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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고운 Sep 08. 2022

천사와 낙엽


   겨울에 들어선다는 입동 날 오후에 따스한 햇볕을 따라 동네 공원 산책길로 나갔다. 감기가 나았지만, 아직은 평소 건강으로 회복되지 않아 바깥 기온이 차갑게 느껴졌다. 조금은 무리인 듯싶었으나, 찾아온 가을과 사랑 땜도 하지 못한 터에, 입동이 들이닥치니 조바심이 일어 가을을 보러 나간 것이다. 집에서 한바탕 거리에 있는 ‘도화공원’에 들어섰다. 공원 입구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어울려 뛰고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듯 높고 맑았다. 

  아름다운 작은 꽃이 가득 핀 언덕에 어린 사슴들이 뛰노는 듯, 예쁜 모습에 끌려 나도 모르게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겉옷을 벗어던져놓고 놀이기구에 매달리고 미끄러지며 놀고 있었다. 말갛고 붉게 달아오른 아이들의 볼, 목청껏 떠들며 웃고 몸을 흔들고 뛰는 아이들, 티 없는 즐거움과 순수함과 밝음이 아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아이들은 작은 공원의 놀이터를 천국으로 만들고 있었다. 미끄럼틀과 정글짐에는 어린 천사들이, 철봉과 큰 그네에는 좀 더 큰 천사들이 놀고 있었다. 아무 걱정이 없고 온통 즐거움만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했다. 아이들의 머릿속에 걱정이나 근심은 볼 수 없었다. 아마도 아이들은 어른들이 부르지 않으면 지칠 때까지 천국에 머물 것이다. 그 예쁜 모습에 아스라이 먼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살아나 빛살처럼 내 가슴을 헤집고 꽂혀 들었다.      


  아이들은 우리 세대가 살던 처절한 세상과 다른 행복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놀이터가 따로 있지 않았다. 어디든 공터가 있으면 거기가 놀이터였고 갖고 놀 공도 귀했다. 돼지 오줌보를 말려 바람을 불어넣고 주둥이를 묶어 만든 공을 찼다. 전쟁 때 미군을 따라 들어온 전투식량 깡통이 놀이기구로 활용되었다. 깡통에 잔돌을 넣어 입구를 납작하게 누른 다음 반으로 접어 발로 차면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시끄러운 깡통을 차면서 아이들은 해거름까지 놀았다. 아이들은 영양부족으로 얼굴에 버짐이 피고 누렇게 떠 있었지만, 뛰어놀 때는 발갛게 홍조를 띠었다. 집에 들어가면 먹을 밥이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노는 동안은 배고픔도 잊을 수 있었고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은 천국을 만들 수 있었다. 밥 대신 먹는 찐 고구마를 한 개 더 먹겠다고 형제들과 다투기도 했고 ‘깡통 차기’ 때문에 신발이 쉽게 망가져 혼나기도 했지만, 그 시절 천국에 사는 천사들은 배는 고팠지만, 정에 묻혀 살았고 남을 걱정할 줄 알았다. 문득, 바람이 차갑게 불어와 아스라한 추억에 잠긴 나를 깨운다.      

   천사들을 뒤로하고 다시 공원의 산책길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멀어질 즈음, 산책로 옆 벤치에 앉은 낙엽을 쓸어내고 기대앉았다. 석양의 여린 빛이 복자기나무의 고운 잎끝에 보실 거리는 공원의 해거름 풍경은 고왔다. 해가 기울면서 바람이 조금 더 차가워진 듯했다. 지퍼를 올리고 마스크를 꺼내 썼다. 앞에 보이는 복자기나무의 노랗고 붉은 잎이 황홀하리만치 곱다. 내 머리와 무릎 위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벤치 뒤의 벚나무 잎이 남실바람에 날려 떨어진 것이다. 무릎에 떨어진 낙엽에 눈이 멎었다. 완전히 갈색으로 도르르 말려 말라비틀어진 낙엽이다. 한쪽은 벌레가 먹었는지 잎맥만 그물처럼 남은 갈잎이 내 무릎에 떨어져 바람에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 갈잎에 문득 병상의 아내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감기로 며칠 동안 아내의 병상을 찾아가지 못해 조바심하던 터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내는 ‘소뇌위축’이라는 희소병으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소뇌의 세포가 죽어 운동 중추가 마비되고 병이 깊어지면서 팔다리가 점점 뒤틀리고 있다. 음식물은 위루관(Gastronomy-Tube)을 통해서 섭취하고 호흡도 기관절개관(T-tube)을 사용하고 있다. 귀로 알아듣기는 하지만 말을 하거나 어떤 동작도 할 수 없고 눈만 깜박일 수 있다. 그렇지만 대뇌는 거의 정상이어서 생각하고 기억할 수 있으므로 눈을 깜박여 의사소통은 할 수 있다. 눈으로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지만, 나는 그 눈에서 웃음도 그리움도 사랑도 볼 수 있다. 

