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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너울 Aug 25. 2024

[제11화] 회식의 법칙

그의 왕국

 넘어질 땐 너무 당황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뒤늦게 밀려왔다. 미지의 조력자 덕분에 오전 교육은 잘 마쳤지만 욱신거리는 허리와 엉망이 된 코트를 걱정할 새도 없이 도훈은 오늘 점심시간도 반납해야 한다. 까탈스러운 조 과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완벽한 회식 장소 답사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훈이 선임을 달게 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런 자잘한 일까지 해야 한다니! 도훈은 조 과장이 왜 그렇게 자신을 싫어하는 도통 모르겠다.


도훈이 선임을 달기 전 회의 석상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은 새로 의뢰받은 제품, 프리미엄 커피 머신에 대한 마케팅 전략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마케팅 활동 관련 프레젠테이션이 있던 도훈은 조 과장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회의가 있기 며칠 전부터는 밤까지 새우다시피 하며  완벽을 기해 준비를 마쳤다. 제품의 편리함과 고급스러움을 강조하면서 홈 카페 트렌드에 관심이 많고, 시간 절약과 프리미엄 경험을 중시하는 30-40대 직장인을 주된 타깃으로 설정하였다. 프리미엄 커피 머신이 바쁜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개선한다는 점과 집에서 즐기는 고급 커피 경험을 제공한다는데 중점을 두고, 온라인과 SNS 플랫폼을 기반으로 다양한 소셜 미디어 마케팅 활동을 제안한다면 유독 자신에게만 깐깐한 조 과장의 눈높이도 분명 맞출 수 있을 것이었다.

정신 사납게 볼펜을 돌리다가 떨어뜨리기를 여러 번, 볼펜을 계속 클릭하며 펜촉이 들락날락, 딸깍딸깍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직원들의 집중을 방해하던 조 과장이 도훈의 발표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펜을 책상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탁!

그 소리가 너무 커서 회의실 안에 있던 모두가 일제히 조 과장을 쳐다보았다. 한창 발표 중이던 도훈도 말을 멈추었다.

"그게 다야?"

조 과장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며 물었다.

"아직 안 끝났는데요. 이 제품의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편리한 사용성을 좀 더..."

"들어보나 마나일 것 같은데... 어때? 더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가?"

도훈의 말을 도중에 끊고,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조 과장이 다른 직원들에게 물었다.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는 몇몇 직원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말씀을 주시면 다시 준비를..."

"다시 언제? 여기는 회사야. 시행착오는 학교에서 끝냈어야지. 여기가 박 씨가 연습하는 곳인가?"

회의실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박 씨라니...

따지고 보면 도훈이 박가이니 박 씨가 틀린 표현은 아니다손 치더라도 이런 이례적이고 무례한 상황에 회의실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박 씨는 남아서 뭘 잘못했는지 생각 좀 하고, 다른 사람들은 회의 끝! 다들 나가자고."


도훈은 그날 상대적 고립감으로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었다.


조 과장은 왜 박 선임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일까. 박 선임이 조 과장보다 직급이 낮아 경험이 적어 상대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기 쉬워서? 아니면 조 과장 본인의 능력이나 위치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일부러 능력 있는 박 선임을 못살게 구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일종의 방어 기제? 혹시 그 자신도 모르게 도훈의 언행이 조 과장 기분을 상하게 했던가? 박 선임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언젠가 퇴근길 지하철에서 두 친구가 나누던 대화를 도훈은 정확히 기억한다.

- 학벌도 좋고 외모도 그만하면 훌륭한 편인데 왜 싫다는 건데?

- 이유 없이 싫은가 봐. 그냥 다 싫대.

그럼 조 과장도 혹시?

이유가 없다면 관계를 개선할 답도 없다.

사람이 정말 아무 이유 없이 그토록 사람을 그냥 싫어할 수도 있는 것일까.

도훈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게 못살게 굴면  주체스러운 부하 직원이 제 눈앞에서 사라져 줄 것이라 조 과장은 예상했을까. 하지만 적어도 도훈은 아니었다. 그는 살아남아 선임이 되었다.

아직 과장은 바뀌지 않았다.


눈치 빠른 도훈이 분위기를 미리 읽고 조 과장을 잘 살피게 된 지금은 그나마 좀 나아진 편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 과장은 도훈을 더 이상 박 씨라 부르지 않는다. 어쩌면 그에게 새로운 최 씨가 생겼기 때문일 지도.

어쨌거나 회식 제1 법칙, 조 과장이 평소 좋아하는 곳 위주로 리스트를 뽑아 미리 회식 장소를 답사하는 것은 여전히 도훈의 몫이었다. 두어 개는 이미 며칠 전 답사를 마쳤고, 오늘 점심시간에 마지막으로 회사 근처 가장 유력한 선택지가 될 갈빗집에 들러볼 것이다. 조 과장이 지인들과 저녁 모임을 하고 나서 칭찬을 했던 곳. 도보로 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식당이기도 해서 웬만하면 그곳으로 예약을 해 둘 참이었다.


그 고깃집은 오픈한 지 오래되지 않아 깔끔한 편이었고, 밖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나무 인테리어와 은은한 조명이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도훈의 생각과 달리 그곳은 평일 점심시간에도 꽤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바쁜 직장인들의 트렌드를 잘 반영한 듯했다. 회식 장소 답사차 왔다고 하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던 식당 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금요일 저녁 7시에 10명 정도 올 예정인데 금요일 밤이어도 자리 배치 문제없을까요?"

"그럼요. 단체 손님을 위한 별도의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혹시 주변 회사 단체 손님들에게 주어지는 서비스나 기타 혜택이 있을까요?"

