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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Sep 05. 2024

[제14화] 잃어버린 시간의 잔상

악몽

  "헉!"

 서영은 막혔던 숨을 본능적으로 내뱉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그녀 생각일 뿐 실제로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밖은 아직 고요했지만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희미한 빛에 긴 새벽이 끝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악몽을 꾸는 날엔 유난히 새벽이 길게 느껴지곤 했다. 가로 세로 20제곱미터가 채 되지 않는 좁은 공간,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 무거운 몸을 일으켜 엉덩이를 주욱 끌어다 힘겹게 침대 가장자리에 앉혔다. 무거운 엉덩이가 지나간 대로 요와 이불이 함께 뒤엉켜 흐트러지며 투박한 길을 냈다.
  '아, 진짜... 팔목도 시원찮은데 또 이랬네.'
  서영은 다시 침대를 정리할 생각에 벌써부터 손목이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매년 봄이 다가올 즈음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악몽이었다. 물속에서 차가운 어둠이 그녀를 덮친다. 꿈이어서 그지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순간에도 크게 공포스럽진 않았다. 그 순간 한 남학생이 나타나 손을 뻗었다.
  "여기서 나가자."
  신기하게도 그녀의 꿈은 여기부터가 절망과 공포의 시작이다, 희망이 아니라.

 같은 꿈의 학습효과인지 익숙하고 노련한 그의 손에 이끌려 그녀는 쉽게 물 위로 둥 떠올랐다. 살았다는 안도감보다는 불안감이 깊게 엄습하는 지점이다.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언제나 그녀 혼자 뿐이었으므로.

 10년이란 시간이면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그 절망스러움과 죄책감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다시 곰곰이 되짚어보면 그녀가 수면으로 올라오는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차갑게 미끄러져 내려가는 그를 본 것도 같다.


 서영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어제 마쳤어야 할 이메일 작업을 할 것이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원고 잘 읽어보았습니다. 원고의 완성도를 좀 더 높이기 위해 몇 가지 소소한 수정 사항을 논의하고 싶습니다. 작가님과의 미팅 일정을 조율하고자 하니 다음 주 중에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창밖으로 봄을 알리는 소리가 저 멀리 들려왔지만 새벽 공기는 아직 겨울을 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서영은 출판사에서 일한다. 그녀의 출판사는 규모가 크진 않지만 지난해 출판한 어느 무명작가의 작품 '별이 되다'가 사회적 트렌드를 잘 반영하며 인기를 얻어 출판사의 인지도가 꽤 높아졌다. 7층에 위치한 사무실은 입구부터 예술적이면서도 독창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넓은 테이블에 다양한 색상과 모양의 의자들, 그리고 그 위에 무질서한 듯 나름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는 서적들. 무엇보다 벽에 걸려있는 최근 출판된 도서의 커버 아트와 그 옆에 저자의 반사실 주의 초상화가 눈길을 끈다. 사실적 표현을 목표로 하면서도 각 부분을 개별적으로 나타낸 점이 다양한 작가의 개성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아 서영은 마음에 들었다. 때로는 디테일이 너무 과장되어 비현실적인 기괴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또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출판사의 성격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서영이 출판사에서 일한 지도 벌써 5년 차.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고, 그 가능성을 알아보는 뛰어난 능력과 열정으로 회사에서 인정도 받고 있다. 요즘 서영은 전보다 더 바쁘다. 올 크리스마스에 있을 새로운 힐링 시리즈 출판 프로젝트 팀장으로서 시리즈의 다양한 소주제와 각 책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그에 맞는 작가 발굴과 교정까지 모두 그녀의 손을 거쳐야 한다. 매일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하는 게 다반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질투 섞인 동료들의 시선을 그녀도 모르는 바 아니다. 서영이 매년 이맘때가 되면 더 바쁘게 살기 위해 고된 하루를 계획하는 데에는 남들이 모르는 이유가 있다. 매년 봄이 되면 그녀의 마음속엔 다른 계절이 찾아온다. 생명력이 넘쳐나고 다채로운 풍경이 새롭게 펼쳐지지는 봄. 서영의 마음엔 쓸쓸하고 차가운 바람이 분다.

 그날의 기억...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선박은 활기가 넘쳤다. 서영은 단짝 친구와 둘이 객실에 있었다. 함께 과자를 먹으며 전날 보았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의 답답한 처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어제 남주는 도대체 왜 그렇게 우유부단했던 거야? 거기서 바로 말했으면 오해도 생기지 않았을 거 아냐."
 "내 말이. 내가 그 여자였다면 벌써 헤어졌다. 근데 얘기하다 보니까 어제 여주가 먹던 스파게티 먹고 싶다."

