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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고운 May 15. 2022

취는 농염한 여인이다

나는 또 오랜 기다림으로 취의 향기를 그리워할 것이다.



  취는 젊고 아름답고 보드라운 여인이다. 취는 사랑을 알고 자신만만하게 유혹의 향기를 은밀히 내뿜을 줄 아는 농염한 여인이다. 취는 모든 것을 내주면서 생색내지 않는 현모양처이다. 취는 오랜 세월 내게 끝없이 베풀어준 자연의 오묘한 선물이며 떠나간 여인처럼 언제나 생각나는 그리움이다.     

  지난 월요일 시내버스 환승을 위해 중앙시장 승강장으로 가다가 성당 담 밑에 좌판을 벌여놓은 노인이 취나물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취를 자세히 보니 참취에 곰취, 더덕취도 섞여 있어 자연산이 분명했다. 벌써 대가 제법 길게 나와 한 뼘 길이로 자란 것도 있다. 얼른 3천 원짜리 두 바구니를 사서 가방에 넣고 시내버스에 올랐다.

  버스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코끝에 향긋한 냄새가 스쳤다. 안고 있던 가방 속에서 취나물이 내게 보내는 유혹이었다. 지퍼를 열고 추억처럼 그립던 향기를 맡으며 머릿속이 청량해지는 작은 행복에 취하다 보니 집에 다 왔다. 이제 그 향기를 입에 모셔서 더욱 행복해질 차례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냄비에 물을 올리고 소금을 넣은 다음 취를 꺼내 부실한 잎들을 골라내고 삶았다. 조물조물 무쳐 일단 한입 욱여넣고 깨물었다. 아삭아삭 입안에 터지는 향, 바로 이 맛이다. 봄의 향기가 비로소 내 몸에 퍼지며 나는 조금 더 행복해졌다. 그리고 내 오랜 산벗에게 전화했다.     

“취가 많이 자랐어, 더 늦으면 나물 못 먹을 거 같은 데 가야지.”     

“내일 비 온다고 하더만 어쩌지?”     

“비 오면 맞지 뭐, 대신 시원하고 좋잖아? 여벌 옷 챙겨서 낼 아침에 일찍 우리 집으로 와”     

“알았어, 비가 많이 안 오면 7시쯤 갈게”     


  걱정하던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임실 관촌을 지나 진안군 성수면 지역의 가파른 산 위로 올라갔다. 마른 비탈에 드문드문 이제 대가 나오기 시작한 어린 취나물이 보였다. 반 시간쯤 올라가 임도에서 잠시 쉬었다. 나보다 네 살이 많은 그는 산에서 허덕거리는 일이 없을 만큼 산을 잘 탔는데, 헐떡거리며 숨 고르기에 바쁘다. 세월이 쇳덩이 같던 그조차 지치게 만든 것이다. 가져간 초콜릿 바와 물을 마셔 원기를 돋우고 다시 올라갔다. 상수리나무 숲을 벗어나 벌목한 지 4년쯤 돼 보이는 산 중턱에 들어서자 취나물이 여기저기 다보록한 자태를 보인다. 요즘 비가 자주 내리고 갑자기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나물들이 쑥쑥 자랐다. 나무 그늘이나 덤불 속에서 숨어 자란 취는 여인의 속살처럼 나긋하고 보드랍다. 길이가 한자 넘게 자라고 통통한 대는 새끼손가락만큼이나 굵지만, 손가락으로 누르면 깨질 만큼 연하다. 그런 취들은 칼도 대지 않고 슬쩍 꺾으면 된다. 취 대는 꺾이면서 진한 향기를 내뿜는다. 젊은 여인의 체취처럼 오묘하고 싱그러운 취향을 나는 좋아한다. 어떤 인공의 향수도 내지 못하는 그 싱그러움에 반하여 나는 매년 가파른 산을 땀 흘리며 오른다. 취가 한 움큼 모이면 손가방에 넣고, 손가방이 가득하면 배낭에 옮긴다. 그럴 때쯤이면 나는 행복에 겨워 흥얼거릴 수밖에 없다. 배낭에서, 손가방에서, 덤불 속에서 취향이 퍼져 내 몸에 배어들면 저절로 “햐~”하는 감탄사와 밑도 끝도 없는 노랫마디가 흘러나온다. “당신 생각에 부풀은 이 가슴 살짝이 살짝이 살짝이 옵서예 꿈에도 못 잊을 ……” 취는 그렇게 농염하게 날 유혹하며 들뜨게 했다.     


