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이 있어 아침 일찍 남편이 출근한 주말 아침, 혜주는 오랜만에 주말 분위기도 낼 겸 혼자서라도 가까운 카페에 나가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혜주가 가려고 했던 곳은, 집 근처에 얼마 전 문을 연 작은 카페인데 그곳 딸기 케이크가 맛있다고 벌써 입소문이 나서 주말이면 웨이팅 줄이 꽤 된다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혜주는 가끔 거실 작업실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 가서 글을 쓰곤 하는데 그곳은 대부분 카페다. 향긋한 커피가 있고, 적당한 백색 소음이 있어 자판을 누를 때 눈치 보이지 않으면서 노트북 작업을 하기에 적당한 높이의 테이블과 오래 앉아있어도 허리가 편한 의자가 있는 외부 장소. 그래서 혜주는 종종 카페를 찾곤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주말에는 한산하고 조용한 카페를 찾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녀는 커피를 내려 거실 작업실에 앉았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했다. 눈이 부셔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그 나른한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온화하고 평온했다.
오늘은 지난번에 남편의 혹평으로 자존감을 잃은 그 원고를 다시 읽고 다듬을 예정이다. 신인작가 발굴전에 지원하면서 원고는 이미 보냈지만 혹시라도 긍정의 피드백이 온다면 수정된 원고를 가지고 출판사와 다시 논의를 하면 될 일이었다.
그때 현관문 쪽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띡띡띡띡 띠리릭>
그녀의 평안도 끝났다.
출근한 지 50여 분쯤 지났으니 남편일 리 없고, 시간대를 보아하니 분명 시어머니, 명숙일 것이다. 명숙은 반찬을 해다 준다는 이유로 아무런 사전 연락 없이 한 달에도 몇 번씩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른다. 겉으로는 혜주가 시우의 입맛을 잘 맞추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지만 내심 며느리가 잘하고 있는지, 내 아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임을 혜주도 모르지 않는다.
언제든 자연스럽게 울릴 수 있는 '띡띡띡띡 띠리릭', 잠금해제 되어 곧 현관문이 열릴 것임을 알리는 이 소리가 '내가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걸 잊지 마'라고 경고라도 하는 것 같아 혜주는 간담이 서늘했다. 이 소리는 10년 넘게 아직도 적응 중이다.
'"너 집에 있었니?"
명숙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혜주의 작업실은 그녀의 집 거실에 있다. 그녀는 매일 거실로 출근을 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는 말이다. 명숙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벨을 누르는 대신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손님이 아니라 이 집안의 명백한 일원임을 며느리에게 매번 깨닫게 해 주기 위함일 것이라고 혜주는 늘 생각했다.
"니들 좋아하는 반찬 많이 해왔다. 버리지 말고 다 먹어."
튼튼해 보이는 쇼핑 봉투 두 개를 힘겹게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명숙이 말했다. 한쪽 쇼핑 봉투에 들어있던 큰 통 세 개 중 두 개는 깍두기, 하나는 멸치볶음이었다. 명숙은 망설임 없이 깍두기 두 통을 오자마자 김치냉장고 안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남편 시우와 달리 혜주는 익지 않은깍두기는 먹지 않는다. 명숙이 멸치볶음을 냉장고에 넣었다. 혜주는 멸치 반찬을 좋아하지 않는다.
"반찬 그만해오시라니까, 시우 씨 바빠서 요즘 집에서 밥도 잘 못 먹고, 지난번 반찬도 남았어요, 당분간 반찬 해오지 마세요, 어머니."
"남은 반찬은 내가 가져가마. 새로 한 반찬 먹으면 너도 좋지, 안 그래?"
" ... "
"이 반찬들이 마음에 안 들면 다음엔 원하는 걸 말해봐, 그걸로 해다 줄 테니."
불혹이 넘어가면서 늘은 것이 있다면 거절의 기술이다. 상대방의 기분을 최대한 상하지 않게 상냥하게 거절하는 법, 그런데 이게 명숙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하나를 얘기하면 항상 그다음, 그다음의 또 그다음까지 대안이 준비되어 있어 말로는 명숙을 이길 재간이 없다.
그런 명숙이 웬일인지 오늘은 분위기가 좀 달랐다.
"저기 있잖냐..."
명숙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둘 사이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는 듯 명숙의 눈동자가 길을 잃고 사방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뭔가 불안하다. 명숙이 이런 식으로 뜸을 들일 때에는 대부분 목돈이 들어가야 하는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돈은 명숙의 하나뿐인 아들 시우의 몫이고, 명숙은 꼭 그런 일을 며느리 혜주에게 먼저 운을 띄우곤 한다.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어머니?"
"아니, 우리 동네 그 정훈이네 엄마 있잖냐..."
"아, 그 삼수인지 사수인지 해서 9급 공무원에 붙었다는 그 정훈이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정훈이가 이번에 제 엄마 건강검진을 받게 해 줬다는데 그게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모든 병을 그냥 싹 다 찾아낸다네. 한 2박 3일 입원해서 받는다나봐."
"그렇게 받으면 꽤나 비쌀 텐데요."
"엄마 나이도 있고 하니 아들이 한 번 속 편하게 싹 시켜주는 게지. 정훈이네 엄마는 나보다 거의 10년이나 젊은데..."
"10년이 아니라 어머님이 7년 더 위이신 거죠."
"그거나 그거나."
명숙은 몇 년 안 되는 숫자까지 따져 말하는 혜주가 너무 서운해 밉상처럼 느껴졌다.
