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 공동 현관문을 힘껏 당겼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여닫는 문인데 유난히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더 두꺼워 보이는 유리문만큼이나 서영의 발걸음도 심란했다. 그간 미루고 미뤄왔던, 최대한 더 미루고 싶었던 그곳에 가는 길이다.
월차를 내고 예약일에 맞춰 병원에 간다. 증상이 심상치 않아 동네 병원에 무거운 발걸음을 했던 날, 의사는 좀 더 큰 병원에 가보기를 권했다. 그냥 단순한 스트레스 때문, 좀 쉬면 금방 나아질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서영은 한동안 당혹스러웠다.
회사일이 바쁠 때에는 종종 잊고 살기도 했는데 예약일이 다가올수록 긴장감이 더 커졌다. 그 탓인지 집을 나설 때부터,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가슴이 또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면 여지없이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면서 콧잔등과 인중이 진땀으로 번들거린다.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연신 번들거림을 잡다 보면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지쳐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버스를 타고 제일 뒷좌석 창가 쪽에 몸을 실었다. 황량한 거리, 온통 흑백으로 무장한 사람들, 앙상한 나뭇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렸던 마른 잎새들까지 모든 생명을 집어삼킨 강렬했던 겨울. 그 기세가 대단하여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겁먹었는데 이제 겨우 시작되는 연약한 봄의 기운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창밖의 네모난 건물들이 서영의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며 그 경계가 흐릿해졌다. 조금씩 연둣잎을 품기 시작한 느티나무들도 쏜살같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무정하게 그녀를 외면하는 것 같았다. 꾸준히 한 자리에 있는 것은 온화한 햇살뿐. 그녀는 이 햇살이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심장이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접수처에 예약 진료 접수를 하면서부터 기다림은 시작되었다. 각 진료실 문들이 계속해서 여닫히고 그때마다 간호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서영의 진료실 앞에도 많은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빈자리가 두어 개 있었지만 서영은 근처를 천천히 서성거렸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것이 덜 초조할 것 같아서였다. 그로부터 한동안 진료실 문이 열리고 닫혔지만 서영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이럴 거면 예약은 왜 하라는 거지?'
그녀는 혹시 예약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혹시 자신이 서성이는 동안 호명되는 것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닌지 간호사에게 확인해 보기로 했다.
"예약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못 들어갔는데요, 확인 좀 해 주시겠어요?"
"앞 진료가 좀 길어져서 그래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금방 부를 거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간호사는 퉁명스럽고 불친절하게 말했다. 그리고 서영의 이름 대신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무미건조하게 부르고는 문 뒤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확인해 줄 마음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기다렸을까, 드디어 다음 대기 환자로 서영이 호명되었다.
서영은 자신의 증상을 최대한 빠짐없이 얘기했다. 정확한 진단에 도움을 줄까 싶어 그런 증상을 앓던 때의 상황도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지만 <지금 밖에 환자들 기다리는 거 못 봤니?> 하는 의사의 무언의 눈짓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우선 심전도 검사랑 흉부 엑스레이 찍고 기본 검사부터 좀 할게요."
"심전도랑 엑스레이는 1차 병원에서 이미 해서 자료 다 가져왔는데요."
"여기가 1차 병원이에요? 여기선 안 했잖아요."
"여기 와서 새로 다시 해야 하는 건지 몰랐네요."
의사가 정나미 떨어지게 말하길래 서영도 차갑게 말했다.
'그럼 자료 제출하라는 말이나 말지.'
서영은 이 말을 의사 앞에서 해야 했다고 후회하며 검사실로 향했다. 혈액검사와 호르몬 검사를 하고, 기다리고, 심전도 검사를 하고, 기다리고, 엑스레이를 찍고, 기다리고, 운동부하검사인지 뭔지를 한다고 열심히 뛰고, 또 기다리고... 오늘 안에 검사가 끝나기는 할는지...
검사 시간의 몇 배를 더 기다리고 나서야 서영은 의사 앞에 다시 앉았다.
"기본 검사는 이상 없는데요.”
" ... "
'그러니까. 그건 1차 병원에서 받은 소견이잖아. 그래서 이제 뭐 어떻게 하라는 건데?'
결과를 얘기해 놓고 컴퓨터 화면만 들여다보며 별 말이 없는 의사에게 서영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차라리 정확한 진단명과 처방이라도 나왔다면 덜 억울했을까.
