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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Sep 08. 2024

[제15화] 가면

지쳐가는 중입니다

<난 파도가 머물던 모래 위에 적힌 글씨처럼 그대가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목요일, 하루 중 가장 바쁜 이 시간, 서영의 전화벨이 울렸다. 업무 통화를 많이 하는 서영이 일부러 찾아 저장한 감성적이고 느린 벨소리, 아이유의 '밤편지'. 서정적인 가사를 여유롭게 음미할 시간도 없이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딸, 오늘 눈 온다던데 봄이라고 옷 얇게 입지 말고, 우산도 꼭 챙기고. 요즘 눈은 맞으면 안 돼. 공기가 오염..."

"안다고 알아. 엄마, 내가 어린애야? 그 말하려고 전화했어? 출근 준비 하느라 바쁜데..."

"알았다."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엄마는 전화를 끊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단단히 삐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엄마의 이런 행동이 그녀는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엄마는 전화 통화로 딸의 바쁜 시간을 빼앗는 대신 곧 문자를 보내 용건을 마무리할 것이다.

<딸, 이번 주에는 집에 오니? 이모랑 다들 너 보고 싶다고 하네. 와서 고기 먹고 가.>

예상대로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엄마는 전화 통화 때 서영의 면박으로 끝맺지 못했던 그 뒤의 말도 잇고 싶었을 것이다. 공기가 오염되어 눈이 예전 같지 않으니 우산을 꼭 써야 한다고. 넌 예전부터 눈 맞는 것을 좋아했지만 요즘 눈은 맞으면 안 된다고.

 딸의 바쁜 시간을 당신이 나눠 쓸 수 없다는 듯 엄마는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아 삭제했다. 감정은 배제하고 용건만 간단히.


<딸> 이 한 마디에 서영은 가슴이 따뜻해지면서도,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이 들곤 한다. 세상의 모든 여자로 태어난 자식을 일컫는 말 <딸>. 이 단어는 서영의 엄마가 부르는 순간 그녀의 딸 서영이란 의미로 축소된다. 하지만 그 무게는 상당해지는 현실. 그 말속에 서영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일까. 그것은 언젠가부터 그녀를 짓누르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참사에서 생존한 이후로 죽. 가족과 친척에게 과도한 사랑을 받아 온 부담감에서 시작된 서영의 착각인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행운이자 행복이라 생각했던 그들의 마음이 변색된 것인지 ...




 눈 소식은 오후에 있지만 예보된 시간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경험 상 이런 날은 조금 더 일찍 출근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원치 않는 통화 때문에 -실은 그 통화로 인해 생각이 많아져서- 오히려 평소보다 더 늦게 출근하게 된 것이 마음 쓰였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엄마가 전화를 끊게 만들고,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참으며 단문으로 문자를 보내도록 만든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영은 지선 버스 5714번에 올라탔다. 배차 간격은 10~15분. 일분일초를 다투는 바쁜 출근길에는 상당히 긴 시간이다. 하필 오늘 1분여 차이로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10분 넘게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버스를 타고 얼마쯤 갔을까, 눈이 오나 싶더니 금세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괜한 신경질을 부린 것에 대한 얼마간의 미안함으로 우산을 가져오긴 했지만 급한 마음과 달리 폭설에 가까운 이 날씨 속을 서둘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서영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평소 일찍 출근했으니 오늘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출근하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녀는 홍대입구역에 내려 천천히 걸었다. 걸을수록 무거워지는 우산의 무게와 질척해져 이동이 고생스러워진 땅이 마치 서영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어쩌면 출근길 바쁜 발걸음들이 아니었다면 소복하게 쌓였을 이 눈이 오히려 포근한 행복으로 다가왔을까? 순백 위에 오점처럼 남았을, 거뭇하게 녹아든 그녀의 발자국이 새하얀 눈 속에서 오히려 더 말끔해 보였을지 모를 테니.



 

 얼마쯤 걷다 보니 저 앞에 황갈색의 서류 봉투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눈길에 서두르다 흘린 것이겠지.

'엄청 중요한 건 아니겠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 했으나 중요한 서류를 분실했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자꾸 그 봉투에 눈길이 갔다. 그렇게 가까이 가 보니 봉투 위쪽 회사 로고가 상당히 눈에 익다.

'이 마크, 우리 회사 건물에서 분명히 본 건데...'

이런 생각이 들자 서영은 고민 없이 젖은 봉투를 주워 들었다. 꽤나 묵직했다. 회사 1층 데스크에 가져다주면 분명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봉투를 든 손은 점점 더 차가워졌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는 봉투를 그냥 두고 지나치지 않은 것이 참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올 상반기, 서영은 12월에 있을 연말 이벤트 프로젝트와 5월에 있을 신예 작가 발굴전 준비로 더 바쁠 예정이다. 연말 이벤트는 출판사의 연간 마케팅 전략의 중요한 부분일 수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준비하며 신중을 기해야 한다. 연말에 맞춘 신간 출판도 그렇겠지만 특히 서영은 크리스마스 특별판 도서와 다이어리 컬래버레이션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그녀의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들은 주로 20~40대 고객들이 많이 읽고 있으며, 특히 20~30대 여성 독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어 특별 한정판 도서와 다이어리의 조합은 판매율 증가에 큰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크리스마스 특별 한정판 도서 컬래버레이션을 함께 할 작가가 하필 구 작가이다. 무려 18쇄를 달성한 후 전과 달리 은근히 권위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 서영이 결코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의 부류. 마감 기한도 잘 지키지 않고, 수정 사항도 잘 받아들이지 않아 서영이 애를 먹었다. 이번엔 다른 작가들보다 마감 기한을 훨씬 더 넉넉히 잡고 시작해야 할 것이었다.

