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듣던 종이우산에 내리는 그 빗소리가 불현듯 들려왔다.
벚꽃 빗길에서 찾은 소리
벚꽃이 활짝 핀 공원에 봄비가 내린다.
겨울잠에서 깨어나 저마다 세상 밖으로 나서는 데 봄비처럼 반가운 게 더 있으랴. 은혜처럼 내리는 비 이건만, 이제 막 꽃잎을 연 벚꽃으로서는 봄비가 아픔이다. 맑은 날씨이어야 꽃향기를 퍼뜨려 벌들을 불러올 수 있는데 빗물에 향기를 잃고 꽃잎도 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람받이에 선 나무는 벌써 꽃잎이 절반이나 떨어져 바닥에 하얗게 널렸다.
열매를 내지 못하고 스러지는 꽃잎이 아픔에 젖어 나뒹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비는 그저 무심하다. 맺지 못하고 스러지는 꽃, 피지 못하고 스러진 꽃은 또 얼마나 많던가? 자라기도 전에 되돌아간 어린것들, 왜 스러져야 하는지도 모르고 오던 길을 돌아간 생명을 생각한다. 무심한 비처럼 그저 자연의 궤(軌)를 따라 흘러가는 상도(常道)려니 하기엔 너무 무겁고 아프다.
벚꽃이 지고 새잎이 돋으면 어느새 봄은 저만치 가고 봄을 여읜 푸른 슬픔이 산천에 뿌려져 세상은 푸른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오는가 싶으면 가고 없는 순환과 윤회의 길에 들어서서 꽤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바로 엊그제였다. 인생 80년이 곡두(幻影)처럼 부질없고 찰나였음을 한탄하던 이들의 마음을 이제 조금 거니채는 나이에 들어선 것일까?
올봄에는 지난해에 놓친 작은 풀꽃 사진을 제대로 만들어 보겠다고 별러왔다. 그런데 내가 쉬는 금요일과 토요일이면 비가 내려 작업에 진척이 없다. 토요일인 오늘도 비가 내린다. 아쉬운 마음에 혹시나 하고 카메라를 챙겨 인근 공원을 찾았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제법 요란스럽다. 풀꽃들은 내리는 비에 잎을 꼭 닫고 웅크렸다. 비와 어울린 작은 풀꽃을 담아보려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다. 작은 꽃들은 비가 내리면 꽃잎을 닫고 줄기와 잎을 더 키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초보 풀꽃 사랑꾼의 헛짚기다.
나온 김에 산책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으로 무심히 산책로를 걸었다. 그러다가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들려왔다. 걷는 걸음과 내리는 비의 양에 따라 어떤 리듬이 들려왔다. 규칙적인 듯, 규칙적이지 않은 소리, 우산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오래된 그리움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퍽 좋아했던 소리였다. 바로 그 빗방울 소리, 어릴 적 듣던 종이우산에 내리는 그 빗소리가 불현듯 들려왔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 어릴 적에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텃밭에 앉아 상추 잎에 빗방울이 떨어져 또르르 구르는 걸 보았다. 종이우산과 빗방울이 만나 내는 소리를 듣던 그 오래된 기억의 입자들이 솟아올랐다. 굵은 대나무 살에 두꺼운 유지를 붙여 만든 우산에 떨어지던 빗소리는 유난히 크고 맑았다. 크고 넓어서 우산이라기보다 볕가리개처럼 쓰던 것으로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늘게 내리는 빗소리도 ‘솨아 사라락’ 분명하게 들을 수 있던 큰 종이우산은 내리는 비와 내가 친숙해지는 중매쟁이였고 내가 자연에 들어가는 길의 안내자였다. 비 오는 날 커다란 우산을 든 어린아이는 하염없이 텃밭 가에 쪼그려 앉아 비가 쑥갓과 상추, 파 잎새를 타고 흐르는 걸 보았다. 가녀린 빗방울이 모여 점점 커져 수정알처럼 보이다가 마침내 쪼르르 흘러내리는 자연의 조화는 신비였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강한 볕을 피해 그 우산 아래에 쪼그려 앉아 꼬물거리는 지렁이도 보고 땅강아지, 개미, 벌, 나비를 보았고 노린재를 건드리면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흙 속에 그토록 많은 생명이 산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어쩌면 지금 내가 작은 풀꽃을 좋아하여 사진과 영상으로 담는 짓도 그때 이미 준비되었던 일이지 싶다.
유난히 호기심이 많고 끝없는 질문으로 형이나 어른들을 곤란하게 했던 아이였지만, 그 큰 우산을 들고 텃밭 가에 앉으면 저 혼자 몇 시간이고 놀았다. 거기에는 내가 모르던 일의 해답이 있었고 볼 때마다 달라지는 일들을 배우느라 다른 마음을 쓸 겨를이 없었다. 어른들이나 형들은 내가 다가서면 또 무얼 물으며 귀찮게 할까 싶어 얼른 우산을 펴서 텃밭 옆에 작은 의자를 놓고 앉혔다.
아직 남아있는 빗소리의 기억처럼, 그립고 절실한 상념과 추억 토막들이 불쑥불쑥 머리를 내미는 이 후미진 시간이 점점 더 절실하고 아깝다. 그동안 아련하기만 하던 어머니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떠오르는가 하면 아득하게 잊혔던 어린 시절의 단편적 기억들이 돋아나는 즈음이다. 즐겨 쓰던 단어조차 쉽게 떠오르지 않는 요즘인데, 까마 아득히 오래된 기억이 뇌리에 솟는 까닭이 두렵다.
돌아갈 때가 되면 잊혔던 기억의 방들이 열려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는 섬뜩한 말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가끔 까막거리긴 해도 제법 자신 있어하던 생각과 행동들이 착각이려니 싶어 씁쓸하다. 하지만 나름으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고 80 고개도 넘지 않아 ‘멀쩡한 황춘(黃春)’ 아닌가?
아직 풀꽃 사랑은 겨우 눈을 뜨는 단계여서 결실을 보려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동안 적어놓은 애잔하고 쓸쓸한 글도 묶어 세상에 내놓아야 하고 새로 맛 들인 시(詩)도 조금 더 알아보아야 한다. 그뿐인가? 몸 바쳐 가정과 나라를 이루어낸 우리 가엾은 세대 친구들이 변한 세상과 화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해야 한다.
오늘, 우산 속 빗소리에 오래된 소리와 사랑을 기억할 수 있어서 반가웠고 고마웠다. 이제 이 비가 그치면 작은 꽃들이 문을 열어젖혀 예쁜 모습을 뽐낼 것이고 아직 얼굴을 내밀지 않은 그리운 녀석들도 “예쁘게 찍어주세요.”라며 방싯거릴 터이다. 그러면 나는 빗소리에서 연유한 그리움과 두려움 따위는 내던져 버리고 땅에 바짝 엎드려 작고 여린 꽃술에 앵글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