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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Sep 26. 2024

[제20화] 사라진 크리스마스이브

그해 겨울 별이 된 희망

 그해 겨울은 혜주에게 유난히 더 길고 혹독한 추위를 몰고 왔다. 예정일을 3개월 정도 앞두고 몸에 이상이 생겼다. 혜주도 시우도 그렇게 기다리던 소중한 아이가 결혼 4년 만에 드디어 처음 찾아왔는데 겨우 7개월 조금 지나 아픈 소식을 전한 것이다.

하루하루 간절함으로 기다리던 4년의 시간. 오랜 기다림 속 간절함이 가슴 깊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 무게에 눌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갈 무렵 그들에게 희망이가 찾아왔다. 희망이는,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아이가 그들의 희망이라는 의미로 혜주가 뱃속 아이게게 지어 준 태명이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주말을 보낸 다음날 아침, 예정일이 3개월 가까이 남은 태에서 혜주는 남편과 함께 급히 산부인과로 향했다. 전날 오후, 핑크빛의 옅은 피가 밤이 되니 선홍색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어? 이게 왜 보이지? 보이면 안 되는 건데..."

의사의 말에 혜주는 갑자기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지난주에 봤을 때 아주 건강하게 정상이었는데? 엄마 여기 보세요, 여기 이렇게 뭐가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죠?"

뭐가 보인다는 것인지 당최 모르겠지만 혜주는 그냥 정신없이 네, 라고 대답했다.

"원래 안 보여야 하는 건데 저게 보인다는 건 태아 뱃속에 지금 물이 차 있다는 말이에요."

"뱃속에 물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혜주는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울상이 되어 물었다.

"다행히 임신 후기로 들어섰기 때문에 예후가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우리 병원에서는 출산이 안되고, K 병원으로 트랜스퍼하는 게 좋겠어요. 잠시만요."

하더니 의사는 바로 연계된 상급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7개월 2주 차 태아 HN이나 OU 의심됩니다. NIPT 정상이었어요. 네, 전혀 증상 없었습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혜주는 희망이에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눈에서 맑은 물이 차올랐다. 앞이 흐려지더니 이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밑으로 뚝 하고 떨어졌다. 혜주는 시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날 바로 상급종합병원으로 옮겨 진료를 받았다. 초음파를 비롯해 여러 가지 검사도 다시 했다.

"복수가 차서 빨리 낳으셔야 돼요. 안 그럼 아기 위험할 수 있어요."

"네? 오늘 낳는다고요? 낳으면 아기는 괜찮아지나요?"

"8개월 다 되어 늦게 증상이 생겼으니까 예후가 좋을 거예요."

희망이의 상태가 정말 대수롭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더 절박한 환자들을 인이 박히도록 봐와서 무뎌진 것인지 의사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단조롭게 말했다.

"신생아전문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건 아닐까요?'

"아기 나오면 호수 꼽아서 물만 뽑으면 되는데 뭘 그렇게 까지..."

시우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의사는 유난을 떤다는 듯 차가운 투로 말을 하다 그나마도 끝을 잘라먹었다.

그 이후 어떻게 상황이 진행되었는지 혜주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갑자기 환자처럼 침대에 눕혀졌고, 굵은 바늘에서 얇은 바늘까지 각종 바늘이 혜주의 팔을 몇 번씩 뚫었고, 얼마 후 침대 옆에 줄줄이 무언가를 달고 수술실로 실려갔다. 병원 천장의 형광등 빛이 움직이며 서로 뒤섞였다. 이동 중인 침대만큼이나 천장의 불빛도 빠르게 흘렀다.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는데 혜주의 시간만 멈추었다. 주변이 무척 소란스러웠는데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시우는 초조한 마음으로 수술실 앞을 서성거렸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수술실 안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곧 문이 열렸고 의사들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다 비켜요, 저리 비켜!"

앞서 나오는 의사들이 사람들을 밀치고 인큐베이터가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들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순간의 소란스러움이 지나간 직후, 정적은 시우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그는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고, 그 작은 투명 보호막 안에 있는 아기가 희망이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복강 내 출혈... 지혈 안돼... BP가 계속 떨어져... 쇼크 위험... 자가호흡 안돼...

병실로 온 혜주는 간간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제야 눈을 제대로 뜨고 정신을 차렸다.

"산모분, 일어나세요, 계속 잠들면 안 돼요, 이제 눈 뜨세요."

수술실 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던 회복실에서 누군가, 마취가 덜 깬 혜주의 어깨를 세게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간신히 눈을 뜨고 간호사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없다. 그리고 다시 깨어보니 병실이었다. 의사가 나가고 시우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넓은 등이 눈에 띄게 들썩였다.

조금 전 혜주가 정신을 차리며 띄엄띄엄 들었던 그 무서운 말들이 희망이 얘기였단 말인지. 그러니까 물을 빼기 위해 바늘을 꽂았는데 물이 아니라 피가 나왔다는 말이고, 현재도 피는 멈추지 않았다는 말이고, 혈압이 떨어져 쇼크의 위험이 있고, 호흡기 없이 스스로는 숨을 쉬지 못한다는 말이라고?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직 지독한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혜주는 몽롱한 목소리로 시우를 불렀다. 들썩이는 시우의 뒷모습은 그녀의 착각이었기를, 시우가 밝은 미소로 돌아봐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한 그가 급히 옷소매로 얼굴을 닦고 혜주를 돌아보았다. 혜주의 간절함이 찰나에 무너져 내렸다.

