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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고운 Sep 11. 2022

복자기나무 아래서

어리석음을 되풀이했던 올해 달력도 달랑 한 장뿐이다.

복자기나무 아래서     

  새퉁맞게 새벽의 차가운 기운이 그리워 어스름을 딛고 동네 공원을 찾았다. 갑작스레 닥친 겨울을 직접 만나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서리가 하얗게 얼어 버석거리는 느낌을 생각하고 나섰는데 말라비틀어진 낙엽과 풀잎 끝에 조금 하얀 기운이 머물러 있을 뿐 겨울은 제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 가지를 떠나지 못하고 말라버린 대왕참나무의 잎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한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내 귀에선 오래전에 들었던 소리의 레이어조차 사라져 적막강산이다. 들을 수 없는 소리와 기억 속의 소리가 겹쳐 아득하게나마 미세한 데시벨이라도 들려올 듯하지만, 세월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한 시도 그친 적이 없는 이명耳鳴으로 거대한 인쇄 윤전기 돌아가는 굉음이 조금 기세를 늦추어 들릴 뿐이다.     


  새벽 산책에서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겠다고 나선 건 아니다. 작년 초겨울에 보았던 복자기나무 잎새가 얼마나 곱게 물들었는지, 아니면 벌써 색이 바래 시들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복자기나무의 잎은 초가을부터 물들기 시작해서 초겨울까지 점점 색이 깊어져 절정을 이루다가 어느 날 보면 갑자기 색을 내던지고 갈잎으로 변해 퇴색해버리고 만다. 그 퇴색하기 전 불타듯 고운 색이 남아있기를 기대하여 첫새벽에 나선 것이다.

  복자기나무 잎은 물이 드는 과정도 녹색과 노랑과 빨강이 이리저리 바뀌면서 그러데이션을 이루며 변한다. 색이 변하는 그 시기엔 잎마다 어제 색과 노을 색이 다르다. 천변만변千變萬變이라고 할 만큼 여러 색을 보여준다. 해마다 가을이면 복자기나무 앞 벤치에 한참씩 머물며 잎에 색이 물들이고 바꾸는 자연의 오묘한 솜씨에 감탄했다. 한 장의 잎에 여러 차례 다른 색을 내보이는 자연의 마술에 걸려드는 맛은 황홀했다.

  단풍잎도 나름으로 멋진 그러데이션을 보여주지만, 잎이 작은 데다 서리라도 맞으면 금세 시들어 말라비틀어지며 떨어진다. 잎이 지면 날개 모양의 씨앗만 옹종거리는 게 안쓰러운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잘게 갈라진 단풍잎보다 한 자루에 세 갈래 넓은 잎이 달린 복자기를 좋아한다. 복자기는 단풍이라는 이름이 없을 뿐, 노랑에서 빨강과 주홍으로 늦가을에서 초겨울까지 멋진 변화를 연출하는 단풍 나뭇과 식물이다.

  설악산의 늦가을을 불태우는 찬란한 주홍색은 거의 복자기나무가 쏟아내는 색이라고 한다. 단풍이 서리에 금세 시들어 말라버린 뒤까지 산 곳곳에 굳건히 서서 정열을 내뿜는 나무가 바로 복자기다. 가장자리에 서릿발이 붙어 더욱 찬란한 색을 보이는 복자기는 내 멋진 가을 친구이다.     


  그런데 올해는 10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책을 몇 권을 편집하느라 복자기나무를 찾아가지 못했다. 일에 묻혀 사랑하는 가을 친구를 찾아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겨울로 들어선 뒤에야 늦게나마 정신이 들어서 혹시나 잎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쏟아지는 아침잠을 밀쳐내고 공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늦게 찾아갔다고 삐쳤는지, 아니면 날 기다리다 지쳤던지 복자기나무 잎은 이미 그 곱던 색을 다 날려버리고 퇴색하고 오그라들어 찬바람에 달랑거린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나무 위쪽에 굵은 씨앗들이 아직 붉은 날개를 지니고 매달려 있다는 점이다. 아마 씨앗들은 추운 겨울을 버텨내며 날아가기 좋을 때를 기다리는 듯하다. 제 몸이 가벼워지는 봄이 되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새로운 생명을 싹 틔울 그날을 기다릴 것이다.     

  세상사가 다 그렇듯이 모든 일에는 알맞은 시기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는데, 그만 일을 핑계로 복자기를 까마아득히 잊었다. 내 남은 생에서 아름다운 가을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는 날이 몇 번이 될지 모른다. 그저 살아있는 시간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발로 찾아가 그 현장을 볼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아직은 생생하고 벼린 감성으로 가슴에 느낄 수 있는 가을이 몇 번이나 될까? 더하여 그런 느낌을 몇 줄 글로나마 적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내 삶의 가을은 몇 번이나 내게서 소중한 것을 앗아간 미운 계절이다. 내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가을에 내 곁을 떠나갔다. 내 아버지, 어머니, 아내도 딸도 친구처럼 자란 작은 형도 모두 가을부터 초겨울 사이에 날 두고 갔다. 가을이 되면 곱게 물든 산하가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먼저 아픈 기억들이 날 그리움의 늪으로 끌어들여 헤어나기 버겁다.

  거기다 찬바람에 낙엽이 흩날리기 시작하면 서러움과 그리움이 증폭되어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을 감당하느라 몸부림한다. 그런 가운데 만난 복자기나무는 내게 위로였다. 복자기가 보여주는 색색의 변화는 내게 머물지 말고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픔에서 헤어나 일어서라고 가르치는 스승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가슴만 쥐어뜯으며 살 것이냐? 날 봐라. 이미 가을이 와서 겨울로 치닫고 있지만 온 힘을 다하여 마지막 치장을 보이지 않느냐? 남아있는 며칠을 위하여 혼신渾身하는 날 보고 배워라. 내일 당장 찬란한 색을 다 빼앗기고 시들망정 오늘 한껏 붉은색을 토하는 그 마음을 어찌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날 깨우쳐 주던 복자기나무다. 이번에는 내가 게을러서 그 뜨거운 붉음을 만나지 못했다.

  푸석하게 마른 복자기 잎은 겨울이 다 지나기 전에 떨어져 제 몸의 거름으로 썩어 사라질 터이고 씨앗들은 찬바람에 날려 봄이 되면 소생의 기회를 엿볼 것이다. 내게 진홍眞紅의 멋진 잎을 자랑하지 못한 아쉬움은 봄이 되면 새로운 잎으로 다가설 것이다. 그리하여 여름을 견뎌 가을이 되면 다시 찬란한 향연을 되풀이하여 날 위로할 터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사는 동안 해마다 그런 되풀이를 거듭해왔다. 그런데 나는 누구에게 복자기만큼 타는 듯 붉은 마음을 보여주었던가. 내 사랑은 복자기처럼 정녕 그렇게 타올랐던가? 그렇게 타오르지 못했기에, 불살라 없어지도록 간절하지 못했기에 흐릿한 마음으로 살아남아 있지 싶다. 버릇처럼 아쉬움만 한가득 뇌이기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했던 올해 달력도 달랑 한 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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