"심장내과나 신경정신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신경정신과 먼저 가보시죠?"
의사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신경정신과요?”
"말씀하신 모든 증상들이 스트레스나 불안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아요."
"..."
당혹스러워하는 서영을 보며 의사가 묵뚝뚝하게 덧붙였다.
"스트레스와 불안 수준 평가를 위한 심리 검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의사는 반말 비슷하게 말끝을 끊었다.
"심리검사요?"
"심리 검사 수치를 보고 불안 수준이 높게 나오면 추가적인 상담과 치료가 필요할 수 있어요."
"제가 무슨 큰 정신병인가요?"
"모르죠. 수치에 따라 공황장애가 의심돼요, 상황이."
의사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짜증 섞인 투로 대답했다.
'내가 공황장애라고?'
의사한테 물어도 시원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고, 짜증 섞인 차가운 목소리를 또 듣고 싶지도 않아 서영은 궁금한 것을 묻지 않았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면담하시고 추가 검사하시죠. 나가시면 안내해 줄 거예요."
면담이라니. 예전부터 이 말을 듣고 나면 그녀에게 항상 난감하거나 슬프거나 아픈 일이 생기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후, 담임선생님의 면담 요청이 그랬고, 중학교 때 단짝 친구가 장난치듯 <서영아, 나랑 면담 좀...>이라고 말했을 때에도,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첫사랑 이한석이 학교 끝나고, 교문 앞에서 면담 잊지 말라고 당부했을 때에도 그랬다.
서영은 생각에 잠겨 걷다가 어딘가로부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짧은 외마디 비명을 들었다.
<아얏!>
이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제야 서영은 자신이 잘못된 층에 와 있음을 알았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아마 올라가는 것을 잘못 탄 모양이었다. 그녀는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입원실 안에서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여자가 침대 옆에 넘어져 있었다. 서영은 뛰어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한쪽 다리에 전혀 힘을 주지 못하는 성인 여자를 여자 혼자서 지탱해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힘든 일이었다. 겨우 세워 침대에 앉히려는데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와 다그치듯 말했다.
"엄마 설마 또 넘어졌어? 그러니까 내가 한다고 그냥 앉아 계시라고 했잖아요."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물건을 집으려다 그러신 것 같아요. 불행 중 다행인지 더 다치진 않으셨어요."
서영은 괜히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에 핑계를 댄 듯해 속이 상했다. 괜히 뻘쭘해져서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나오려는데 그가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공짜 커피 쿠폰을 내밀며 말했다.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요. 이 정도는 부담 없이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지금 퇴원하는데 저는 이 쿠폰을 쓸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아들로 보이는 그 남자가 말했다. 서영은 무료 커피 쿠폰보다는 일단 빨리 그 병실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 얼른 쿠폰을 받아 들었다.
서영은 수납을 마친 후에도 한동안 넋 놓고 앉아있다가 휴대폰을 들어 검색창을 열고 증상을 입력했다.
<심장 검사 결과 정상 두근거림과 두통 증상 지속>
이러한 증상을 포함하는 다양한 원인들이 나열되었다. 그중에서 스트레스와 불안이라는 단어가 마치 볼드체처럼 유독 그녀의 눈에 박혔다.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검색 중에 그녀의 심장을 철렁하게 한 문장.
<가슴 답답함, 두근거림, 두통 등의 증상은 공황장애의 전형적인 증상과 유사, 증상이 지속되면 자연적으로 좋아질 수 없어 약물... 공황발작... 사회생활 어려워...>
더 이상 글을 읽을 수 없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서영은 점점 심해지고 있는 자신의 증상을 생각하니 갑자기 토할 것 같이 속이 이상해져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막상 들어가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하며 물었다. 서영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종종 있는 일이라고.
요동치는 심장을 토닥이며 심호흡으로 숨을 고르고 밖으로 나왔다.
"이걸 깜박하신 것 같아서요."
문 앞에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서영의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어머, 감사합니다."