"이전 회식에서 결제했던 영수증을 가져오시면 두 번째부터 5% 할인 혜택이 있습니다."

"혹시 이번 주 금요일에 또 다른 단체 예약이 있나요? 저희 상사 분이 회식팀이 여럿이면 너무 소란스럽다고 싫어하셔서요."

그러면 식당에서 도훈의 부서 회식팀을 만난 다른 사람들은 당최 무슨 죄인가. 이 같은 일로 조 과장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던 도훈이기에 식당 주인에게 묻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민망함을 감출 수가 없어 괜스레 주변 눈치를 살폈다.  

"금요일은 이미 두 팀 예약이 있어요. 안쪽 룸 공간은 어떠세요? 지금 가장 큰 룸이 하나 남았는데 거긴 원래 15명 이상 되어야 하지만 그냥 예약해 드릴게요."  


방금 이곳으로 들어온 두 여성의 대화가, 예약을 마치고 막 식당을 나가려던 도훈의 시선을 붙잡았다.

"점심부터 무슨 고깃집이야? 별로 내키지 않는데. 시간도 없고..."

"임 팀장 몸보신 좀 하라고. 점심 메뉴로 간편하게 구워서 나오니까 시간도 오래 안 걸리고 편하게 먹을 수 있어. 임 팀장 매번 밀가루만 먹어서..."


도훈의 울캐시미어 코트가 엉망이 되고,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검증되지 않은 소문이 날개를 달던 오늘 아침, 도훈의 기억에 남은 그 임 팀장. 엘리베이터 안에서 형체는 없고 상상으로만 남았던 그 임 팀장이 바로 이 여성인 것일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측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던 것 같다.



 부서 회식이 있는 날엔 출근하는 발걸음이 특히 더 무겁다. 다른 직원들에게도 행복한 시간은 아닐 터이다.

고깃집 주인이, 인원수가 많이 모자라지만 인심 쓰듯 예약해 주겠다던 큰방은 10명이 편히 앉기에도 좁은 감이 있었고, 덕분에 도훈은 회식 시작 전부터 조 과장에게 심한 질책을 들어야 했다.

'예상은 했지만 시작부터 쉽지 않군.'

조 과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는 것은 꽤나 참을성을 요하는 일이다. 그는 회식 때마다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무식한 상사라는 말을 듣기 딱 좋게 술을 강요하고, 별 의미 없는 질문들로 직원들을 곤란하게 해 구태여 난처한 상황을 만들고야 만다. 회식 제2 법칙, 아무리 의미 없는 멍청한 질문이라 해도 반드시 대답은 하고 넘어가야 한다. 괜히 대답을 회피하며 얼버무렸다가는 뒤끝이 긴 그에게 다음 회식 때까지 시달릴지도 모를 일이니까.


한창 조 과장이 떠드는 와중에 테이블 위에 놓아둔 도훈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뭐 해? 테이블이 다 흔들리잖아, 빨리 받아."

한창 말하는 중에 끊긴 것이 마치 도훈의 잘못이기라도 한 것처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조 과장이 말했다. 도훈은 전화를 핑계 삼아 밖으로 나왔다.

"훈아, 주말에 반찬 좀 가져다주려고 하는데 집에 있니?"

"나 이번 주 주말에도 바빠요. 그리고 엄마가 준 반찬 아직도 많이 남았어."

"그게 언제인데 아직도 남았니, 밥은 챙겨 먹는 거야?"

사실 요즘은 일이 바빠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있어도 시켜 먹거나 평일엔 아예 회사에서 먹고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냉장고 안에서 비어지지 않는 반찬통들이 자꾸 쌓이게 되니 이것도 스트레스였다.


"암튼 지금 좀 바빠요. 이번 주는 일단 안되고 내가 시간 될 때 가지러 갈게. 괜히 무겁게 또 들고 오지 마, 엄마."

대충 전화를 끊고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아가씨, 컵도 새 걸로 갖다 줘야지, 여기 컵에 기름 튄 거 안 보여?"

"에이, 왜 그래, 박 씨. 우리가 컵은 새로 가져다 달라고 안 했잖아."

아까부터 귀에 거슬리는 큰 목소리. 한 무리의 남자 등산객들이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떠들어댔다. 도훈이 오늘 식당에 들어올 때부터 상당히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불쾌한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는 부류.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싫다.

 자기들끼리 킥킥대더니 젊은 여자 직원에게 아가씨가 센스가 있네 없네, 했다.


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 쪽으로 다가가 괜히 필요도 없는 컵을 하나 집어 들고는 그녀의 손에서 컵을 빼냈다.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아가씨 그만 부르시고 이제 들어가세요. 선생님들 딸들이 밖에서 일하느라 고생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하실 거예요?"

도훈은 자신의 여동생 또래인 그녀가 더욱 측은한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내뱉었다.

"당신은 누구? 저 아가씨 남자 친구이신가?"

"적당히 좀 하세요. 여기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네, 정말."

도훈이 욱 하고 올라오는 감정에 폭발하려는 찰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한 여성이 부드러워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거친 말투로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마주 앉은 남자의 손사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을 장착했다.

"제 아내가 좀 아픈데 편하게 밥 좀 먹을 수 있을까요?"

한바탕 일이 벌어질 뻔한 상황이, 중년과 노년 사이 어디쯤으로 보이는 한 남성의 말로 일단락되었다. 이런 상황을 못 본 척 계속 곁눈질로 살피던 식당 주인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들의 타깃이 되었던 그 여자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도훈은 곤욕치르고 있을 또 다른 최 씨가 생각나 서둘러 다시 회식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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