 희한하게도 항상 먹는 이야기로 빠지는 친구는 간절한 눈빛으로 서영을 쳐다보았다.

 "왜 또 그렇게 봐? 나 안돼, 이번 달 용돈 빠듯해. 그 집 스파게티 너무 비싸."

 "아이, 서영아, 가자, 가자, 집 돌아오 날, 응? 꼭 가 줄거지?"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배가 갑자기 비정상적으로 방향을 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과자가 쏟아졌고 그들도 한쪽 방향으로 쓰러졌다. 그들은 다시 몸을 가누었지만 배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자리를 지키라는 방송 지시에 따라 대부분의 승객들이 선내에서 기다렸지만 일부는 방송을 무시하고 갑판 쪽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는 점점 더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서영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친구를 설득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기울기가 더 심해지면 아예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몇 번을 시도해도 객실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친구는 주저앉아 울었고, 서영은 힘껏 문을 두드리며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과자가 쏟아졌을 때, 그때 밖으로 나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배 안, 여기저기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비명,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서영이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묵직하고 힘겹게 문이 열렸다. 문 밖에 한 남학생이 보였다. 짙은 갈색의 곱슬머리가 낯설지 않았다. 언젠가 한 반이었던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객실을 탈출하고 마주한 복도의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선박의 기울기가 급속도로 심해지며 문이 열린 객실에서는 물건들이 쏟아져 나다. 가방과 옷가지들이 나뒹굴고, 노트북이나 의자에 몸을 다치는 사람들도 생겼다. 복도는 기울어졌고, 사람들은 마치 그렇게 연출된 무대 위에서 춤을 추듯 보였다. 이 배 어딘가 이 모든 것을 연출한 지휘자가 숨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발밑으로 쏟아지는 물건들을 피하며 중심을 잡고 걷기에는 중력의 힘이 너무 컸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복도를 힘겹게 기다시피 걸어, 이제 저 계단만 오르면 밖이다. 하지만 이미 선박이 45도 이상 기울어져 계단은 마치 절벽처럼 보였고, 어둠과 공포가 엄습한 계단 앞은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이곳이 지옥일까.

서영과 친구는 그 남학생의 도움으로 어렵게 난간을 붙잡았다. 하지만 친구는 계단을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졌다. 그 뒤로 힘겹게 올라오던 사람들 몇몇이 같이 추락했다. 아래쪽은 이미 물이 상당히 많이 차올라 있었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섞인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서영은 친구를 구할 수 없었다.

 <았어. 가자, 가. 너 거기 스파게티 제일 좋아하잖아.>

 친구의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물음에 이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선박이 급격히 기울면서 빠른 속도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탈출 경로도 대부분 차단되었다. 기울기가 더 심해지기 전에 이 계단을 올라야 한다. 서영은 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그럴수록 땀이 고여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가까스로 계단을 올라 드디어 밖이 가까워졌지만 기울기가 급격히 변화하며 각도가 더 가팔라졌다. 밖으로 나가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때 뒤에서 남학생이 자신의 어깨로 있는 힘껏 서영을 밀어 올렸다. 덕분에 그녀는 밖으로 나가는 문에 손이 닿았고 그때 위에서 누군가 서영의 팔을 잡아 올렸다. 중력에 저항하기란 생각보다 힘이 더 들었다.


 그녀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동시에 그 남학생은 균형을 잃었고, 난간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은 결국 미끄러지고 말았다. 인간의 의지가 위대한 우주의 힘 앞에 처참히, 그리고 무력하게 꺾이는 순간이었다. 서영은 그를 외쳐 불러야 했지만 도저히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후로 얼마간 계단에 매달려있던 사람들이 더 구출되었다. 배가 급격히 기울면서 침몰 속도가 빨라졌다. 해경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더 이상의 구조는 위험합니다. 구조를 중단하고 빨리 배를 떠나세요!"
 "저기 사람들이 있어요... 눈앞에 보여요, 저 아래 사람들이 더 있단 말입니다..."
 해경도, 구조대원도 아닌 한 남자가 안타깝게 절규하며 목이 메는지 말끝을 흐렸다. 땀인지 눈물인지, 검게 그을린 듯한 그의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구조대원이 그를 억지로 끌어 구조 보트에 태웠다. 마지막 희망마저 희미해지는 순간 서영은 그의 이름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기도 했다.


 서영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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