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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Sep 29. 2024

[제21화] 카페; 가슴을 울리는 멜로디

또 다른 크리스마스

혜주는 오늘 그 이상한 초대장에 적혀있던 플로라의 호수에 가보기로 했다.

"오늘 거기 가보려고 하는데 정말 같이 갈 시간 안돼?"

출근 준비에 한창인 남편의 아침 식사를 챙기면서 혜주가 시우에게 한 번 더 물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시우는 거기가 어딘지 기억도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시우는 거기가 어디냐고 묻는 대신 시간이 안된다고만 말했다. 서운했다. 한 마디 더 하면 또 싸움의 발단이 될 것 같아 혜주는 아침 식사 준비에 집중했다.



 오늘 아침 메뉴로는 시우가 좋아하는 감자전을 만들어 보았다. 곱게 갈아서 얇게 부쳐주면 시우가 군말 없이 잘 먹는다. 겉은 바삭하면서 속은 쫄깃한 식감도 좋고, 다른 추가 음식 없이 그것 하나로도 영양가 있는 아침 식사가 되니 부담도 없다.   

"감자전 맛있지? 꼭 고구마 같아."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함께 아침을 먹으며 혜주가 시우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고구마를 먹지. 감자를 먹으면서 고구마라고 하긴. 개한테 고양이 같다고 하면 되겠어?"

시우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어떻게 말을 해도 저렇게 얄밉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가 혜주도 시우의 실소에 덩달아 같이 웃었다. 오랜만에 함께 웃어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늘 플로라의 호수에 혼자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에서 내려, 호수 끝 좁은 숲길을 홀린 듯 걸어 들어갔다. 짙은 녹색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내어 준 신비한 길이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어디선가 희미하게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혜주에게 크리스마스이브가 사라진 그날부터 그녀가 의식적으로 멀리했던 그 소리. 캐럴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 길 끝에 다다르자 혜주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은 너무 이른 봄에 한여름의 녹음이 우거진 길을 방금 걸어왔는데 갑자기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한겨울의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곳에 마치 동화 속 예쁜 집처럼 생긴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페 앞에 서니 캐럴 소리가 더욱 커졌다. 찬란한 조명이 지붕을 타고 내려앉았다. 다채로운 장식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다양한 빛을 내며 눈부신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그해 겨울 이후 혜주에게 크리스마스는 고통이자 절망이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애써 마음속에서 지우며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혜주는 추운 줄도 모르고 카페 앞에 서서 크리스마스를 마주하고 있다. 그 아픈 기억을 마주하고 있다. 그녀의 삶에서 크리스마스를 통째로 앗아갔던 그 기억을 정면으로.




혜주가 카페 문을 열었다. 맑은 종소리가 따뜻하게 그녀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혜주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카페 주인 지운이 반갑게 인사했다.

"저를 아세요? 제 이름은 어떻게..."

"초대장을 드린 사람이라고 해 둘까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지운이 말했다. 의심이 가득해 보이는 혜주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네었다.

"지난번에 화장실에서는 감사했습니다."

서영이었다. 혜주는 서영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번에 병원 화장실 기억 안 나세요? 그때 제 휴대폰도 찾아주셨는데..."

"아, 그 휴대폰, 기억나요."

혜주는 서영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휴대폰을 찾아주었던 일은 생각났다. 여기서 우연히 또 만나게 되다니 혜주는 그 이상한 초대장부터 눈 깜짝할 사이 바뀌는 계절,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카페 주인까지,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고 신기하기만 했다.  

"같이 차 한 잔 하시면서 더 이야기 나눌까요?"

지운이 혜주에게 메뉴판을 건네주며 자리로 안내했다.

<위로의 로즈페탈 티>

"로즈페탈 티? 메뉴가 하나밖에 없네요."

혜주가 아직도 뭔가 미심쩍은 얼굴로 메뉴판을 앞뒤로 돌려보다 고개를 들며 말했다. 서영을 비롯해 먼저 카페에 와 있던 민서와 도훈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 모두 겪었던 일이라는 듯. 그들의 평온한 미소에서 뭔지 모를 신뢰감이 느껴졌다. 왠지 이 신비로운 곳에서 경계심을 풀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긴장감이 풀리고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혜주 씨를 위한 차예요. 마음을 차분히 해 주고, 감정적으로 힘이 들 때 기분 전환에도 효과적이랍니다."

