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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너울 Aug 22. 2024

[제10화] 미지의 조력자

두 번째 손님

 눈 덮인 설경은 언제 봐도 장관이다, 출근하는 날만 빼면. 분명 지난 주말, 늘어져있기 딱 좋게 적당히 데워진 온열 매트 위에서 내다본 창 밖 설경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오늘 늦으면 또 무슨 말을 해대려나...'
3월인데 도대체 몇 번째 눈인지 모르겠다며 도훈은 투덜거렸다. 모처럼 거무튀튀한 패딩을 벗어던지고 브라운 톤이 고급스러운 코트를 입고 나왔건만 날씨가 이러하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작년 겨울 마음먹고 장만한 울캐시미어 혼방 코트인데... 장장 월급의 4분의 1이나 주고 구입한 옷을 정작 날이 추울 땐 구스 패딩이 더 따뜻할 것 같아서, 날이 좋을 땐 따뜻한데 굳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비나 눈이 오는 날엔 비나 눈이 오니까. 그런 터무니없는 이유로 구입 이래 겨우 한 번 세상 빛을 본 코트다. 오늘도 도훈은 선임으로서 상반기 인턴십 교육 첫날이 아니었다면 굳이 흐린 날 이 코트를 고집하진 않았을 것이다.

 집 근처에서 버스를 탈 때만 해도 회사까지는 충분히 무난해 보였다. 눈 소식도 오후에나 있고 구름 사이로 해도 간간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탈 때에도 괜찮았는데 홍대역에 내려 밖으로 나와보니 눈앞이 새하얗다.
 '대한민국에서 3월에 눈이 이렇게 온다고?'
보고도 믿기지 않는, 믿고 싶지 않은 눈앞 광경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니 바닥도 금방 질척해졌다. 도훈은 차라리 비가 낫다고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코트가 젖지 않도록 벗 안팎을 뒤집어 감싸 안고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사가 있는 연남동까지 뛰어야 한다. 질척하게 녹아 엉겨 붙어 바닥이 온통 슬러쉬 천지다. 잘게 부서진 저 얼음에 색소라도 끼얹고 싶어 진다. 먹색 슬러쉬라니... 영 입맛이 돌지 않는다. 차라리 눈 대신 비였다면 흙탕물이 방울방울 종아리 아래쪽으로 몇 번 튀기고 말 것을, 이 슬러쉬는 뛸 때마다 척척 감겨 덩어리로 공격을 해 온다. 한 번 튈 때마다 그의 게이지도 팍팍 줄어드는 것만 같다. 어깨를 타고 내려와 오른쪽 옆구리에서 덜렁덜렁,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가방도 참 골칫거리다. 가방을 항상 들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인턴십 교육에 필요한 자료를 넣을 것이 필요했다. 어제 오후 거래처에 들르느라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집에서 마치고, 준비한 자료가 담긴 소중한 봉투를 넣어 나온 참이었다.

 홍대에서 연남동 회사까지 평소 같으면 10분에서 15분 정도 걸릴 거리이지만 지금처럼 뛰다시피 간다면 6~7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보도 블록 하나가 튀어나와 기울어져 있음이 보였고, 아차! 하는 순간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도훈은 미끄러지면서도 원망스럽게 눈을 쳐다보았다. 머리 위에서 내리던 눈이 마치 테이프를 되감 듯 거꾸로 오르다 그의 얼굴로 다시 내렸다, 사정없이.

 월급의 4분의 1을 단번에 해치운 울캐시미어 코트가 그의 머리 위로 맥없이 떨어졌다. 열린 지퍼 사이로 가방 속 서류와 물건들도 제 멋대로 나뒹굴었다.
 "괜찮으세요?"
 그래도 이렇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다행이었다.
 "어머, 어떡해..."
 "너무 아프겠다."
 "이런 상황이면 아픈 줄도 모를걸."
 우려 섞인 말과 달리 그들의 행동은 눈 오는 날 이런 재미가 없으면 섭하지, 라고 말하는 듯 한없이 가볍다. 봐도 못 본 척 무심하게 그냥 지나쳐 주는 사람들은 오히려 고마웠다. 엉덩이와 허리에 통증이 있었지만 아랑곳할 수 없었다. 엉거주춤 일어나 서둘러 떨어진 물건들을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 추운 날씨에 일부러 벗어 뒤집어 들고뛰었던 것이 무색하게 코트도 그도 엉망이 되었다.

오늘은 하필 인턴십 교육이 있는 첫날이다.