혜주는 명숙이 왜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시어머니가 직접 어렵사리 부탁을 하는데 감히 며느리가 대놓고 거절할 수 있겠냐는 계산된 심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다. 천상 T인 시우에게서는 명숙이 듣고 싶어하는 그 말을 쉽게 들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T인 아들 뒷바라지가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명숙이 안쓰러워졌다.
말과는 달리 명숙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오랜 걱정거리가 사라진 듯 급 활기가 돌았다. 럭셔리한 정밀 건강 검진을 받게 되었다는 기쁨보다는, 비싼 건강검진을 핑계 삼아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을 정훈 모에게 이제 명숙도 할 말이 생겼다는 것,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는 2박도 필요 없다, 1박 2일짜리도 괜찮아."
그러고 보니 혜주도 건강검진을 받은 지 한참이 지났다. 3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는 6개월마다 꼬박꼬박 건강검진을 받기로 스스로와 약속한 것이었는데 재작년, 그녀의 자존감을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던 닥터 갑질 사건 이후, 그녀는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다. 하락한 그녀의 자존감에 처방전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몇 년 전 혜주는 왼쪽 가슴에 엄지손톱만 한 멍울이 생긴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동글동글한 것이 만질 때마다 요리조리 움직여 다니는 게 크게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정신없이 수소문한 끝에 한 여성 병원을 찾았다.
"없던 게 만져졌으니 놀라고 걱정도 많이 하셨겠네요. 6개월마다 요 녀석이 크는지 아닌지 추적 관찰은 하는 게 좋겠지만 별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요렇게 매끄럽고 잘 움직이는 녀석은 예쁜 아이거든요."
걱정스러운 마음 달랠 길은 오늘 바로 괜찮다는 진단을 받는 것뿐이었으므로 그것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 늦은 오후, 동분서주했을 환자를 배려해 의사가 말했다. 혜주의 요동치던 심장도 그제야 안정을 찾았다.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예쁜 의사였다. 멍울이 별것 아니긴 했지만 그때부터 혜주는 6개월마다 꼭 건강검진을 받으러 다녔다. 다른 건 몰라도 유방암 검진은 특히 더 그랬다.
재작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그 병원에 유방암 정기검진을 갔던 때가.
검진 때마다 혜주가 찾아갔던 그 의사가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그녀가 담당했던 환자들이 떠맡겨지듯 다른 진료실 의사들에게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그때 병원을 옮겼어야 했는데 당시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그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후회를 하곤 한다. 정기검진일이 가까웠는데 의사가 바뀌면서 기존 예약 환자들 뒤로 새로 예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혜주는 별다른 생각 없이 예약이 가장 빨리 되는 의사를 선택했다.
바뀐 의사에게 처음으로 유방암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던 날.
"다 됐어요, 일어나세요. 별거 없네."
초음파를 보려고 자리를 잡고 누운 지 채 1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의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건성으로 말했다. 예전 의사는 매번 담당하는 환자였음에도 항상 처음 보는 것처럼 꼼꼼하게 자세히 봐주어서 혜주의 마음이 한결 편했었는데 새로 바뀐 의사는 초음파 젤이 제대로 발라지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냥 끝내버렸다.
"제가 왼쪽에 멍울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번 선생님이 6개월마다 추적 관찰을 요하셨던 건데 이전 진료 기록은 다 전달받으신 거죠?"
무책임해 보이는 의사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혜주가 확인하듯 물었다.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데요? 암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걔도 지가 붙어있을 만한 곳을 찾는거지, 도대체 암덩어리가 어디 들어가 앉을 데가 있어야지, (하도 작아서...)"
혜주가 미심쩍어하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 의사는 뭉근한 무시와 조소를 담아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순간, 옆에 있던 간호사가 자신도 모르게 '풉'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몸을 돌렸다. 의사의 제일 마지막 말은 그가 초음파실을 나가면서 혼잣말하듯 던진 것이라 혜주는 정확히 듣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정확하게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제대로 들었다고 한들 의사를 불러 따져 묻기도 상당히 난감한 일이긴 했을 테니 말이다.
내일은 바쁜 남편을 대신해 혜주가 명숙과 함께 대학 병원에 가는 날이다. 명숙이 다녀간 그날, 혜주는 시우와 의논을 하고, 그들의 형편에 맞추어 명숙에게 1박 2일 건강검진을 제안했다. 명숙이 애초에 건강검진을 받고 싶다고 했던 -정훈 모가 건강검진을 받았던- 그 병원으로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었으므로 그녀도 아들 며느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혜주는 지금 마음이 무겁다. 시우도 아마 그럴 것이다.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일부러 그쪽 근처로는 가지 않으려 노력했던 곳. 그곳을 혜주는 내일 가야 한다. 어쩌면 시우는 바쁜 일을 핑계 삼아 그곳에 가는 일을 피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혜주 안에서 뛰고 있는 또 다른 작디작은 심장을 처음 느꼈던 그날. 어린 시절 하도 열심히 닦아 얼굴이 비칠 정도로 광이 나던 아빠의 구두 앞코만큼이나 매일매일이 반질반질 둥글게 흘러갈 줄만 알았다.
혜주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창을 활짝 열었다. 새벽 공기는 한겨울만큼이나 매서워 코끝이 시렸다. 벌써 저만큼 넘어가버린 달이 마지막 제 빛을 토해내며 새벽의 칠흑 같은 어둠을 고요히 감싸 안았다.
새벽 3시에서 4시로 가는 시각, 이 시간에도 간간이 보이는 자동차들. 저들은 긴 하루를 끝낸 이들일까, 아니면 시작하는 이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