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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Sep 19. 2024

[제18화] 작가지망생이라고 무시하지 마

천상 T와 지극히 F인 그들의 끝나지 않는 싸움

<띠리릭>
 전자음이 맥없이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혜주는 놀라 잠에서 깼다. 남편이 출근했나 보다. 아무리 피곤해도 웬만하면 출근할 때 문 앞에 서서 배웅하는 것 정도는 꼭 지키려고 하는 그녀였는데 오늘 그만 늦잠을 자버렸다. 어젯밤 퇴근이 너무 늦어 밤잠을 설친 탓이다. 누가 들으면 남편과 꽤나 사이가 좋은 젊은 부부쯤으로 생각할 테지만 혜주와 남편은 결혼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중년 부부다. 이제는 서로 데면데면 지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상이 되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데면데면하지 않았던 때가 있기는 했던가? 그래도 그녀는 아내로서 최소한의 할 도리는 하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삶이 원래 어느 정도의 노력은 다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이를 닦고, 얼굴에 물을 대는 둥 마는 둥 형식적인 세수를 마쳤다. 잠옷을 개켜놓고, 어제 입었던 베이지색 면바지에 아이보리색 니트를 매치했다. 원래는 흰 티셔츠를 입을 참이었는데 목 부분이 좀 늘어난 티셔츠를 보는 순간 왠지 우울해진 탓에, 몇 번 세탁하지 않아 아직은 쫀쫀한 니트로 결정한 것이다.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어도 빈티지 패셔니스타가 되는 사람은 전생부터 정해져 있다고 믿는 그녀다. 물론 그녀는 이에 해당사항이 없다.

 물통에 물을 반 정도 채운 후 원하는 캡슐을 신중하게 골라 넣고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눌렀다. 조용한 주방에 갑자기 활기가 돈다. 물이 고압으로 캡슐을 통과하며 특유의 소리를 냈다. 그 소란함이 혜주의 하루 시작을 알리는 알람 소리이다. 모든 출근 준비가 끝났다. 투명컵에 커피가 채워졌다. 컵을 들어 크레마를 살짝 입에 물며 혜주는 작업실에 가 앉았다.
 출근 완료.



작업실이라고 해 봐야 안팎을 구분해 주는 칸막이도 없이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 하나가 다이긴 하지만 혜주에겐 소중한 공간이다. 긴 책상의 한쪽에 앉으면 작업실, 그 반대편에 앉으면 식탁 내지는 쉼의 장소가 된다. 한쪽에 앉으면 출근, 다른 한쪽에 앉으면 퇴근인 셈이다. 전에 우연히 한 소설가의 일상을 인터뷰한 tv 프로그램을 보고 아이디어가 참신해 따라 해 본 것이다. 도대체 너의 꿈은 언제 이루어지냐며 이젠 대놓고 면박을 주는 남편 때문에 작업실 명목으로 쪽방이라도 얻고 싶었지만 그녀는 아직 그럴 만한 돈도 직업도 없다. 학부모가 갑질을 했다는 이유로 잘 다니던 국어 학원을 대차게 때려치운 이후 학원이라는 곳에 다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벌써 몇 년째 무직 상태다.
 학원을 그만두고 나올 때에는 그녀의 오랜 꿈인 작가가 금방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동안은 하는 일이 있어서 올인하지 못했던 탓이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마음 먹는다는 것'에 거드름을 피운 적도 있었다. 어디서 그런 터무니없는 자만심이 생겨났는지. 그때 생각을 하다 보니 혼자 있는 방 안에서조차 얼굴이 화끈거리고 귀가 뜨거워졌다. 남편한테 학원 때려치우고 작가 하겠다고 큰소리친 것이 벌써 언제 적 일이었던가. 그러니 가끔씩 은근한 무시가 깔려있는 남편의 말도 이제는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며칠 전 그 일이 혜주는 생각할수록 속상했다.
 