 그는 이제 뛰지 않았다. 소중한 코트를 뒤집어 가슴 앞으로 안지도 않았다. 추운 줄도 모른 채 되는대로 손에 들고 걸었다. 그러다 낡고 오래된 의류, 인테리어 소품 등을 판매하는 빈티지 샵 앞을 지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도 익숙한 거리와 건물들을 지나는 중이신가요?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출근길이라면 잠시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세요. 눈 오는 풍경이 오늘따라 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나요?"
 '오늘따라 더 뭐? 아름다운 것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순간 도훈은 이 목소리가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조 과장의 비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이 꼴을 보고 조 과장은 또 무슨 시비를 걸지...

 그는 아무리 다시 보아도 이 눈이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회사 건물에 들어도훈은 조 과장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연신 주변을 살폈다. 드라마에서 보면 꼭 이럴 때 로비나 엘리베이터에서 상사를 맞닥뜨리던데 다행히 도훈에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도훈은 엉망이 된 꼴을 숨기려 엘리베이터 깊숙이 자리했다. 이 시간 엘리베이터가 가장 바쁜 시간이다. 특히 출근 시간 데드라인이 가까워 올 수록 엘리베이터 안팎은 더욱 번잡스럽다. 사람들이 안으로 물 밀 듯 쏟아져 들어왔다.
 "임 팀장 또 시작이지?"
 "노예병? 그런 것 같아. 짜증 나."
 "왜 이맘때만 되면 일을 못해서 난리야?"
 "그러니까. 우리도 할 건 다 하고 있는데 괜히 일 안 하고 게으름 피우는 것 같잖아 "
 "오빠가 하나 있다던데 그렇게 문제를 일으킨다던데..."
 "진짜? 그럼 매년 무슨 교도소라도 들락날락하는 거 아냐?"
 데시벨이 아무리 낮다고 한들 정원 20명도 안 되는 이 작은 네모 공간 안에서 그들은 정말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을까. 오히려 사방이 막혀 주변 소음이 거의 없는 조용한 공간에서 속삭이는 소리는 더 명확하게 들린다는 것을 그들은 정말 몰랐던 것일까? 근거 없는 소문의 진상지가 회사 화장실과 바로 여기, 엘리베이터 안이다. 도훈이 출근하는 건물에는 여러 회사들이 입주해 있다. 그들이 말하는 임팀장이란 사람은 어느 회사 사람일까? 엉망이 된 이 꼴로 회사에 출근했으니 나에겐 또 어떤 뒷말이 날개를 달고 한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도훈은 이 건물 B&B 마케팅 회사 소셜 미디어부에 근무한다. 그 꼬리표에 이 회사 이름과 부서명이 붙지만은 않길 바랄 뿐이다.



 도훈은 사무실에 가방만 가져다 놓고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고개는 들지 않고 눈만 치켜떠 이마에 선명하게 석 삼자를 그렸을 조 과장의 눈빛이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밸도 없이 헤헤 웃으며 조 과장의 비위를 맞춰 주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화장실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내고 들고 온 코트를 살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지 짜증 섞인 한숨이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코트 양손으로 잡고 허공으로 번쩍 들어 세게 두어 번 털었다. 마침 들어오던 다른 직원들이 몸을 피하며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앗, 못 봤어요,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자신의 모습이 참 측은했다.

  오늘은 인턴십 교육이 있는 날이니 이제 운이 없던 출근길 사고는 잊어야 한다.
 "박선임, 오늘 인턴들 교육 있는 날 아냐? 그런데 평소보다 더 늦게 오면 어쩌란 거야?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가?"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도훈이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조 과장이 쏘아붙였다. 반자동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8시 52분.
 항상 일찍 출근하는 도훈에게는 다소 늦은 시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아직 회사내규에 따른 출근 시간은 8분이나 더 남았다. 그런데 저 작자는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인지 도훈은 화가 치밀었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아침에 갑자기 눈도 오고, 또 눈길에 넘어지는 바람에..."
 "눈은 뭐 사람 봐가면서 오나? 여기 출근길에 눈 한 번 안 맞아 본 사람 있어? 그러니까 일찍 일찍 왔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것 아냐!"
 도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 과장이 낚아채듯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그럴 일'이란 아침에 예보 없이 눈을 맞은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눈길에 넘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도훈은 궁금했다.
 "네, 과장님. 바로 교육 준비 들어가겠습니다."
 눈썹은 치켜 올라가고 입술은 씰룩거리며 조 과장이 마땅치 않다는 얼굴로 쏘아보았다.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도훈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어제까지 열심히 자료를 준비했으니 교육이 잘 마무리되면 도훈도 오늘 아침의 불상사를 잊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월급의 4분의 1짜리 울캐시미어 코트가 제대로 한 번 입어보지도 못한 채 엉망이 된 것은 번외로 두고 말이다.

