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P인 나도 졸업반이었던 2019년은 나름 J로 살았던 해였다. 매일 동아리방에 1등으로 등교해 하루에 알고리즘 다섯 문제씩 풀기라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꼬박꼬박 지켰고, 남는 시간에는 틈틈히 개인 프로젝트 개발을 했다. 당시 알파고 이후로 개발자가 인기를 얻으며 채용 문이 활짝 열렸던 시기와 운 좋게 만나 2019년 12월 29일 제일 입사하고 싶었던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내 입사 동기가 ‘코로나’일 줄은….
코로나 확산이 본격화되면서 재택근무로 전환되었다. 임시 조치일 줄 알았던 재택근무는 점점 길어져 1년 반이 지났다. 당시 나는 첫 사회생활을 하며 월급의 달콤함에 취해 많은 물건을 사고파느라 당근마켓의 헤비 유저가 되었다. 여느 때처럼 당근마켓을 보던 중 여자 축구 무료 강습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여고 시절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엔 항상 친구들과 회전초밥이 되어 운동장을 걷는 게 운동의 전부였고, 체육 시간의 대부분은 피구를 하며 보냈다. 축구의 ‘ㅊ’은 가까이 해 본 적이 없었지만 1년 반 동안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답답함이 극에 달해 강습 신청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무료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의 첫 풋살화 나이키 머큐리얼 슈퍼플라이8과 공을 차기 시작한 지 6 개월쯤 되었을 무렵 회비 사용의 불투명성으로 운영진에 대한 불신이 생겨 팀이 와해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그 무렵 <골 때리는 그녀들>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으며 사내에도 여자 풋살 동호회가 신설되었고 몇 달의 대기 끝에 합류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2022년 5월 19일 나는 팀카카오 25번 선수가 되었다.
팀에 합류했을 때 풋살은 처음이었기에 매주 화, 목 저녁 8시 30분에 회사 근처 아카데미에서 팀원들과 레슨을 들었다. 아카데미가 회사 근처이기도 했고, 8시 30분이라는 시간이 집에 들렸다가 오기에는 뭔가 애매하기도 한 시간이라 화, 목이면 그냥 좀 더 일을 하고 공을 차러 갔다. 더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니 자연스레 오래 봐야하거나 어려운 일은 화, 목에 주로 보게 되었다. 집중해서 일하다보면 애석하게도 버그는 꼭 7시쯤 발견된다. 8시 30분 수업이니 회사에서 8시에는 나와야 하는데 7시쯤에 버그를 발견하면 원인 분석, 해결 그리고 테스트코드 작성까지 완료하기에는 1시간은 부족한 시간이다. 사실 원인 분석만으로도 부족할 때가 많았다. 7시 30분쯤 되면 마음이 다급해지고, 7시 50분이 되면 오늘 못 간다고 톡을 남길까 고민하다가도 8시에는 일단 허겁지겁 노트북을 덮고 뛰쳐 나온다. 나오면서도 일을 다 못 하고 나온 찝찝함에 미련을 잔뜩 자리에 치덕치덕 묻히고 나온다. 가끔 나 자신에게 모질어지는 날에는 자책을 하기도 한다.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공놀이하러 가냐…’ 그렇지만 일단 나의 루틴이니 꾸역꾸역 나와서 뛰다보면 그 시간이 나에게는 ‘껐켬’의 모먼트가 된다. 컴퓨터가 버벅될 땐 일단 껐다 켜라는 게 민간요법같지만 사실 꽤나 객관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데드락에 걸려 얽혀있던 프로세스들이 껐다 켜면서 정리가 되어 다시 작동할 수 있게 된다. 아직 큰 숲을 보는 연습이 부족한 주니어 개발자라 한 가지 생각에 꽂혀 무작정 파고드느라 원인 분석이나 해결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꽤 있는데, 그럴 때마다 8시 30분 레슨은 데드락에 걸린 나의 생각들을 껐다 켜주었다. 2~3시간을 고민해도 나오지 않았던 해결방법이 공을 차고 돌아와 샤워를 하며 떠오른 새로운 아이디어로 30분만에 뚝딱 해결될 때도 있었다. 내가 매번 미련을 잔뜩 두면서도 공 차러 갈 시간이면 일단 노트북을 덮고 뛰어 나오는 이유이다.
흔히들 개발자를 떠올릴 때 체크셔츠나 후드를 입고 맥북을 들고 다니며 다소 내향적이고 헤드폰을 끼고 있는 사람을 떠올린다. (심지어 ChatGPT도 똑같이 그려준다.)
나는 개발자다운 geek한 사람은 아니지만 일단, 4가지 중 (셔츠는 꽤 있지만 체크는 아니니까) 3.8개에 해당 하기는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내향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내가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어려워하는 건 말과 말 사이의 공백과 그 공백의 어색함이 견디기 어려워서이다. 공백을 채울만한 말을 떠올리려고 노력은 하나 잘 되지 않고, 남의 눈치를 잘 보는 탓에 이 말이 적당할지 혼자 검열하느라 결국 대화할 기회가 지나가버린다. 그래서 나는 보통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는 데 최소 1년정도 걸린다. 좀 더 말꼬리를 늘려보자면 취직하자마자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해 새로운 사람들과 스몰톡을 하며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사회성을 기를 기회가 없었다(라고 핑계를 대본다.)