"그래서 위로라는 말이 붙어있는 건가 봐요. 그럼 이 차로 부탁드립니다."

혜주가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며 말했다.

잠시 카페 뒤로 사라졌던 지운이 혜주의 맞춤차를 들고 다시 나왔다. 아직 마시기도 전인데 지운이 저쪽에서 걸어올 때부터 장미향이 나는 것 같았다. 고급스러운 찻잔에 담긴 옅은 핑크빛을 보니 왠지 마음이 설레었다. 혜주가 호호 불며 위로의 로즈페탈 차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캐럴 소리에 내내 먹먹했던 혜주의 가슴이 따뜻하게 차올랐다. 캐럴 소리는 여전히 아련하게 들려왔지만 입 안에 도는 부드러운 장미향이 잔잔한 행복을 남겼다. 혜주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장미꽃 한 송이가 통째로 입 안에 들어온 듯했다. 은은하게 감도는 단맛이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혜주는 이 향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향이 정말 좋아요. 차가 식어도 향이 지금처럼 살아있을까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네?"

"아, 차가 식을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었어요."

이 카페에 처음 도착한 민서가 자신의 찻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제가 여기 아까 왔는데 차가 아직도 식지 않고, 맛과 향, 온도가 모두 처음 그대로거든요."

 혜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자 도훈도 아직 식지 않은 자신의 찻잔을 들어 보이며 믿어도 된다는 듯 혜주를 보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희망이 생각에 아직도 크리스마스를 멀리하고 계신가요?"

지운이 물었다.

"우리 희망이를 어떻게..."

지운은 그냥 온화한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희망이를 그렇게 보내고부터는 크리스마스가 전혀 즐겁지 않아요.. 그 시즌의 분위기를 일부러 피하려고 했던 것도 같아요."

지운이 용기를 내려는 듯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천천히 말했다.

"사람마다 기억을 대하는 방식은 다르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픔이 있던 그날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힘들고, 또 어떤 이들은 일부러 그 시간을 마주하고 되새기며 이전 함께했던 행복한 때를 떠올리기도 하지요."

지운이 혜주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제가 전자에 속하네요. 그날 이후 크리스마스만 되면 마음이 가라앉고, 그냥 모든 게 다 귀찮고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크리스마스를 멀리하고 혜주 씨 마음이 편안해졌나요? 아니면 더 불편해졌나요?"

지운의 물음에 혜주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덜 아프기 위해 애써 피한 것이 오히려 마음을 더 불편하고 힘들게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해서 혜주 씨와 가족들 마음이 평온해졌다면 그것도 아픔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기억을 대하는 방식을 조금 바꿔보면 어떨까요?"

"그걸 어떻게 바꾸죠?"

혜주의 물음에 지운이 그녀에게 따라오라는 몸짓을 했다.

"아픈 기억을 마주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에요. 용기도 필요하고요. 크리스마스가 아픈 날이 아니라, 희망이와 함께했던 이전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는 날이 될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크리스마스를 멀리하면서 잊히게 되었던, 이전의 행복했던 추억과 함께요."

지운이 이렇게 말하며 책장에서, 혜주가 마셨던 차처럼 은은한 핑크빛의 책을 한 권 뽑아주었다.

"저에게 추천해 주시는 책인가요? 올해는 다른 크리스마스?"

"평범한 사람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크리스마스가 모두에게 행복한 날일 수는 없지요. 각자의 아픔을 극복하며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더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도 따뜻한 위로를 전해줄 거예요."

"저는 그날 이후 매년 그맘때가 되면 기분이 가라앉고, 말수가 부쩍 줄었어요. 크리스마스트리도 캐럴도 더 이상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았거든요."

혜주가 지운에게 받은 책을 들고 한 손으로 표지를 살며시 쓸어 보았다.

"오늘은 어떠세요? 혜주 씨가 오는 날이어서 제가 준비해 본 건데요."

지운이 이렇게 말하며 창밖을 가리켰다. 밖에는 이를 데 없이 완벽한 크리스마스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여전히 캐럴 소리가 들려왔다. 지운의 말 덕분인지, 위로의 차 덕분인지, 아니면 왠지 편안함이 느껴지는 이 낯선 사람들 덕분인지, 혜주는 캐럴이 더 이상 슬프게 들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구원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은 기적이랍니다. 바로 오늘, 여기일어나는 일들처럼요."

지운의 말이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알알이 박힌 따스한 조명이 혜주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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