  취는 우리나라에 60여 종류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 24종을 식용으로 쓸 수 있지만, 참취가 대종을 이루고 곰취와 더덕취 등이 흔히 볼 수 있는 종류다. 어느 정도 그늘지는 반음지를 좋아하는 식물로 당분, 단백질, 칼슘, 인, 니아신, 비타민A·B1·B2 등 ‘무기질의 보물창고’라고 알려져 있다. 봄날에 나른하고 졸음이 오는 춘곤증 예방에 좋다. 특히 진해, 거담 작용이 탁월하여 만성 기관지염이나 인후염에 좋은 약효를 보인다고 한다. 강단에 서는 교사나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인들이 목이 아프고 목소리가 갈리는 데에는 특효라고 알려져 있다. 나는 체력이 강건한 편이지만 기관지와 인후 계통이 부실하여 봄이면 호흡기를 조심해야 하는데 취야 말로 내게 안성맞춤의 약이며 보물인 셈이다.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다 주면서 잔소리를 하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취는 사랑받아 마땅한 현모양처가 틀림없다.      


  이렇게 온갖 발림소리를 다하여 취를 칭송하고 있지만, 취가 생각한다면 나야말로 철천지원수이고 제발 만나지 말아야 할 아귀악신(餓鬼惡神) 일 터이다. 취는 엄동설한을 참아 견뎌서 봄이 되면 잎을 내고 줄기를 올리느라 힘을 다하고 있다. 그리하여 꽃 피우고 열매를 맺어 씨앗을 퍼뜨려 세상에 돋아난 책임을 다할 단꿈을 꾸고 있는데, 자라날 기회조차 갖지 못하도록 발목부터 우두둑 분질러 가서 삶고 무쳐서 먹어버리는 원수 같은 인간이 바로 나 아닌가?      

   “한 식물의 일생을 야멸차게 무질러 버리고서 뭐? 보드랍다, 향기로운 여인이다, 현모양처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농염한 여인처럼 유혹한다? 이거 식물나라 재판정에 가면 바로 사형감이여! 알았어? 글고, 영감! 제발 딱 먹을 만큼만 끊어가. 보이는 대로 가져가서 남들한테 인심까지 쓰다간 죽어서 식물나라에 끌려가 몸에 좋다는 편백 몽둥이로 몇백 년간 매만 맞을 거여!”      


  산에서 내려오며 문득 취가 생각을 한다면 바로 이런 말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봄에 두릅이니 취나물이니 뜯어오는 것들은 모두 새롭게 자라는 생명을 잘라먹는 일이기도 하다. 자연계 최상위 동물인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연을 활용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지나치지 않게 꼭 필요한 만큼만 가져오는 것도 바른생활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취나물을 만나 식탁이 향기로워졌다. 오늘은 된장을 삼삼하게 풀어 취나물 된장국도 끓이고 산에서 덤으로 얻은 쇤 두릅 순의 가운데 우듬지를 삶아 껍질을 벗겨 초간장에 묻혀 나물과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이런 고마운 자연을 내 안에 모셔 들임으로 바싹 다가온 여름을 건강하고 활기차게 보낼 수 있기 바란다. 다음 달엔 장아찌를 담글 취를 구하러 또 한 번 산에 가야 한다. 그래서 그 장아찌가 익을 때까지 나는 또 오랜 기다림으로 취의 향기를 그리워할 것이다.      

(2015.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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