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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Sep 01. 2024

[제13화]카페; 깔끔하게 무시하고 자존감 회복하기

나를 위한 시간

 모처럼 운전하는 도훈의 마음이 복잡하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어렵지 않게 초록의 활기를 느낄 수 있음에도 창밖으로 보이는 때 이른 봄의 풍경이 그에게는 오늘따라 더 스산한 것 같다. 그는 오늘 반차를 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병원으로 가는 중이다.


 병원에서는 조금 더 여유를 두고 퇴원을 권했지만 엄마는 하루라도 빨리 병원을 나오고 싶어 했다. 위험한 정도는 아니어서 퇴원은 가능하지만 인대 손상과 골절 때문에 깁스한 다리의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태였다. 엄마 성격에 집에 가면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집안일들을 그냥 두고 볼 리 없기에 도훈은 오늘 그녀의 퇴원이 아주 못마땅했다.

"병원에 계속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기겠어. 얼른 가자."

도훈을 보자마자 그녀가 침대에 앉은 채로 팔을 뻗어 그새 늘어난 생활 물품들을 주섬주섬 가방에 대충 던져 넣으며 말했다.

"또 이러시네. 반찬도 내가 가지러 간댔더니 기어코 이 사달을 내고는."

"귀에 딱지 앉겠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건 네 아빠 닮았어 암튼."

그러는 너는 왜 제때 전화를 받지 않아 이 사달을 냈냐고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아들이 말은 저렇게 해도 제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것임을 엄마는 알고 있다.

"아직 퇴원 수속도 안 밟았어. 다녀와서 내가 챙길 테니까 그만하고 좀 누워계셔."


도훈은 찜찜한 마음으로 퇴원 수속을 위해 엘리베이터에 탔다. 엄마가 퇴원 후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여동생에게 단단히 일러둘 참으로 톡 창을 열었다. 그때 앞에 있던 두 여성의 대화가 들려왔다.

“바쁜데 나까지 챙겨줘서 고맙다. 신경 많이 썼지?”

사람 좋은 시어머니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건강이 중요하죠. 검사 결과도 다 좋으니 마음 편히 가지세요."

"그래, 며느리가 이렇게 신경 써주니 난 참 복도 많다. 건강은 젊을 때부터 관리해야 해. 알지?”

"네.”

도훈은 자신의 엄마에게 항상 퉁명스러웠던 자신을 돌아보았다. 자상까지는 아니어도 항상 뭔가 불만에 찬 것 같은 말투는 이제 좀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 여자의 전화벨이 울렸다.

"데칼코마니, 데칼코마니."

전화를 받은 여자가 아무 말 없이 잠시 듣고 있다가 신경이 곤두선 목소리로 같은 단어를 반복해 말했다.

"엄마는 진짜, 여기 엘리베이터 안인데."

질책하듯 한 마디 하더니 여자는 전화를 끊었다.

여자가 엘리베이터에 있는지 어디 있는지 전화를 건 엄마는 당연히 모를 텐데... 자신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도훈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1층에 내린 그는 아직 한 글자도 적지 못한 빈 톡 창을 보았다. 할 말이 생각났을 때 바로 보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한쪽 벽으로 가 섰다. 그가 톡 창에 할 말을 써넣고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걸음을 뗐다. 그러다 그만 누군가의 어깨를 치고 말았다.

"이런, 못 봤어요, 죄송합니다."

도훈이 먼저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괜찮아요. 저도 잠깐 딴짓을 하느라..."

한 여성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도훈은 그녀의 미소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이게 떨어졌는데요."

그녀가 빨간 리본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처음 보는 건데... 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때 다시 돌아서는 도훈의 시선을 잡은 것은 하얀 종이봉투 위에 선명하게 프린트된 그의 이름이었다.

박. 도. 훈.



얼떨결에 그는 빨간 리본 봉투를 받아 들었다. 봉투 안에는 무료 커피 2잔 쿠폰과 어딘지 모를 곳으로의 초대장이 들어있었다.

"지금 퇴원 수속하러 가는 중이라 여기서 이 커피를 마실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또 모르죠. 꼭 커피를 마시지 않더라도 그 쿠폰이 요긴하게 쓰일 일이 생길지도..."