원하던 회사에 입사하였고 여느 회사와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내향적인 내가 어려웠던건 아침 스크럼이었다. 아침에 출근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다 같이 둥글게 모여 차례대로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어려운 점을 공유하는 시간이다. 우리 팀은 일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기 전 ‘기분점수’를 먼저 이야기한다. 일종의 아이스브레이킹이기도 하고, 팀원들의 컨디션을 파악할 수도 있다. 기분점수는 10점이 만점이며 사유와 함께 내 점수를 말하면 된다. 예를 들면, ‘어제 모기가 발바닥을 물어 간지러워서 잠을 설쳤어요. 그래서 7점할게요’와 같은 식이다. 그 어떤 사소한 이유나 상황도 상관없다. 나는 항상 기분점수 말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뭘 말 해야할지 잘 떠오르지 않기도 했고, 떠오르더라도 ‘이건 너무 TMI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내 차례가 돌아오기 까지 손을 꼼지락대며 얘기거리를 열심히 찾아낸다. 뭐라고 하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나 혼자 눈치보느라 힘들었다.
그런 나에게 풋살은 꽤나 좋은 소재였다. 너무 사적이지 않으면서도 사적인 느낌이랄까. 나의 사생활에 대한 내용은 아니지만, 일 외의 나의 취미생활을 공유하기 때문에 적절하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어제 경기를 했는데 제가 골을 넣어서 오늘 기분이 좋아요. 10점할게요’와 같은 식이다. 경기하다가 넘어져 다친 상처가 있으면 먼저 팀원들이 물어봐주기도 하고, 판교 회사들끼리 모여 진행하는 판교리그 경기 소식을 들려드리면 몇 등했냐고 궁금해하기도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서는 스몰톡을 먼저 건네는 여유도 조금은 생겼다. 어제 축구 경기가 있었다면 ‘어제 그 경기 봤어요?’ 정도이지만 나름 장족의 발전이다.
또 하나의 좋은 점은 자아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다. 풋살을 하기 전의 나에게는 ‘개발자’라는 한 가지 자아만 있었다. 퇴근을 하더라도 그냥 퇴근하는 개발자였지 또 다른 나로 분리하지 못했고, 그래서 업무 중 실수를 하면 며칠이나 자책을 했다. 안 그래도 누가 주지 않아도 혼자 보던 눈치를 몇 주먹이나 더 주워먹었다. 나 자신에게 모진 성격이 더 불을 지피기도 했다. 일화를 하나 얘기하자면 실수가 유독 잦아 자책하며 우울의 동굴을 한 없이 파고들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에게 채찍질 한다며 새벽 6시 기상을 정해놓고 늦게 일어나면 나태하다며 아침마다 속으로 나를 비난했다. 그 날도 새벽 알람을 듣자마자 끄고 축 처진 몸을 일으켜 일단 세수부터 하고 왔다. 유독 피곤했지만 오늘도 나태하다며 스스로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 일단 화장대에 앉아 출근하려고 선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간을 확인했는데 새벽 3시였다. 내내 스스로 채찍질하며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알람을 헛들었던 것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반쪽만 선크림을 바른 채로 다시 잠이 들었던 그 날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다행히도 지금은 ‘팀카카오 25번 플레이어’로의 자아가 하나 더 생겼다. 그라운드 위에서 나는 더 이상 ‘개발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때 했던 실수를 더 이상 질질 끌고 다니지 않는다. 신체적인 체력도 늘었지만 마음의 체력도 많이 늘었다.
그 외에도 몇몇의 사소한 변화가 있다. 유튜브 알고리즘도 이제는 드리블 영상을 추천해준다. 화려한 드리블로 돌파하는 (환상에 가까운) 로망을 갖고 있어 그런 영상을 찾아 봤더니 알고리즘은 점차 묘기 풋살을 위주로 추천을 해주는 것 같아 아쉽지만 큰 도움은 안 되는 것 같다. 두 번째로는 여름에도 맨 발로 다닐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체중을 싣어 달리다보니 엄지발톱이 신발 앞코에 부딪혀 발톱에 멍이 자주 들고 빠진다. 그런 내 발이 못 생겨 맨발로 다니지 못했고 이번 여름엔 쪼리를 한 번도 신발장에서 꺼내지 않았다. 페디큐어도 발톱없음 이슈로 받을 수 없었다.
요새는 취미생활에 본업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발이 작아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풋살화를 구하기 힘들고, 온라인에서도 수량이 적어서 금방 품절이 된다. 가끔 품절된 풋살화가 1~2개 물량이 풀릴 때가 있는데, 구매가 가능해지면 알림을 주는 앱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팀카카오 동호회비 입금을 알려주는 수금봇의 유지보수를 담당하고 있다. 특별한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어려운 기술을 요하는 것도 아니지만 본업과 취미가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는 게 나에게 쏠쏠하게 재미를 주고 있는 부분 중 하나이다.
처음 팀카카오 가입해 풋살에 입문하던 때가 첫 마일스톤이고, 본격적으로 레슨을 들으며 실력을 키워갔던 때가 두번째 마일스톤이라고 하면 풋살을 한 지 2년이 좀 넘는 지금은 세 번째 마일스톤쯤 와있는 것 같다. 세 번째 마일스톤까지 오면서 물론 처음과 같은 열정이나 호기심이 많이 수그러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마일스톤에서는 팀원들과 끈끈해진 관계를 얻었다. 이전까지는 함께 재미있게 뛰는 회사 동료에 그쳤다면, 요새는 함께 뛰는 ‘언니’, ‘친구’, ‘동생’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경기를 뛰며 느끼는 재미도 다르다. 이전에는 골을 넣거나 배웠던 드리블을 써먹어서 즐거웠다면, 이제는 이 사람들과 함께 뛰어서 즐거울 때가 더 많다. 낯을 가려 더 이상 친구는 못 만들겠구나 싶었는데 어느새 말을 놓고 지내는 사람들이 열 손가락을 넘었다. 앞으로 ‘팀카카오 25번 플레이어’ 프로젝트가 몇 마일스톤이나 더 이어질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음 마일스톤은 무조건 확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