아마 서영이 화장실로 뛰어들어오며 의자 위에 휴대폰을 그대로 두고 온 모양이었다. 친절한 그 여성은 서영이 정말 괜찮은지 한 번 더 확인하고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때 서영의 전화가 울렸다. 구 작가였다. 서영은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빨간 버튼을 밀어 통화를 거절해 버렸다. 곧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끈질긴 구 작가일까. 순간 차라리 전화기를 잃어버린 것이 더 나았겠단 생각마저 들어 그 마음씨 착한 여성을 잠깐 원망도 했다. 다시 통화를 거절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전화기 화면에 엄마라는 글자가 보였다.
"너 괜찮냐? 어디 다친데 없지? 지금 어디야?"
서영이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가 다그쳐 물었다.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에 서영은 일단 그녀를 먼저 안심시켰다.
"내가 방금 보이스피싱인가 뭔가에 당할 뻔했다야. 당신 딸이 지금 다쳐서 병원에 있다면서 사람을 막 윽박지르는데... 내가 아직도 손발이 떨린다."
병원에 있다는 말은 팩트다. 다쳐서 온 것은 틀렸지만.
아, 마음이 다친 것도 다친 것은 다친 것인가.
아까 휴대폰을 잃어버렸다면, 그랬다면 엄마가 보이스피싱에 정말 당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휴대폰을 찾아준 그녀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전화를 끊고 서영은 세면대 앞에 섰다. 헛구역질 때문에 눈에 눈물이 고였고, 푸석푸석한 얼굴을 보니 이게 환자가 아니고 뭐겠나 싶기도 했다. 아직은 손이 좀 시렸지만 그녀는 일부러 찬물로 손을 씻었다.
"삶이 참 녹록지가 않죠? 마음이 소란스러울 땐 카페 만한 곳이 없어요."
"네?"
분명 아무도 없는 화장실이었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한 간호사가 그녀 뒤에 서 있었다. 서영의 진료실 담당 간호사와는 전혀 다른,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따뜻한 사람인 것 같았다.
"스트레스와 불안이 그냥 지나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르죠, 머무는 게 아니라."
"네? 그게 무슨... ?"
"너무 애쓰지 마세요. 지나간 일은 그냥 지나가게 두는 것이 나을 때도 있으니까요."
밑도 끝도 없이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그 여자는 홀연히 사라졌다.
스트레스와 불안. 그리고 카페. 사라진 간호사가 한 말 중에 생각나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카페, 하니 서영은 아까 남자에게 받은 무료 쿠폰 생각이 났다. 정신도 차릴 겸 공짜 커피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잘못 내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다잡고 그녀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카페는 병원 건물 지하 한쪽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이 쿠폰 쓸 수 있나요?"
"두 잔 무료 쿠폰이네요. 나눠서 쓰실 수는 없으셔서 커피 두 잔 준비해 드릴게요. 테이크아웃 맞으시죠?"
"네."
식사를 하러 온 환자와 가족들, 친구들과 지인들. 그들은 삼삼오오 모두 즐거워 보였다. 저 사람들은 어디가 아파서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일까. 저들이 환자복을 입고도 저렇게 환히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환자복을 입고 있지 않은 서영은 마음이 더 깊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픈 마음에도 맞는 환자복이 있을까.
두서없는 생각에 빠져있다가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는 카페 직원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분명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왠지 어딘가 익숙한 곱슬머리의 한 여성이 직원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 커피를 주문했다가 취소하는 모양이었다.
"주문 취소하셨으면 이거 하나 드실래요?"
어딘가 낯설지 않은 그녀에게 서영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
"아니에요, 처음 뵙는 분인데 그건 민폐죠. 괜찮습니다."
서영은 공손히 거절하는 곱슬머리의 그녀에게 이 커피 한 잔을 꼭 주고 싶어졌다.
"아메리카노 2잔 무료 쿠폰을 받았는데 어차피 한 잔씩 나눠 쓰진 못한다 해서 그냥 두 잔 주문했거든요. 제가 이 시간에 커피를 두 잔씩 마시는 사람은 아니라..."
서영은 커피 한 잔을 나눠주기 위해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변명하듯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는 자신이, 오늘 처음 만난 그녀보다 더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그녀가 누구와 참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근심과 잡다한 생각에 사로잡혀 서영은 그만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다음 정류장에 내렸다. 버스가 왔던 방향으로 다시 거슬러 내려오다가 큰길 옆으로 난 좁은 길목에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어귀, 작은 입간판에 쓰인 글자를 보고 그녀는 마치 원래 그곳이 목적지였다는 듯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어 카페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