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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Aug 29. 2024

[제12화] 반찬 배달의 역습

반찬이 뭐길래

 도훈은 어젯밤 술에 잔뜩 취한 조 과장을 택시에 태워 보내는 것으로 긴긴 회식의 밤을 무사히 끝냈다. 평소 같으면 금요일 밤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다음 날 알람 없이 저절로 눈이 떠질 때까지 푹 잤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다. 주말 근무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 대부분은 어젯밤 회식의 후유증을 나름의 자유 시간으로 풀고 있을 터이지만 선임인 그는 회사의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고객과의 미팅이 잡혀 있어 출근을 해야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가려니 마음은 더 천근만근이다. 흐린 날씨 탓도 한몫 단단히 한 듯했다. 지난번 울캐시미어 코트 사건도 있고 해서 도훈은 우산부터 챙겼두었다. 미팅 시간은 점심 즈음이라 아직 오전 시간이 좀 여유롭다. 도훈은 자주 가는 카페에 잠시 들러 카페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평소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릴 거리가 무척 한산했다. 도로 옆 가로수 잎에 맺힌 이슬이 반짝이는 햇살 없이도 꽤 영롱해 보였다. 저 멀리 익숙한 카페 간판도 흐린 하늘 아래 더 선명하게 빛났다. 카페 앞에 이름 모를 -실은 이름을 알려줘도 매번 잊어버리고 마는- 식물 몇몇이 이제나 저제나 비를 기다리며 애처롭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훈은 또다시 잊어버린 식물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는 듯 화분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커피 향이 진하게 스며든 씁쓸하고 묵직한 공기를 기대했던 그는 다소 실망했다. 주말 오전, 오늘은 아직 손님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어서 오세요."

처음엔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인 줄 알았는데 시간대만 바꾼 베테랑 여직원이 상냥하게 말했다.

"사장님은 오늘 안 나오셨나 봐요?"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안쪽에서 카페 사장이 나왔다.  

"어서 오세요. 혹시 오늘도 출근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 중요한 고객 미팅이 있어서요."

"평소 출근 때와 같은 복장이라 어림짐작해 봤지요. 평소보다 더 신경을 쓰신 듯도 하고요."

카페 주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카페인의 도움이 절실한 날이에요. 어제 회식도 했거든요."

"그럼 전에 드셨던 것처럼 샷 추가해서 따뜻한 걸로 드릴까요?"

"네, 그리고 블루베리 스콘도 같이 주문할게요."


 도훈은 카페에 앉아 고객 미팅 때 사용할 자료를 검토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무심코 고개를 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언제 시작되었는지 비가 제법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이 빗속을 뚫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한 여성. 그 모습을 보며 도훈은 어젯밤 회식 장소에서 곤욕을 치렀던 식당 직원을 생각했다. 그녀도 저 여자처럼 긴 곱슬머리였는데...

그녀는 카페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비를 맞아 더 부스스해진 머리를 손으로 몇 번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어제 회식 장소에서 보았던 바로 그녀라는 것을.

안에서는 카페 밖이 잘 보인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양쪽 어깨를 두어 번 털어낸 그녀가 카페 문을 열었다. 혹 그녀가 민망해할까 봐 도훈은 바로 고래를 돌려 자료를 검토하는 척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면접 보기로 했는데요."

  "아, 네. 잠시만요."

베테랑 직원이 안쪽에서 사장을 데리고 나왔다.

  "우산이 없었나 보네. 카페는 용모가 단정해야 하는데... 일단 이쪽으로 들어올래요?"

카페 사장이 비에 젖은 그녀의 행색과 곱슬머리를 보며 다소 실망한 듯 말했다.

도훈은 면접이 시작되기 전에 카페 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가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곱슬머리의 그녀와 부딪혔다. 그가 들고 있던 쟁반 위에서 컵이 쓰러지면서 남아있던 커피가 모두 쏟아져 버렸다. 그 바람에 그의 와이셔츠에 커피가 몇 방울 튀었다. 오늘은 그에게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난감했다.

  '망했다.'

도훈은 당혹스러움에 잠시 머뭇했다. 그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그녀를 보고 어젯밤 일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도훈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동생뻘 될 법한 그녀가 어제 고깃집에 이어 오늘까지 난감한 일을 겪고 있다 생각하니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제대로 못 봤어요."

카페 사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미안해. 그나저나 흰색 셔츠인데 어쩌지? 오늘 미팅이..."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은 출근하는 날도 아니라 직원들도 없을 거예요."

도훈은 카페 사장이 미팅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의 말을 자르듯 괜찮다 말하고 그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리고 도훈은 사장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아, 최 사장님, 다음엔 저 곱슬머리 여성분이 내려주는 커피를 맛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죠?"

직원의 용모단정을 강조하는 카페 사장 시선으로는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보였을 것이다. 도훈은 적어도 그의 흰 옷에 갈색 흔적을 남긴 것 때문에 그녀가 오늘 여기 온 것이 허사가 되는 일은 없도록 하고 싶었다.