숨죽인 시우의 어깨 위로 슬픔과 고통이 내려앉았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병실 밖 어디선가 희미하게 캐럴 소리가 들려왔다.




 명숙이 혜주의 어깨를 탁탁 두 번 두드리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물었다.

아픈 옛 기억에 사로잡혔다 명숙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혜주는 병원 복도에 서 있었다. 예전엔 그냥 텅 빈 삭막함 뿐이었는데 지금은 하얀 벽 위에 그림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그중 혜주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아픈 기억을 떨쳐내려 그림 감상에 집중했는데 하필 이 그림 앞에서 고통스러운 옛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왜 여기 서 있는 거야? 한참 찾았네. 입원실은 나 화장실 들렀다 가자."

명숙이 이렇게 말하며 자리를 떴다. 혜주가 안 좋은 생각을 지우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음 그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그림과 그림 사이 빨간 리본 봉투를 발견했다. 처음엔 그것도 전시 작품의 일부인 줄 알았으나 봉투 위에 선명하게 적혀있는 자신의 이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좀 전엔 분명 없던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을까.



 다른 그림들은 다 액자 안에 들어가 있는데 그 빨간 리본 봉투는 누가 급히 붙여놓고 가기라도 한 듯 한 귀퉁이만 위태롭게 벽에 붙어있었다. 혜주는 조심스레 봉투를 떼어내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름을 한 번 쓸어보았다. 순간이었지만 살짝 열린 봉투 안쪽에서 밝은 빛이 잠깐 비추었던 것도 같다. 혜주는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혜주 님 인생의 작은 기적을 원하신다면 종로구 숲 속길 ''플로라의 호수' 끝으로 오세요.>

이 초대장은 누가 붙여놓은 것인가.

왜?

플로라의 호수?

이 신비한 초대장은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혜주는 호기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제 병원에서 가져온 이상한 초대장에 관해 출근 준비하는 시우에게 말했다.

"진짜 처음엔 없었어. 갑자기 생긴 거라니까?"

"그게 말이 돼? 원래 없던 봉투가 갑자기 나타난다는 게?"

시우가 별 시답잖은 말을 다 듣겠다며 혜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셔츠의 단추를 잠갔다.

"그림 감상 중이었거든. 진짜 처음엔 없었던 것 같은데..."

"거기 가니까 그 기억 때문에 스트레스받았나 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주말에 한 번 같이 가보자."

혜주의 말에 시우가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 주말 반납인 거 잊었냐며 핀잔을 주었다. 오늘도 그를 대신해 명숙이 있는 병원에 가는 이는 혜주인데 시우는 그것을 잊었나 보다.


 혜주는 명숙과 함께 입원실을 나왔다. 명숙은 어제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별 걱정은 하지 않는다 했지만 그래도 정밀 건강검진이라 혹여 이상이 있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던 그녀였다. 다행히 대부분의 검사 결과가 양호한 덕에 명숙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혜주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저만치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혼자라면 뛰어가서 잡았겠지만 혜주는 명숙과 함께 여서 그냥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했다. 그런데 닫힌 줄 알았던 엘리베이터 문이 그들 앞에서 다시 열렸다. 안에서 한 남자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살짝 지은 온화한 미소가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노신사였다. 혜주는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죄송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바쁜데 나까지 챙겨줘서 고맙다. 신경 많이 썼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명숙이 다정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있는 좁은 공간 안에서 그녀는 며느리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는 인자한 시어머니이고 싶다.

'"아니에요. 어머니 건강이 중요하죠. 검사 결과도 좋으니 마음 편히 가지세요.”

혜주도 사람들 앞에서 시어머니를 살뜰히 보살피는 착한 며느리이고 싶다.

아직 엘리베이터 안인데 혜주의 전화벨이 울렸다. 좁은 공간 안에서 퍼지는 벨소리는 생각보다 더 요했다.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그 있잖니, 하얀 도화지에 물감 막 짜서 반으로 딱 접어 붙여서 같은 모양...>

"데칼코마니, 데칼코마니."

요즘 단어를 자꾸 깜박깜박하는 엄마의 말을 끝까지 다 듣지도 않고 혜주가 볼멘소리로 답했다.

"엄마는 진짜, 여기 엘리베이터 안인데."

혜주는 좁은 공간 안에 울려 퍼진 전화벨소리가 마치 자신의 민낯이라도 들킨 것처럼 민망해져 엄마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  

<나쁜 기집애, 너도 내 나이 돼 봐라, 끊어.>

하더니 엄마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걸 새도 없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명숙이 비타민D를 처방받은 것이 있어 다시 원무과에 들려야 했다. 혜주가 원무과로 가는 중 한 여자가 다급하게 화장실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에는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이 놓여있었고, 혜주는 그 휴대폰을 들고 그녀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갔다.

"괜찮으세요?"

혜주가 노크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네, 괜찮아요. 종종 있는 일이라서요."

그녀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 혜주는 조용히 그녀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걸 떨어뜨리신 것 같아요."

힘겹게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혜주는 한 마디 덧붙였다.

"진짜 괜찮으신 거죠?"

"네, 정말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더 이상은 그녀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혜주는 휴대폰을 건네주고 화장실을 나왔다. 우연히 화장실 입구 쪽에 걸려있던 그림 액자를 보고, 혜주는 그 이상한 초대장이 붙어있던 장소에 한 번 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앉아있는 명숙이 빨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혜주는 초대장이 붙어있던 장소가 아니라 초대장에서 부르는 곳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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