 지난 기억이 떠오르자 그녀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한쪽 머리가 저린 듯 해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떴는데 시야 가장자리로 수없이 많은 작은 벌레들이 이리저리 기어 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신없이 양손을 휘저었지만 털어내질 리 만무했다. 서영은 눈을 감았다. 이제는 눈을 감고 있어도 벌레들이 보이는 것 같다. 손발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벌레들이 아마 손발로 내려왔다 보다.


 "임 팀장, 오늘 점심 뭐 먹을 거야? 어제 가려다 말았던 거기로 갈까?"

 영업부 곽 팀장이 서영의 어깨를 탁 치며 물었다. 잔잔한 물에 꽤 큰 돌멩이가 던져졌다. 순식간에 물결이 퍼져나가듯 벌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움직임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다. 서영의 마음도 혼란스러웠다. 작고 까만 점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숨이 쉴 만해졌다.


 "요즘 또 너무 일만 하는 거 아냐? 주말에도 나왔다면서... 쉬엄쉬엄해."

 점심시간, 곽 팀장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영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톡 가져다 대며 말했다.

 "속 썩이는 작가가 있어서 연말 프로젝트도 일찍 준비해야 하고, 신예 작가 발굴전 때문에 할 일이 많아. 신간 출판 교정볼 시간도 부족하고..."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면 너무 힘들지 않아?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도 하고 그래."

 서영의 말에 곽 팀장이 안쓰러운 듯 말했다.

 '나도 교정만 보면서 편하게 일하고 싶지. 기획, 마케팅 일까지 왜 편집부가 도맡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서영은 이런 불평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바쁘게 일할 수 있어 잊을 수 있는 것도 있었으므로. 겉으로는 가면을 쓰고 항상 밝은 모습으로 열정에 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마 실패한 모양이었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좀 나눠주고 그래. 너무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곽 팀장은 서영을 향한 직원들의 불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삼겹살 기름의 찌든 냄새가 훅 밀려 들어왔다. 여러 탈취제로도 잡을 수 없었던 기름 냄새에 양념 냄새까지 더해져 늑늑하고 비릿하게 물든 공기가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점심부터 무슨 고깃집이야? 별로 내키지 않는데. 시간도 없고..."

 죄 없는 곽 팀장에게 애먼 불똥이 튀었다.

 "임 팀장 몸보신 좀 하라고. 점심 메뉴로 간편하게 구워서 나오니까 시간도 오래 안 걸리고 편하게 먹을 수 있어. 임 팀장 매번 밀가루만 먹어서 스트레스받으니까 더 까칠해지는 거야."

 이 말에 막 식당을 나서던 한 남자가 서영을 쳐다보았다. 졸지에 서영은 예민하고 까칠해 주변 사람을 눈치 보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맘때쯤의 그녀에겐 틀린 말도 아니어서 서영은 더 속이 상했다. 그런데 과연 밀가루 섭취량과 스트레스 지수는 정말 비례하는 것인지 그녀는 궁금했다.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느낀 곽 팀장이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임 팀장 마음 알지,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단백질 섭취 좀 하라는 뜻에서..."

 "알아, 고마워."

 말과는 달리 세심한 곽 팀장의 걱정 어린 말이 달갑지 않았던 것은 문 앞에서 만난 그 남자의 무심하면서도 한편으로 측은함이 섞인 그 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럼 신간 서적 주제와 컨셉 선정하고 작가와 업해 원고 초안 작성하겠습니다."

"회사가 원하는 기획 의도와 방향 제대로 제시하고 패드백 전달 잘 부탁해요. 고집이 세고 본인 스타일을 고수하려 하는 사람이라 너무 사람 좋게 굴면 김 대리만 더 피곤해져요."

한없이 밝은 김 대리에게 서영이 일침을 놓았다. 김 대리의 입꼬리가 샐쭉 올라가는 게 거슬렸지만 서영은 못 본 척했다.

"작가 지원서와 원고 접수 마감했어요, 팀장님. 빠른 시일 내 검토해서 공모전 규정에 맞지 않는 것 제외하고 원고 올리겠습니다."

눈치도 있고 상황에 맞게 일처리도 빠릿빠릿한 최 주임이 말했다. 서영은 가볍게 눈인사로 대신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박 사원과 협업해서 공모전 주제에 맞게 신예 작가 홍보 자료도 가능한 것은 미리 수집해 주세요. 특히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한 홍보가 제일 중요한 건 알고 있죠?"

대답 대신 최 주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노트에 계속 적어내려 갔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회의가 끝났다. 평소 서영이었다면 웬만하면 혼자 처리했을 일들도 회의를 통해 업무를 분담했다. 이것이 꼭 오늘 점심 곽 팀장이 했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10년 가까운 긴 시간 동안의 트라우마로 인한 것인지, 이맘때면 심신을 혹사시키는 그녀의 습관으로 인한 것인지, 점점 더 심해지고 잦아지는 증상으로 인해 서영의 일상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경과? 심장내과? 정신과?

이제는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자주 찾아오는 다양한 증상만큼이나 갈피를 잡기 힘든 진료과 고민에 서영은 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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