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이름과 '쉼'이란 말에 혹해 들어가게 된 곳에서 특별한 초대장을 받았다. 카페 주인이 전해 준 빨간 리본이 곱게 묶인 봉투에는 서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혼자 앉아있던 여자 손님이 서영에게 꼭 전해달라 하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날 카페에 들어갔을 때 한쪽 구석에 여자 손님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조금 특별한 카페에 서영님을 초대합니다. 당신의 삶에도 있을 작은 기적을 경험하시겠습니까? 초대장을 받으시려면 YES를 터치해 주세요.>
이름이 적혀 있으니 분명 그녀를 아는 사람일 텐데 도무지 누구인지, 왜 이런 초대장을 이런 방법으로 전달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그 카페는 서영이, 생각에 잠겨 정류장을 잘못 내리는 바람에 거슬러 내려오다 우연히 발견한, 처음 보는 카페였는데? 거기에 서영이 올 줄 어떻게 알고? 미행이라도 했던 것일까. 신기함에 초대장을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며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평소 그녀를 괴롭히던 그런 기분 나쁜 증상이 아니라 설렘이 담긴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바로 전까지도 분명 없던 글자가 초대장을 앞뒤로 돌려보는 그 찰나의 사이에 생겨버린 것이다.
<서영님의 선택을 환영합니다. 종로구 숲 속길 ''플로라의 호수' 끝으로 오세요.>
'내가 언제, 뭘 선택했다는 거지?'
그녀가 초대장 앞뒤를 살피다가 아마 뒤쪽 YES라는 글자를 만졌나 보다. 그렇다고 정말 없던 글자가 생긴다고? 그날 카페에서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말도 안 된다고 소리 내어 말했다가 자초지종을 들은 카페 주인에게 아픈 사람 대우를 받은 일이 생생했다. 꿈은 아니다.
<... 플로라의 호수 끝으로 오세요..>
그 카페 주인의 말대로 이 글자들이 원래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제는 그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서영은 모처럼 주말에 늦잠을 잤다. 이맘때는 항상 뭔가에 눌려 답답한 기분이 들어 깊게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고 주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젯밤 한동안 그 이상한 초대장을 만지작거리다가 한 번 가보기로 결정하고 잠에 곯아떨어진 이후 한 번도 깨지 않고 숙면을 취했다.
그녀는 초대장을 챙겨 집을 나섰다. 꼭대기 층부터 내려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처음엔 불안 증상의 하나로 환청이 들리는가 싶었는데 엘리베이터가 가까이 내려올수록 잘못 들은 게 아님이 확실해졌다. 알루미늄 벽에 부딪히는 둔탁하고 메아리 섞인 소리, 명확하진 않지만 BTS 노래인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서영이 탔다. 택배 기사로 보이는 한 사람이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이어폰 음량을 최대로 했는지 헬멧을 뚫고 소리가 새어 나왔다. BTS가 맞았다.
"커스 아 하하 인 더 다스트 나잇, 소워치미 브링 댓 파 셋 더 나일랏..."
응?
<Cause I, I, I'm in the stars tonight, so watch me bring the fire and set the night alight...>
아마도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처음에는 그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녀였던 그 택배기사는 다른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탔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눈을 감고 음악을 느끼며 고개와 한쪽 발로 까딱 까딱 리듬을 맞추기도 했다. 그녀의 노래는 박자도 엉망이고, 음정은 더 엉망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1층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내리는 사람들을 위해 양 옆으로 길을 냈다. 그 택배 기사는 서영에게 그랬듯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여전히 맞지 않은 음정과 박자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사람들이 낸 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바로 그곳이 그녀를 위한 무대 같기도 했다.
서영은, 세상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이 여자가 적어도 자신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서영은 카페까지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에 타 도착지 주소를 말하는 서영에게 그런 곳은 없다던 기사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어보더니 어? 이런 곳이 있네, 했다. 택시 기사 생활 20년 가까이해오고 있지만 이런 곳이 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던 그는 운전하는 내내 신기해하며 들떠 있는 듯 보였다. 매일 비슷한 경로를 반복하다 완전히 새로운 장소로 가게 되었다는 설렘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일상에서 벗어나 모험이라도 하는 느낌이었을 지도.
"다 왔어요, 아가씨. 그런데 아까 무슨 카페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 아무것도 없는데?"