  말라비틀어진 낙엽은 손목이 꺾이고 팔다리가 비틀어진 그녀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발병한 지 15년, 여러 병원을 전전했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병명만 있고 발병 이유도, 치료 방법이나 약을 전혀 모르는 난치병이다.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 병은, 그녀에게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을 주고, 나에게는 그 힘든 삶을 오래도록 지켜보게 하는 고통을 주어 두 사람을 얽매고 있다. 신경이 마비되어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몸이 비틀려가며, 크고 작은 합병증이 반복되는 천형(天刑) 같은 병을 지켜보아야 하는 내 삶은 그녀의 병이 시작된 2000년에 정지되어 있다.      


  46년 전 임실군 운암면 옥정호 나룻배 뱃마당에서 그녀의 하얀 발이 내가 타고 있던 배에 올라왔다. 그 발등에 보조개처럼 옴 쏙 들어간 자국, 그녀의 웃음과 함께 드러난 귀여운 덧니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가 그녀와 나눈 첫마디가 

 “발등에 보조개가 있는 사람을 처음 본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에 다친 흉터인데 창피해서 감추고 다니다가 오늘 신발을 바꿔 신으며 깜박했더니 보조개라는 말을 다 들었다.”라며 하얀 덧니를 보이며 웃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딸 둘, 아들 한 명을 키워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책임을 끝냈다. 흙에서 자라나서 꽃 피우고 열매 맺어 씨를 떨어뜨림으로 제 할 일을 다 하고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녀는 어려운 시기에 맨손으로 시작한 살림살이를 잘 꾸려나가 책임을 다하고, 보람을 느낄 시기에 불치병에 걸려 병마와 씨름하고 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씨름이지만, 최선을 다하며 버티는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일은 그녀가 외롭지 않도록 자주 찾아가 말을 걸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합병증을 이기는 주사나 약 보다, 병을 이길 수 있는 투병 의지와 편안함이다. 내가 어쩌다가 다른 일로 2~3일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경우, 그녀는 열이 오르고 다른 합병증이 진행되어 힘들어한다. 

  나는 매일 그녀가 기다리는 요양병원까지 7km 거리를 자전거로 가거나 버스를 탄다. 비가 오는 날이나, 결빙된 겨울에는 버스를 타지만 대부분 자전거를 이용한다. 왕복 14km 거리를 전력을 다해 달리면 하루 운동량이 충분한 듯하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다른 친구들보다 건강한 편이어서 병원과 제법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이번 감기도 약간 피로감과 미열이 있었을 뿐,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넘겼다. 내가 건강하다고 객쩍은 장담을 하지만 나 역시 흩날리는 낙엽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안다. 뒤틀리지 않고 벌레 먹지 않은 낙엽이지만, 바람에 날려 짓밟히기라도 하면 언제라도 부서지고 썩어 흙으로 돌아갈 신세다. 세상에 나올 때는 순서가 있었지만, 흙으로 돌아가는 일엔 순서가 없다. 언젠가 다가올 그날까지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겠다고 발싸심한다.     


  요즘 나라 꼴이 너무 한심해 답답했었다. 그러나 늦어도, 오늘 산책길에서 본 천사들이 세상의 주인이 될 때쯤에는 이 나라가 한심한 집단의 손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생각했다. 그 예쁜 볼과 맑은 눈에 희망을 걸어도 될 것이라는 위안이다. 오래지 않아 눈 내리고 얼음이 뒤덮이는 겨울이 올 것이다. 자전거를 탈 수 없는 계절이 되기 전에, 나도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그녀를 찾아 페달을 밟아야겠다. 뒤틀린 낙엽이지만, 바스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간수하여 오래도록 돌보련다. 내게 날마다 해야 할 일을 만들어준 그녀에 고마워하면서……. (갑오년 입동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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