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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고운 May 14. 2022

4월의 노래

나는 오늘 돌아온 4월을 위하여 오늘 한 줄의 글을 쓰고 싶다.


4월의 노래     


  요즘 봄 기분에 마음이 들썩거리는 나의 속내를 용케도 알아챈 듯, 내가 일하는 사무실 뒤뜰에도 봄꽃들이 한창이다. 산수유가 맨 먼저 꽃소식을 전하더니, 곧이어 수선화가 여기저기 무리 지어 피었다. 먼저 핀 수선화가 시들고 다른 무리가 꽃을 피울 즈음 사무실 가까이에 서 있는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귀부인처럼 고아한 자태로 고운 피부를 한껏 자랑하는 목련 아래에 서서 나는 몇 번이나 학창 시절에 배웠던 박목월 시인의 ‘4월의 노래’를 읊조렸다.      

  “목련꽃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돌아온 4월. 해마다 다시 돌아오는 봄이지만, 올 4월은 내게 유다르다. 지난 3월부터 내가 수필이라는 장르를 만나, 내 생각과 경험을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칠순을 넘어선 고목에 새싹이 돋아나는 봄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스라이 먼 옛날, 청소년 시절에 가졌던 풋풋한 상상과 사랑의 느낌들이 새싹이 돋아나듯 움터 올라오고 있다. 마치 기적(奇蹟)을 보는 듯, 꿈을 꾸는 듯, 이 느낌을 차마 글로 적어낼 수 없는 내 글솜씨가 한스러울 뿐이다.

  목월(木月) 시인이 노래에서 말하듯 ‘생명의 등불’이 내 가슴에 밝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소중하다. 이제야 자연의 변화 속에 깃든 사랑과 경외를 조금씩 알아 거니채고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이가 된 것이다. 아! 조금만 더 일찍 이 길의 문을 열었더라면, 정말 글다운 글을 써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가슴 가득 후회처럼 밀려온다. 하지만, 돌아온 4월이 나의 봄과 손을 잡았으니 이보다 더 바랄 게 없다.     


  엊그제 화사한 꽃 잔치를 시샘한 꽃샘추위가 서리를 맺게 하더니, 귀부인 목련꽃이 처참하게 시들어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 고귀한 아름다움이 하룻밤 사이에 사그라지고 불에 덴 흉터처럼 갈색 얼룩을 안고 시들었다. 우리가 늙는 일도 어쩌면 목련이 냉해를 입듯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게 아닐지……. 목련꽃이 그렇게 제 모습을 잃고 얼룩진 꽃잎을 떨어뜨릴 즈음, 화단에는 또 한 무더기 귀한 꽃이 피어올랐다. 빨간 주머니에 하얀 밥알을 달고 예쁘게 줄지어 피어나는 금낭화가 날이 갈수록 도톰해지면서 유혹한다. 노란 황금의 꽃가루를 안으로만 갈무리하며, 등줄기에 차분하게 매달린 꽃이 어릴 적 초파일 연등처럼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 시절의 연등은 대나무로 등 모양을 만들고 한지를 곱게 물들여 씌운 다음, 그 가운데 대나무 교차점에 촛불을 켜 매달았다. 그 아래에 소원을 적어 매단 연등이 봄바람에 흔들리면 철없는 개구쟁이 아이들도 경건해져 두 손을 모아 소망을 빌었다.  남고사(南固寺)의 초파일 밤 풍경이 금낭화 속에서 아련하다.

  자연에서 야생 금낭화는 5월에 피는 꽃이라고 알려졌는데, 때 이르게 피어 봄바람에 들먹거리는 내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금낭화의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어요.’라고 한다. 이 봄, 금낭화가 밝히는 꽃등을 따라 한없이 먼 길을 걸어도 좋으련만…….     


  산 벚꽃이 듬성듬성 산색을 꾸미는 계절이 4월이다. 나는 이때가 되면 아름다운 여인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설렌다. 연두색이랄 수도, 노랑이나 초록이랄 수도 없는 파스텔 톤이 층층 색색으로 산을 물들이는 환상적인 정경에 해마다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어느 화가가 그 아름다운 색과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가장 뛰어난 화가는 바로 자연이고, 봄이라는 계절이며, 그중에서도 4월이다. 계절이 밝혀준 생명의 등불에 자연은 아름다운 채색으로 보답하는 고귀한 예술가이다. 그래서 목월 시인은 “빛나는 꿈의 계절”이라 했고,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이라고 노래하지 않았을까? 

  나무에 새잎을 내느라 가지마다 잎눈이 봉긋봉긋하다. 머지않아 산색은 황홀하게 채색될 터이고, 벚꽃 · 산 복숭아꽃 · 철쭉 · 조팝나무랑 여러 꽃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리라. 하늘엔 꾀꼬리의 노래가 나른한 봄날의 정취를 더하고, 장끼들이 까투리를 유혹하는 노래가 높아지면 4월은 절정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봄의 정취에 끌려 사무실을 벗어나 가까운 벚꽃 나무 길로 들어섰다. 흩날리는 꽃잎 비에 금세 마음을 뺏겨 취한 듯 몽롱해져 걸었다. 마지막 향기를 남기고 떨어지는 꽃잎들은 고귀한 결실을 위한 희생이라는 책임을 다한 보람으로 초라한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흔히 사람의 일생을 수유(須臾)에 불과하다고 한다. 수유라는 시간은 불교에서 눈 깜박하는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을 말한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꽃으로 피어, 벌들을 불러들여 결실하게 하고 떨어지는 꽃잎처럼, 우리도 다음 세대를 세상에 내놓았으니 머지않아 떠나야 한다. 

  그 수유의 시간 가운데 대부분을 이미 보내고 남은 시간이 얼마일까? 그 시간은 탄지(彈指), 찰나(刹那)에도 미치지 못할 짧은 시간일 것이다. 그 시간이 공허(空虛), 청정(淸淨)이라 해도, 나는 오늘 돌아온 4월을 위하여 한 줄의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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