택시기사의 말에 서영이 창밖 주변을 살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호수와 나무와 숲뿐. 서영은 혹시 잘못 온 것일지 몰라 택시를 잠깐 기다리게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플로라의 호수 끝으로 오세요>
그녀는 초대장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호수 끝이라면 저기?' 그쪽으로 가 보니 멀리 서는 보이지 않던 오솔길이 있었다. 아주 좁긴 했지만 분명 발자국이 있는 길이었다. 그녀는 택시 기사를 보내고 오솔길로 들어섰다. 누가 보낸 지도 모르는 초대장, 신기한 현상들, 알 수 없는 주소. 평소 같으면 이런 상황엔 그냥 초대장을 무시했을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다. 긴장되고 걱정도 되는 상황, 이럴 때가 바로 서영을 괴롭히는 증상들이 그녀를 찾아오기 딱 좋은 그런 때이다. 이런 생각에 미치면 백이면 백 심장이 조이는 듯한 느낌이 찾아오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마도 알 수 없는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컸던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오솔길 끝에 정말 카페가 있었다. 아니, 사실 카페라기보다는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았다. 3월, 초봄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화려한 색감의 정원이 카페를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서영은 조심스레 카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공간을 가득 채운 향기가 서영을 감쌌다. 진한 에스프레소 향 같기도 하고 상큼한 과일 향 같기도 했다. 그 사이로 잠깐씩 아주 은은하게 퍼지는 라벤더 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생동감과 차분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카페 안의 이 향기가 왠지 그녀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심장 박동이 느려졌다. 나른한 평온함이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서영 씨." 향기에 취했던 서영이 카페 주인 지운의 인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카페에 있던 손님들이 서영을 보고 가볍게 인사했다. "어? 그때 병원 화장실..." 서영이 신기하고 놀랍다는 눈빛으로 지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음이 소란스러울 땐 카페 만한 곳도 없다고 했죠? 오실 줄 알았어요." 지운이 다정하게 말했다. "저 말고도 여기 익숙한 얼굴이 또 있을 것 같은데요?" 지운이 이렇게 말하며 창가 쪽에 앉아있는 도훈과 민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병원 카페에서 커피 정말 감사했어요. 오늘은 제가 사야겠는데요." 민서가 반가운 기색으로 서영을 보며 말했다. "그 커피 쿠폰은 제가 드린 거니까 그럼 저도 한 잔 사주시나요?" 도훈이 서영을 쳐다보며 농담조로 말했다. "애초에 그 쿠폰은 저한테 받으신 건데 그럼 저는 도훈 씨가 사주시는 건가요?" 지운의 말에 넷은 모두 함께 웃었다. "서로 알지 못했던 분들이 커피 한 잔으로 연결되었으니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던 그 쿠폰 종이가 제 할 일을 잘 해낸 것 같네요. 인연은 그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될 수 있지만 절대 보잘것없는 것은 없답니다." "뭔가 더 큰 인연이 숨겨져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서영이 지운의 말에 말끝을 올렸다. "글쎄요, 인연은 우리가 모르게 시작될 때가 많아요. 어쩌면 그 커피 쿠폰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미 인연이 시작되었을지 모르죠.” 셋은 혼란스러우면서도 호기심과 설렘이 섞인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초대장을 받고 오신 제 손님들이니 오늘은 제가 살게요." 지운은 웃으며 서영에게 메뉴판을 보여주었다. <초승달 레본밤 차> "저희는 손님 한 분 한 분께 맞춤차를 제공하고 있답니다." 메뉴가 하나뿐인 메뉴판을 보고 궁금해할 서영을 위해 이번에는 지운이 먼저 말했다. "허브차 종류죠? 그런데 왜 초승달인가요? 이름이 독특해요." "초승달 같은 은은한 달빛을 담았다는 뜻이에요. 달빛은 밤하늘을 잔잔하게 비추면서 평온함과 신비로움을 주지요. 레몬밤 차의 부드러운 특성을 달빛에 비유한 것이라 할까요?" "제가 손톤달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차 이름이 마음에 쏙 들어요."
카페 안쪽으로 사라졌던 지운이 손에 레몬밤 차를 들고 다시 나왔다. 상쾌하면서도 부드러운 향기가 조금씩 퍼졌다. 초승달의 은은한 빛을 담았다는 그 특별한 이름이 절묘하게 딱 맞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영은 소중한 무언가를 다루듯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허브맛이 나면서 상큼함이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 같았다. 끝맛에 남는 약간의 단맛이 기분 좋았다.
"레몬밤에 함유된 성분이 신경을 안정시켜 줘요. 불안감을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답니다. 혹시 꽃말이 뭔지 궁금하세요?"
"레몬밤의 꽃말이요? 궁금해요."
"꽃말은 위로와 애정이에요. 레몬밤이 가진 향과 그 효능이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치유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치유라는 말은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서영의 말에 지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영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사실 저는 특히 이맘때쯤이면 삶이 더 버겁게 느껴지곤 해요."
누군가의 희생이 얹어진 삶의 무게가 그녀에게 고통의 심연이 된 지 오래였지만 그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속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서영은 적잖이 놀랐다.
"어쩌면 그 레몬밤 차에 마음속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신비의 힘이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죠."
서영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지운이 말했다. 그리고 어떤 아픔은 마음속에 묶어두지 말고, 밖으로 꺼내어야만 흘러가기도 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전에 병원에서 만났을 때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솔직히 그때 좀 당황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지나간 일은 그냥 지나가게 두는 것이 나을 때도 있어요. 스트레스와 불안도 함께 흘러가 버릴지 모르니까요, 머무는 게 아니라."
서영은 이제야 정확히 기억났다. 그때 병원에서 따뜻한 목소리의 간호사가 건네었던 말.
<스트레스와 불안이 그냥 지나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르죠, 머무는 게 아니라>
서영은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몽글몽글 마음속 조명이 켜진 듯 따스하고 아늑한 이 느낌.
"그게 바로 행복 아닐까요?"
이번에도 지운은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 이렇게 말하며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레몬밤의 꽃말 기억하시죠? 그 꽃말과 어울리는 선물이 있는데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지운은 책장 쪽으로 서영을 안내했다. 그리고 미리 자리를 외워두기라도 한 듯 고민 없이 책을 한 권 뽑아 들었다.
<책들의 부엌>
"북 카페를 배경으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의 치유와 성장을 담은 따뜻한 이야기예요. 바쁘고 지친 일상 속에서도 위로와 안정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영 씨에게도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해 줄 것 같아요."
"마치 이곳처럼요?"
"이곳에서 이미 긍정의 에너지를 받으셨다면... 네, 이곳처럼요."
서영의 물음에 지운이 웃으며 답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희미하게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려왔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창밖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서영이 들어올 땐 분명 봄과 여름의 어느 사이쯤으로 보였던 화려한 정원이 어느새 하얀 눈으로 가득 덮였다.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눈부신 빛이 되어 서영을 비추었다.
서영은 왠지 이곳이 좋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에 다시는 올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