 지난주, 혜주가 투고한 출판사로부터 답메일이 왔다. 이번엔 뭔가 다른 느낌이었기에 은근 기대를 하고 있던 곳이었다. 그녀는 땀으로 자꾸 축축해지는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으며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OOO 출판사입니다. 보내주신 원고 잘 읽어보았습니다. 주인공의 이야기가 흥미롭고 독창적이지만 저희 출판사의 출판 계획과는 맞지 않아 아쉽게도 이번에는 출판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안녕하세요? 작가님'으로 시작하는 이 메일을 보낸 출판사는 원고를 정말 끝까지 읽어보긴 한 것일까. 하다못해 작가의 성씨나 작품 속 주인공의 이름조차 들어가 있지 않은 내용. 투고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말로 복붙 한 느낌의 이런 메일은 부정적 피드백 중에서도 정말 최악이다. 적어도 '이 작가' 혹은 '주인공 은영의 이야기' 정도까지만이라도 써 주어야 하지 않을까. 밤낮이고 한동안 그 하나만 생각하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작가, 아니 그 원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그런 것이다.

 은근 기대했던 곳이었기에 혜주는 허탈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시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남편, 나 이번엔 꼭 좋은 소식 전하려고 했는데 또 물 먹었어. 저녁에 맥주 한 잔 할까?>
 <내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뭐랬어? 그거 재미없다고 했잖아.>
 그리고 오늘 야근이라 맥주는 안 되겠다는 문자가 이어 도착했다. 곁에 있었다면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저 말투. 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어서 혜주는 더 화가 났다. 남편도 어찌 보면 독자이니까. 하지만 요즘 변화하는 트렌드와 자신의 글이 조금 다른 분위기인 것일 뿐, 자신의 글을 좋아해 줄 독자들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그녀는 믿고 있다. 운이 없어 아직 세상에 나아가지 못해 그들이 잘 모르고 있을 뿐.



 급변하는 세태에 발맞춰 가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시대를 아우르는 문학의 경우는 조금 달라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남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항상 첫 번째 독자이기도 한 그이기에 날카롭게 깨진 얼음 조각에 혀를 베인 듯 기분이 언짢았다. 남편의 이런 언행은, 최고의 반전 하나 때문에 흥행한 영화의 상영관 앞에서 반전의 결과를 냅다 불어버린 것보다 더 괘씸한 일이다, 그녀에게는.


