊어서 좋겠다’는 말이 정말 싫습니다. 나이가 젊기 때문에 좋을 것이라는 그 말은 ‘나’에 대해 아무런 공감도 없이 그저 겉모습만 바라보고 무성의하게 건네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까운 사일일수록 이런 말은 더 무성의하게 들립니다. 작가님은 ‘봄’이 가장 힘들다고 하셨죠. 저도 항상 똑 같은 마음이었는데 제 마음을 알아주는 이야기를 읽으며 얼마나 마음이 찡해졌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물이 시작하는 봄을 가장 좋은 계절로 꼽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면 ‘모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곁눈질하면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봄이라는 계절은 어떤 의미에서는 잔혹한 계절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신 것처럼 모두가 파릇파릇한데 저만 우중충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를 준비하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고, 움직이고, 부지런을 떨어서라도 ‘열심히라도 잘하는 사람’으로 대중의 레이스를 맞춰가려고 부던히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진로를 고민해야 했던 성인의 초입부터 지금까지 ‘나’에 대한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벌써 십 년을 훌쩍 넘긴 고민인데도 ‘나’에 대한 고민은 꼬리가 끊어지질 않아 답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이런 고민을 끝도 없이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나의 청춘기만 답답한 것 같고,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하시니 지금 늦은 청춘을 지나고 있는 ‘나’에 대한 고민이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위안을 받았습니다.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 밖에 없다’라는 선생님의 해답을 저도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명확한 답을 찾으려고만 하지 말고 갈 수 있는 곳까지 계속해서 발을 내딛어 보면 무언가 얻는 것들이 있겠지요. 청춘이 아름다운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먼저 지나온 선배로서 그 아픔을 함께 공유해 주는 분을 만나면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인생을 먼저 살아온 선배라는 것은,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은 이제 같은 시기를 지나올 또 다른 청춘의 시대를 공감해 주는 배려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나도 여유가 없고 마음이 팍팍하지만, 끙끙거리고 꾸역꾸역 걸어온 청춘의 길을 되뇌며 저도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하고 알아줄 수 있는 청춘 선배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청춘의 아픔은 해답을 줄 수도 없고, 딱 맞는 조언을 해 줄 수도 없으며, 공감만이 가장 큰 치유와 힘이 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며 고민했던 기억을 잊지 말고, 꼰대가 아닌 청춘의 선배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덟 번째 질문 ‘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 글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남은 단어는 ‘공허함’입니다. 삶은 한치 앞도 예측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나이의 숫자가 하나하나 더 많아질수록 더 강하게 드는 것 같습니다. 삶의 실패가 적을 때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더 나아지는 인생이 되겠지 희망과 기대가 컸는데, 반복된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어쩌면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앞으로도 더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에 빠져 죽음이나 삶이나 매한가지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도달하게 되기도 합니다.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공허함’이라는 것은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너무 커져 버리면 그 헛헛함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어려움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공허해지지 않고 삶을 앞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작가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관계를 계속해서 찾으라는 말에도 동의하지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코로나 시대를 맞아 관계가 더없이 어려워진 요즘에는 아무래도 관계를 통해 힘을 얻기보다는 자신만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원동력을 계속해서 비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공허함은 시도 때도 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제멋대로 찾아옵니다. 힘을 비축해두지 않으면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기 십상입니다. 결국 귀찮더라도 찾아지지 않더라도 시간을 갖고 고민을 쉬지 말아야겠지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 도대체 시간이 지나도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에 고민 따위 귀찮아지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겠지요. 끈질기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나도 모르는 새에 뚜렷하고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만족스러운 답에 근접해질 것이라고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확신해 봅니다.
스스로 숨을 내쉬고, 생각을 하고, 살아있는 온기를 갖고 있다는 것은 가만히 집중해 생각해 보면 참 신비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크든 작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살아있는 또 다른 생명에게 온기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바쁘게 삶을 살다 보면 가만히 집중해 생각할 시간조차 잊어버리고 무한대로 지칠 때가 많습니다. 자꾸만 포기가 울컥울컥 치솟아 오르지만 오늘도 나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을 비축하기 위해 고민을 이어가야겠습니다. 저의 원동력이 언젠가는 여유 있을 만큼 넉넉한 날도 오겠지요?
아홉 번째 질문 ‘늙어서 최강이 되라’에서 가장 인상 깊은 단어는 ‘뻔뻔함’입니다. 단순한 뻔뻔함이 아니라 끝없는 고민 끝에 가지는 뻔뻔함. 저는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그냥 뻔뻔함과 진지하고 오랜 고민 끝에 나온 뻔뻔함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자의 경우가 타자에 대한 뻔뻔함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뻔뻔함이 아닐까요. 도전에 앞서 쭈뼛거리지 않고, 어려움이 닥쳐도 우물쭈물하지 않는 뻔뻔함 그것이 후자의 뻔뻔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자의 뻔뻔함을 갖추었다면 분별 있는 노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의 자기중심적인 문제점도 요즘 지적할 만하지만 작가님의 이야기처럼 분별없는 노인 세대가 늘어난다는 것도 서글픈 일입니다. 무한 경쟁 속에 대책 없이 밀려나게 된 노인 세대의 아픔도 있지만 끝없는 고민이 부재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별 없는 노인 세대를 마주할 때면 나의 미래도 분별 없는 사람으로 묶여질까 봐 두려워집니다. 요즘은 젊어서도 만족스럽지 못한데 노인이 되어서도 만족하지 못하게 될까봐, 마주하기 싫은 모습으로 마주서게 될까 봐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작가님의 글을 통해 끈질긴 고민과 함께 뻔뻔함을 가진 분별 있는 노인으로 나이 들겠다고 굳게 다짐합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이 드는 만큼 삶의 이치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작가님의 책을 읽기 전 고민을 걱정과 혼돈하기도 했습니다. 고민하는 시간을 걱정하는 시간과 동일시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고민과 걱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걱정이 불안감을 계속 불러일으키는 행위라면 고민은 불안감을 잠재우는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민은 끊임없는 사고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가치를 형성하고 지혜로운 선택을 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나이를 먹고 고민을 오래 해도 걱정이 사라지지 않을 때가 많고, 마음이 불안해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지혜로운 선택을 놓치는 일도 많습니다. 인생은 왜 이리 어려운지, 삶은 왜 이리 고달픈지 뭐라 표현하기 힘든 말들이 마음과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날이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토로하고 싶은데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할지 이 말을 이해해 줄지 망설여져 답답한 날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작가님을 만나 공감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시기를 이미 지나간 작가님도 여전히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제가 헛되게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안심도 얻습니다. 인생은 좋은 날보다 좋지 않은 날이 많기에, 아직도 많은 살아갈 날 속에서 작가님의 질문과 답을 향해 가는 담담한 말들을 곱씹으며 잘 살아 보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저도 고민하는 힘을 원동력으로 나이 들어감에 따라 고민하는 힘의 영향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의 이야기로, 위로의 이야기로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진심을 담은 정성스러운 글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이만 편지를 줄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