도훈이 봉투를 바라보며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미소가 아름다운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도훈이 병실로 돌아왔다. 한 여성이 그의 엄마를 부축해 조심스레 침대에 앉히고 있었다. 도훈이 뛰어가 물었다.

"엄마 설마 또 넘어졌어? 그러니까 내가 한다고 그냥 앉아 계시라고 했잖아요."

걱정스러운 마음과 달리 도훈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물건을 집으려다 그러신 것 같아요. 불행 중 다행인지 더 다치진 않으셨어요."

부축을 해 주던 여성이 아들의 날 선 목소리를 듣자, 마치 자신이 괜한 잘못이라도 한 듯하여 변명하듯 말했다.

"아가씨 민망하게 너 왜 그러니?"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예민했나 봐요."

도훈이 그녀에게 사과했다. 좀 전엔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지금 보니 도훈이 아는 얼굴이다. 얼마 전 회식 답사 차 고깃집에 들렀을 때 본 그 임 팀장이었다. 도훈의 사과에 괜찮다 말하고 돌아서 나가는 그녀를 보며 엄마가 도훈을 나무라듯 말했다.

"감사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사람 무안하게 이게 뭐니?"

감사 인사라는 말에 도훈은 갑자기 1층에서 만난 미소가 아름다운 그녀 생각이 났다.


<또 모르죠. 꼭 커피를 직접 마시지 않더라도 그 쿠폰이 요긴하게 쓰일 일이 생길지도...>



도훈은 병실 문을 나서는 그녀에게 다가가 무료 커피 쿠폰을 내밀며 말했다.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요. 이 정도는 부담 없이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지금 퇴원하는데 저는 이 쿠폰을 쓸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도훈의 말에 그녀가 못 이기는 척 쿠폰을 받아 들고 가볍게 인사했다. 수심이 가득해 보이는 임 팀장의 얼굴을 보니 그녀가 병원에 온 이유가 문득 궁금했다.



도훈은 침대에 앉아 협탁에 놓인 빨간 리본 봉투를 30분 넘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조금 특별한 카페에 도훈님을 초대합니다. 당신의 삶에도 있을 작은 기적을 경험하시겠습니까? 초대장을 받으시려면 YES를 터치해 주세요.>


어젯밤 늦게까지 이 미스터리 한 초대장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훈을 아는 사람들 중 누가, 왜 이것을 보낸 것인지, 도대체 어느 카페로 오라는 것인지.

이런 생각을 새벽까지 하다가 아침에 알람 소리까지 놓치고, 그 바람에 지각까지 해 조 과장에게 있는 대로 욕을 먹었다. 퇴근 후 도훈은 그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초대장에 풀기라도 하듯 YES라는 글자를 신경질적으로 여러 번 왔다 갔다 문질러댔다. 바로 그때 도훈의 눈앞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흰 종이 뒤 밝은 빛에 놀라 종이를 뒤집어 보았더니 아까는 분명 백지였던 곳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종로구 숲 속길 ''플로라의 호수' 끝으로 오세요.>

그는 오늘 밤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의 알림을 듣긴 했지만 주변에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아 도훈은 몇 번이나 주변을 돌며 이곳이 목적지가 맞는지 확인했다. 그러다 우연히, 발자국이 난 좁은 길을 찾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들어섰다. 얼마 가지 않아 도훈은 그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십여 걸음쯤 떼었을 뿐인데 저만치 앞에 부드러운 초록빛 정원이 보였다. 그 생명력에 감탄하여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새순을 겨우 몇 잎 정도 품은 앙상했던 가지들이 온통 초록의 활력으로 넘쳐났다.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참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 길 끝 초록 정원이 궁금해졌다. 도훈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카페에 들어서자 눈에 보이지 않는 온화함이 그를 감싸는 것 같았다. 따뜻한 조명 아래 반짝이는 금박을 두른 책들이 보석을 머금은 듯 화려하게 빛났고, 군데군데 빛바랜 책들은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안고 인자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책장 옆자리에 그가 아는 얼굴이 있었다. 민서였다.

"어? 그 카페..."

"아, 그 고깃집..."

서로 눈이 마주치자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동시에 같이 웃었다. 그녀에 대한 도훈의 첫 기억은 고깃집, 그녀에게 도훈의 첫 기억은 카페다.