 그날 저녁 느지막이 퇴근한 남편에게 혜주가 한 마디 했다.
 "와이프가 속상해서 맥주 한 잔 하자는데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
 "내가 뭘? 맥주 한 잔 하자길래 야근해서 안된다고 한건데?"
 시우는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맥주 한 잔 하자는 의미가 그게 아니잖아."
 "그럼 표현하고 싶은 걸 직접 말로 하면 되지, 왜 맥주를 먹자고 해?"
 "아니, 그게... 휴, 됐다 됐어. 내가 당신한테 뭘 바라겠어."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래서 뭐? 하고 싶은 말을 해."
 "됐다고!"
 매번 이런 식이다, 천상 T인 남편과 지극히 F인 아내의 대화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신춘문예 공모전 실패도, 투고한 작품이 반려되는 경우도 여러 번 겪다 보니 이제는 좌절이 오히려 익숙 해질 정도가 될 즈음, 한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신인 작가 발굴전에 지원할 원고를 남편에게 보여준 다음 날이었다.
 "남편, 올해 신인작가 발굴전에 낼 소설 읽어봤어? 내가 진짜 열심히 쓴 건데."
 "언제는 열심히 안 썼다고 한 적 있나?"
 "읽어보긴 한 거지? 재미있어? 솔직하게 말해줘."
 꼭 저렇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일인가 싶어 속이 상했지만 그녀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솔직히 재미는 없어. 요즘 잘되는 소설 안 읽어 봤어? 트렌드를 잘 읽고 분석해 봐. 그래야 투고하는 것마다 왜 자꾸 미끄러지는지 알지."
 "그렇게 영 아니야?"
 같은 말을 저렇게 정 떨어지게 하는 것도 재주다, 라는 생각을 하며 혜주가 화를 꾹 참고 다시 물었다.
 "전혀 대중적이지 않아. 캐릭터들도 너무 비현실적이고. 그리고 소설은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은 그냥 기기기기야. 도대체 승전결은 언제 나와?"
 소설은 원래 비현실적인 세상도 그릴 수 있다고, 캐릭터들이 그 소설 속 세계 안에서 얼마나 일관성 있게 행동하느냐가 관건이라고, 그리고 기승전결은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이고, 큰 갈등이나 극적인 전개 없이도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요즘 트렌드 운운하면서 그것도 모르냐고, 그녀는 반박하지 않았다. 아내가 작가적 재능이 없다며 은근히 무시하는 이 남자.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그녀의 작가를 향한 열망을 은근히 경시하는 태도가 저변에 깔려있는 남자. 그런 남편에게 그런 반박을 해 봐야 소용없을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그리고 필명도 너무 식상해. 난 독자의 입장에서 말한 거야. 솔직히 얘기하라며? 그래야 너도 발전이 있지."
 굳어지는 혜주의 얼굴을 보며 시우가 덧붙였다.
 "내 필명이 어때서? 숲의 서재, 편안하고 좋은데? 당신은 매사에 논리적이서 참 좋겠다."
 이렇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 혜주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아니, 솔직히 얘기해 달라고 해서 독자로서 솔직한 평을 한 것뿐인데 뭐가 문제지? 그럼 거짓말이라도 했어야 하나?"
 방 밖에서 분노가 실린 시우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서도,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그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여하튼 그 맥주 한 잔 하자는 별것 아닌 말에서 비롯되어 별것이 된 그 일 때문에 혜주와 시우는 서로 마주쳐도 못 본 척 말을 섞지 않은 지 벌써 며칠째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불편한 혜주가 남편과의 화해를 위해 오늘 장을 볼 때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수박을 반 통 사 왔다. 자연스럽게 수박 얘기를 하며 대화의 물꼬를 터 보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쯤 시간이 지났으니 남편도 그날의 맥주 사건을 또 들먹이진 않을 것이다.
 퇴근하는 남편의 겉옷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 들며 그녀가 말했다.
 "오늘 마트에 갔는데 수박이 있더라. 수박 반 통 사 왔어. 밥 먹고 같이 먹자."
 "수박?"
 "응,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잖아."
 "지금은 수박 철이 아닌데 비싸게 주고 샀겠네."
 "예전처럼 귀한 것도 아니고, 요즘은 다 하우스 재배가 가능해서 그렇게 비싸지도 않아."
 혜주가 점점 굳어지는 표정을 감추려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제철보다는 비싸지. 맛도 제철만큼 좋지 않고."
 기껏 생각해서 사 왔더니 말본새 하고는.
 '너 잘났다.'
 혜주가 이 말을 속으로 삼키며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당신 생각해서 사 온 거잖아. 나는 수박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수박도 제철에 먹는 게 낫지. 지금은 한라봉이나 딸기가 제철 아닌가?"
 " ... "
 "싸고 맛있는 제철 과일을 먹는 게 훨씬 경제적이잖아. 평소에도 경제관념을 가져야지."
 화를 꾹꾹 눌러 담느라 말을 삼키는 아내가 할 말이 없어 말을 못 하는 줄 알고 남편이 덧붙였다.
 "내가 오늘 화해를 위해서 일부러 당신 좋아하는 걸 사 왔잖아. 그럼 그냥 못 이기는 척 고마워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 아냐?"
 "난 그냥 현실적인 얘기를 한 거야. 제철도 아니라 비싼데 맛도 별로 없는 과일을 사 오는 건 여러모로 낭비잖아."
 그놈의 제철, 제철, 제철. 누가 천상 T 아니랄까 봐!
 화해를 위해 그냥 남편이 좋아하는 수박을 사 왔을 뿐인데 겨우 수박 반 통에 경제관념이 없어진 혜주는 아무래도 이번에 생긴 앙금은 꽤 오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또다시 말다툼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 다툼의 화해를 위한 장에서 또 다른 새로운 싸움의 장이 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아내는 남편의 무심한 태도에 상처를 받았고, 남편은 아내의 감정적 반응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스럽다. 매번 다른 상황임에도 항상 비슷한 형식의 다툼이 도돌이표처럼 이어진다.
 참 희한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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