 도훈은 서둘러 나와 근처에서 흰색 셔츠를 하나 샀다. 아침에 입고 나온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화가 나거나 속상하지는 않았다. 다음번에 카페에 들렀을 땐 그 곱슬머리 여성을 직원으로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번 고객은 인지도가 꽤 높은 출판사와 굿즈 제작 회사의 마케팅 담당자들이었다. 도훈은 신간과 어울리는 굿즈 콜라보레이션 캠페인을 제안했고, 고객들은 그의 제안이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고객의 요구사항도 꼼꼼하게 메모해 두었다. 긍정적인 평가를 듣고 고객과의 후속 미팅 일정을 잡는 중에 도훈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미팅 때에는 항상 무음으로 해 두는데 오늘 그만 깜박한 모양이다. 그는 통화거절 버튼을 눌렀다. 회의 중이라는 자동 거절 메시지가 갈 것이었다. 금방 다시 진동이 울렸지만 도훈은 무시했다.


다음 미팅 일정을 조율하고 비교적 성공적인 첫 만남을 마무리하고 나니 벌써 오후 3시가 훌쩍 넘었다. 주말 근무가 큰 부담이었지만 이번 미팅이 회사의 큰 프로젝트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여 도훈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조 과장은 대놓고 칭찬할 그릇도 못될 테다. 자기 부서원들의 공이 마치 자기 능력인 양 남몰래 입을 실룩이며 뿌듯해할 모습이 그려져 도훈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퇴근 준비를 마친 도훈이 그제야 두 번이나 통화를 거절한 일이 생각났다.

두 번 모두 그의 엄마에게서 온 전화였다.

"내가 회의 중이라고 했는데 또 전화를 하셨네. 끝나면 어련히 전화할 텐데..."

" ... "

"여보세요? 엄마 듣고 계셔?"

"내가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

"중요한 미팅이었는데 좀 기다리지, 뭐가 그리 급하다고."

"너 반찬 가져다 넣어주려고 했는데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나서..."

"아니, 내가 반찬 아직 많다고 했잖아. 오늘 바쁘다고도 분명 말했고."

도훈은 엄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내가 아까 계단에서 좀 다쳤어. 집 앞에 반찬들 그냥 두고 갈까 하다가 혹시 몰라서 다시 가지고 내려가다가..."

"엄마 다쳤다고요? 어디를? 얼마나? 어쩌다가?"

도훈이 놀라며 다그치듯 물었다.

"하나씩 물어봐. 엄마 안 죽는다."

"아니, 그러니까 반찬은 왜 가져오냐고. 내가 가지러 간다고 했잖아요."

"계란이 세일하길래 너 좋아하는 계란 장조림 했거든. 무말랭이 무침이랑 같이 가져다주려고 했지. 저번 반찬에 이건 없었으니까."

"못살아 정말. 지금 어디 계세요? 병원은 안 가도 돼?"

"지금 병원이야. 다행히 수술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는데..."

"수술? 엄마 많이 다치신 거야? 어느 병원이에요? 아이, 반찬이 뭐라고 정말!"

도훈이 또 엄마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어쩌면 두 번이나 엄마의 전화를 거절했던 자기 자신에게 내지르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돌아오는 길. 

 병원에 있겠다던 도훈을 극구 말리는 부모님과 여동생 때문에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헬기를 타든 경운기를 타든 그건 난 모르겠고, 절대 늦지 마!"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돌아오는 내내 전화를 제때 받지 못한 것이 마음 쓰여 넋을 놓고 있던 그가, 덕분에 내릴 곳을 놓치지 않았다. 서둘러 내릴 준비를 하고 문 앞에 섰다. 어두워진 밖과는 달리 창에 비친 지하철 내부는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났다. 도훈의 마음과는 반대로.



"이제 와요? 엄마는 좀 괜찮으시고?"

도훈이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그의 엄마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도훈을 불러 세우고 말했다. 그의 윗집에 사는 건물주다.

"안 그래도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저희 엄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우리 집 들러서 반찬통 가져가요. 반찬은 다 쏟아지고 엉망이 돼서 버렸고 통은 씻어 뒀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 조린 듯한 짭짤한 간장 냄새와 뭔지 모를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코가 따끔거리고 목구멍이 조여 오는 것 같아 침을 삼키기 힘들었다. 죄인처럼 계단만 보며 올라가던 그의 눈에 검고 작은 무언가가 띄었다. 허리를 굽혀 자세히 보니 무말랭이 같았다. 무말랭이가 원래 이렇게 거뭇했었나? 건물주 아주머니가 치운다고 치웠지만 구석으로 맥없이 내몰린 이것까지는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다. 무말랭이는 자고로 오독오독한 식감과 먹음직스러운 새빨간 색이 매력인데 그런 것은 온데간데없었다. 미처 치우지 못한 이 파편이 고통스러웠던 누군가의 어느 순간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볼품없이 축 늘어져 있는 거무튀튀한 저것을 보니 도훈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그러니까 오지 말랬더니. 반찬도 많다니까 괜히 와서는..."

마음과 달리 도훈은 핀잔 섞인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앞서 올라가던 주인아주머니가 그를 돌아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엄마는 다리만 다친 게 아니었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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