"두 분 서로 아는 사이죠?"

언제 왔는지 지운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어? 맞죠?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 초대장..."

"안녕하세요? 도훈 씨. 카페 주인 지운이라고 합니다."

지운이 도훈의 물음에 대답 대신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여전히 미소가 아름다운 그녀였다.

어느 카페에서 첫 방문하는 고객에게 주인이 저토록 상냥하게 통성명을 하겠는가. 그 이상한 길부터 의심을 거두지 않았던 그는 이곳이 그저 일반적인 카페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주문하시겠어요?"

얼결에 민서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그에게 지운이 메뉴판을 내밀었다.

"활력 진저 시트러스 티? 메뉴가 하나인가요?"

도훈이 메뉴판 앞뒤를 살피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민서와 지운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이곳은 개인마다 하나의 맞춤 메뉴가 제공된다고 해요."

민서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활력 진저 시트러스 티는 도훈님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맞춤차예요. 생강, 레몬, 꿀, 그리고 녹차가 주재료이지요. 생강은 몸을 따뜻하게 해 주고, 면역력 증진에도 효과가 좋답니다. 레몬은 아시겠지만 비타민 C가 풍부해 피로 회복에 그만이죠."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듯한 그를 보며 지운이 설명했다.

"그리고 꿀은 자연스러운 단맛을 더해주면서 항산화 작용을 해요. 녹차는 카페인이 적당히 들어 있어 정신을 맑게 해 준답니다. 도훈 씨 불면증은 없으시죠?"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릅니다."

도훈의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셋은 함께 웃었다.


잠시 후 지운이 그를 위한 맞춤차를 준비해 왔다. 옆을 지키고 섰는 지운을 보며 그는 맛 평가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아 얼른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차는 바로 마시기 딱 좋은 온도였다.



"오, 이 차 정말 독특한데요. 생강의 알싸함이 레몬의 상큼함과 은근 잘 어울려요. 적당한 달달함이 부담스럽지도 않고요.”

"숙제하듯 평가하실 필요 없으세요."

마치 도훈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지운이 상냥하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 차 말고도 도훈 씨 몸과 마음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그런 방법이 있다고요? 당연히 마다할 이유가 없죠."

도훈이 의심 반 기대 반으로 대답하며 지운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아까 카페에 처음 들어올 때 강한 인상을 받았던 책장이었다. 그녀를 따라 홀리듯 걸어간 책장 앞에서 그는 책 한 권을 건네받았다.

"멘털을 회복하는 연습?"

"데이먼 자하리아데스의 책이에요. 멘털이 무너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죠. 아, 그렇다고 도훈 씨 멘털이 약하다는 건 아니고요. 이렇게 잘 버티고 선임의 자리까지 올라가셨으니까요."

"제가 선임이라고 얘기를 했던가요?"

지운이 말없이 그를 보며 웃었다.

"이건 어떤 책인가요?"

"하루하루 버텨내는 시간을 끊어내고, 좀 더 능동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해 둘까요?"

"버텨내는 시간이라..."

도훈은 그 말에 갑자기 목이 메는 느낌이 들었다.

"도훈 씨는 회사와 일을 사랑하지만 오랜 시간 갈등을 겪어 온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힘드시죠?"

"긍정적으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그냥 그러려니 하며 묵묵하게 그 시간을 견뎌냈던 것 같아요. 뭘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이제 그냥 루틴이 되어버린 느낌이에요."

"그 루틴을 그대로 따르는 게 더 편하고 행복할 것 같으세요?"

"..."

생각에 잠겼다가 도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오. 생각해 보니 저도 매일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서서히 지쳐가고 있는 중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견뎌내느라 수고한 도훈 씨에게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할 거예요."

지운이 그가 들고 있는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자가 말한 첫 번째 단계는 '놓아 버림'이에요. 부정적인 감정은 과감히 떠나보내고 잃어버린 자존감을 회복할 시간입니다."

지운은 이렇게 말하고 눈썹을 살짝 올리며 어서 책을 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마주 앉은 민서가 미소 지으며 자신이 읽던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도훈도 왠지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쳤다.

그때 빼꼼히 열린 문 틈으로 차갑고 시원한 바람이 타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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