  명치를 제대로 한 방 먹은 듯 갑자기 복통이 밀려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겨드랑이부터 시작해 이마와 콧잔등에 이어 인중까지 진땀이 바작바작 나기 시작했다.
 '뭐야, 왜 없지? 어제 저녁에 분명히 넣어둔 걸 확인했는데..."
 도훈은 오늘 아침 혹시 자료를 꺼내보았었는지 기억을 되짚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가방에 넣은 후 꺼내 본 적이 없다.

 귀신에 홀렸나, 아니면 저 능구렁이 같은 조 과장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내가 화장실 간 사이 일부러?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조 과장의 눈치를 살펴보니 후자는 아닌 것 같다. 멍청한 조 과장은 그리 영악하지는 못해 누군가를 골탕 먹이려 했다면 그 사람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끈질긴 관찰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서류 봉투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이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출근길에 보기 좋게 반원을 그리며 넘어졌던 일이 생각났다.
 "너 그러다가 언제 한 번 제대로 큰일 치른다, 제발 지퍼 좀 잘 닫아. 내가..."
 도훈이 독립하기 전, 가방의 지퍼를 닫지 않는 습관을 지적하며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잔소리 장전, 발사 전에 뒷말은 듣지도 않고 출근을 핑계 삼아 뛰쳐나왔던 일이 불현듯 떠오르며 아연실색했다. 그 습관이 오늘에 이르러 결국 이런 참사를 만들어 내고 말았구나. 퍽 소리 나게 땅으로 내동댕이쳐진 가방에서 펜, 휴대용 크리넥스, 파일로 정리해 두지 않았던 때 지난 여러 사무 문서들, 그리고 휴대폰까지 한꺼번에 쏟아졌었다. 아픈 것도 모른 채 당황하여 재빨리 떨어진 물건들을 대충 가방으로 욱여넣고는 빠르게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



'다시 돌아가 볼까? 아직 있으려나?'
 이 모든 게 악몽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냉혹한 현실을 반영하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박선임 잠이 아직 덜 깼나? 뭐 하고 섰어?"
 조 과장이 엄지와 중지를 딱 딱 튕기며 특유의 기분 나쁜 투로 말했다. 이럴 시간에 교육자료는 어떻게든 다시 출력하면 될 일이었지만 문제는 고객 리서치 자료이다. 이는 지난 한 달 동안 담당 직원들이 추운 날 직접 발로 뛰며 고객들을 만나 모아 왔던 데이터이다. 고객이 주로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 선호 콘텐츠 유형 및 주제, 게시물에 대한 좋아요, 댓글 공유 등의 반응 분석 등 고객의 참여도를 높이기 위한 최적의 마케팅 전략 자료, 그리고 담당 직원들의 노고를 한 순간에 그가 날려버린 셈이다. 인턴십 교육 중 실제 참교 자료로 쓰인 후, 이 타깃 고객의 인사이트를 마케팅 전략 개선을 위해 사용할 참이었다. 계획 단계부터 자료 수집, 분석 단계를 거쳐 정리한 보고서의 근간이 되는 자료를 바로 그가 오늘 아침 잃어버린 이다.
 'X 됐다.'
 망연자실해 섰는데 그의 자리에 있는 전화기가 눈치도 없이 울다. 이 와중에 또 웬 전화?!
 "뭐 해? 시끄럽게. 전화 빨리 안 받아?"
 조 과장의 말에 마치 그에게 대들기라도 하듯 도훈은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세요!"
 "여기 1층 데스크입니다. 혹시 서류 봉투 잃어버리셨나요? 뒷면이 많이 젖어있는데 꽤 묵직한 서류봉투예요. 담당자 이름이 박도훈이라고 되어있습니다만..."
 "아, 네. 제가 그 담당자입니다. 바로 가지러 내려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침 난리통에 잃어버린 문제의 그 봉투임이 분명했다.
 '하나님, 부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중요한 자료를 찾아준 미지의 조력자는 누구일까? 그 누군가 덕분에 불과 몇 초 전까지 이어지던 절망적인 순간이 짧은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되었다. 이제야 심장이 제 자리를 찾은 듯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데스크 직원에게 괜스레 화를 내며 전화를 받은 것에 사과하지 않았음이 생각났다.

서류를 찾으면서 미안한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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