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과 헤어지는 연습을 했던 ‘이별 연습’이었다.
“어? 누구지?” 누님이 물었다. 내가 마스크를 벗었다.
“전주 작은 외삼촌, 잊어버렸어?” 조카의 말에 “으응? 그랴! 근디 너는 안 늙었다. 그대로네” 그제야 반가운 눈짓이 보였다.
마스크 위로 누님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웃음끼가 드러난다. 요양병원에서 만난 93세 누님이 마침내 날 알아보았다. 두꺼운 투명 비닐 커튼이 드리워진 면회실 안에 누님은 간병인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앉아있다.
서글서글하던 눈매가 다 찌부러져 납작하게 눌린 삼각형이 되었다. 함께 간 조카가 마스크를 벗어보라고 권하자 마스크를 벗어 보인다. 입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많이 쪼그라졌지만, 곱던 흔적이 아직 남아 마음이 아려왔다.
어디에서도 할 말을 다 하는 야무지고 분명한 주관을 가진 누님이다. 그 시절에 잘 나가던 전주여고를 졸업했고 소설을 좋아하고 글을 잘 쓰는 문학도이기도 했다. 14살 차이가 나는 누님은 네게 늘 선생님이었고 막둥이 동생이라고 자잘한 마음까지 써주는 보호자이기도 했다. 힘든 가정을 꾸려나가면서도 가끔 나를 불러 어려운 일이 있는지 살피고 해결해주기도 했다.
누님이 70대 중반을 넘어 아버지 제삿날 서울 큰 형님 댁에 모였을 때, 누님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가운데 내가 모르는 일들을 모두 풀어내 들려주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 이야기들을 소재로 글을 써보라는 권유도 했다.
밤을 새우며 긴 이야기를 듣고, 다음 해 제삿날 다시 만나 못 들은 이야기와 내가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했다. 장편소설의 소재로 손색이 없는 누님의 인생역정을 내게 풀어낸 심사를 그때는 잘 몰랐다. 그리고 내가 70대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그 의미를 이해했다. 살림을 꾸리고 자식들을 기르느라 당신이 꿈꾸던 삶을 포기하고 말았던 누님이다. 그 의미와 시대의 흐름 속에 겪었던 갈등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그 마음을 이 나이가 돼서야 거니챌 수 있었다.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3대 독자와 결혼해 살면서 아들을 낳기 위해 딸을 다섯이나 낳아야 했던 모진 삶이었다. 지방공무원의 아내로 여섯 명 아이들을 다 대학에 보내고 의사, 박사들을 배출하여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려놓았다. 그리고 나이 들어 자신의 처절한 삶을 되돌아보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삶의 여정에서 얻은 상념들이 아까워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고 싶었을 듯하다.
욕실에서 넘어져 대퇴부 골절상을 입어 병원을 전전하다가 요양병원에서 남은 시간을 메우고 있는 누님이다. 누님이 요양병원에 들어가고 얼마 후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덮쳤다. 나름 내 일상이 바빠서 누님을 볼 계획을 미루던 차에 덜컥 코로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병원에서는 약한 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면회를 차단해서 직계가족도 면회할 수 없었다.
조카에게 여러 차례 기회를 만들어보라고 연락을 했지만, 병원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가 한 사람에게만 감염해도 전체가 어려움을 겪는다며 전혀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사례가 어찌 우리 가족뿐이랴! 숱한 사람들이 요양병원에서, 응급실에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났을 것이다.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서로 얼굴도 마주하지 못한 채 그리운 가슴만 끓이다가 떠났을 참혹한 시대였다. 떠나는 사람의 가슴에서 말이 되지 못하고 설움 덩어리로, 복작대다가 흩어진 사연과 상념들이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사는 동안 곁을 지키며 돕고 사랑해준 아내와 남편에게 고마웠다는, 정말 사랑한다는 한마디를 하지 못한 채 숨을 잃은 코로나19 사망자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5월 징검다리 연휴에 어렵게 열차표를 구해 누님이 있는 요양병원에 갔다. 여동생과 셋째 형수와 신갈 전철역에서 만나 서로 주름 가득한 얼굴을 확인하고 조카와 함께 요양병원에서 면회를 신청했다. 온갖 방역 절차를 마치고 면회를 시작하면서 허락된 시간은 단 10분이다. 투명 비닐이 앞을 가로막은 면회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휠체어에 앉은 누님이 간병인의 도움으로 우리 앞에 이르렀을 때 저절로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 어눌한 누님의 반응에 네 사람이 말도 몇 마디 하지 못하고 10분이 흐르자 병원에서 5분을 더 배려해 비닐을 사이에 두고 손바닥을 맞대며 다시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짧은 15분을 위해 하루를 소비한 그날의 여행은 언제 떠날지 모르는 누님과 헤어지는 연습을 했던 ‘이별 연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