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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Oct 03. 2024

[제22화] 엄마는 할 줄 아는 게 뭔데?

사춘기 아들과 갱년기 엄마

 진희는 베란다 창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쯤이면 아들 준우가 아파트 공동 현관을 나와 곧 머리를 보일 것이다. 그녀는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먼 하늘을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준우가 벌써 공동 현관을 빠져나와 저만큼 걷고 있었다. 눈앞에 있을 땐 그렇게 미워 보이더니 저만치 멀어지는 뒷모습에 또 마음 한 구석이 짠해졌다. 목발을 짚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아들이 안쓰러워 더 속이 상했다. 학교까지 태워다 준다는 것도 거절하더니 꼴좋다, 하다가도 못 이기는 척 봐주지 않고 아들을 이겨보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피운 자신이 그녀는 더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불혹을 넘기고도 진희는 한동안 햇수를 계산하며 새해 다이어리에 나이를 기록해 두었었다. 그해 다짐과 함께.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적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자신의 정확한 나이가 가끔 헷갈리기까지 한다. 10대 때에는 절대 올 것 같지 않았던 시기이고, 20대 때에는 아주 멀게만 느껴졌던, 그리고 30대 때에는 오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던 시기가 이미 시작된 지 오래다.
 바뀐 앞자리 숫자에 진희는 나름 잘 적응했다고 자신했다. 그러다가도 자주 쓰던 단어나 이름이 순간 기억이 나지 않아 "저기 그거 있잖아, 그거" 혹은 야, 저기 등을 남발하게 될 때에는 자신에게 버럭 화가 나기도 한다. 때로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어지기도 하고, 무기력하게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진희는 요즘 자신이 꼭 마른 장작 같다는 생각을 한다. 조그만 불씨에도 쉽게 타버릴 수 있는. 메마르고 지친 마음이 작은 자극에도 상처를 받고, 자주 폭발한다.

 그런 진희에게 준우가 오늘 아침, 기름을 부은 것이다. 등교하는 날인데 깨울 때 바로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서도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미적대고 있는 모습이 진희의 신경에 거슬렸다.
 "깨울 때 바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럴 시간이 있어?"
 "밥 먹으면서 보는 건데 뭘."
 진희의 말에 준우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밥을 늦게 먹게 되잖아. 안 그랬음 벌써 다 먹었을 텐데."
 진희의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지만 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폰 위에 고정된 시선도 여전히 그대로다. 진희는 일부러 그릇들을 싱크대 안에 탁 소리가 나게 던지듯 놓았다. 준우가 주방 쪽을 힐끗 보는 듯하더니 다시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왼손으로는 연신 휴대폰을, 오른손으로는 젓가락을 들고 밥을 깨작깨작 먹는 둥 마는 둥. 진희는 그런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릇들을 씻고 정리하면서 마음도 가라앉혀 볼 요량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제가 튀고, 그릇들이 나뒹구는 분노의 설거지는 화가 희석되기는커녕 그녀가 해야 할 일들만 더 만들 뿐이었다.
 



 목발도 그렇다. 꼭 말 안 듣고 슬리퍼 신고 뛰다가 계단에서 넘어진 것이다. 깁스를 하고 다리를 절룩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애처롭고 가엽다가도 불쑥불쑥 속에서 천불이 나는 진희였다.

벌써 정말 갱년기인가.
 그때 준우의 휴대폰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억지스러운 톤에 과장된 억양, 자연스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는 인위적인 느낌이 거북했던 것은 그녀뿐, 준우는 휴대폰을 보며 재미있는 듯 킥킥댔다. 진희가 물을 세게 틀었다. 그 불편한 소리들이 묻히길 바라면서.
 쏴아.
 하지만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과도하게 조장된 억양이 물소리를 뚫고 그녀의 귀에 꽂혔다.
 이에 진희가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준우에게 소리쳤다.
 "듣기 싫어죽겠네, 정말! 요즘 영상들은 왜 다 그 모양인지, 그게 재미있어서 웃는 거야?"
 "응, 재미있는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보란 듯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아들을 보자 진희는 그만 울화통이 터졌다.
 "너 다리 다쳤다고 학교까지 태워주니까 아주 상전이야, 상전! 차 타고 가니까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러지?"
 "난 아무 말 안 했는데 엄마가 태워준다고 한 거잖아."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이제 너 혼자 가! 걸어가든 택시를 타든 알아서 해."
 진희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오늘 아들을 학교까지 태워다 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진희는 마음에 없는 소리로, 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누가 태워달라고 했어? 왜 별 것도 아닌 일에 자꾸 소리를 질러? 엄마 갱년기야?"
 "그럼 넌 사춘기라 그렇게 사사건건 토를 다는 거야? 뭐 할 줄 아는 것도 하나 없으면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쓸데없는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지."
 "여기서 갑자기 공부 얘기가 왜 나와? 그럼 엄마는 할 줄 아는 게 뭔데?"
 준우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반항했다. 진희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준우가 식탁 위에 젓가락을 세게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그는 깁스한 다리를 절룩이며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오늘 아침은 남편 상훈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있었다면 오늘 같은 이런 상황에 모자간의 갈등이 부부싸움으로 번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 밥 먹는 애 앞에서 잔소리냐, 할 말이 있으면 아이 눈을 보고 말해라, 다리 다친 애한테 그게 할 소리냐, 똑같은 잔소리를 도대체 몇 번이나 반복하는 것이냐... 그렇게 해서 그릇이 깨지겠냐, 올라오는 화를 설거지에 퍼붓는 그녀를 향해서 상훈은 분명 이렇게도 말했을 것이다. 잔소리는 도대체 누가 더 심한 것인지 진희는 정말 모르겠다.
 아이 앞에서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아이를 두둔하며 배우자를 비난하는 것은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임을 많은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고 있지만 상훈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 말이다. 평소에는 한없이 자상하고 가정적이다가도 아들 일에 관해서는 유난히 예민해지는 그였다. 어렵게 얻고 힘들게 키운 외동아들이라 그런가 싶어 이해하며 살아왔건만 요즘 들어서는 진희도 느닷없이 부글부글 가슴이 끓어오를 때가 많아졌다. 그러니 아들 일과 관련해 부부싸움이 부쩍 잦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화장실 문 앞에서 준우에게 말을 건네려다 말기를 수차례. 아들의 마음이 굳게 닫힌 이 문과 같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게 두려워 문 앞에서 주저하기를 몇 분, 그때 준우가 문을 열고 나왔다. 화장실 앞에 서 있는 진희를 본체만체 지나 방으로 들어간 그가 얼마 후 등교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그 다리를 해서 어떻게 혼자 가려고 그래?"
 정말 혼자 등교를 하겠다는 것인지 걱정이 된 진희가 초조해져 물었다. 준우는 아무런 대답 없이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한 짝만 꺼냈다.
 "너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밥을 먹다 말고 이렇게 그냥 두고 일어나니?"
 저 녀석이 반항한답시고 혹시라도 그대로 나가버릴까 다급해진 진희가 애꿎은 밥 타령을 했다.
 "그놈의 밥밥밥! 너무 짜증 나."
 "네가 어려서부터 밥 때문에 엄마를 어지간히 고단하게 했어야 말이지."
 "또 그 소리지. 맨날 똑같은 말 나도 듣기 싫어."
 "너도 부모 돼 봐라, 부모 마음이 그런 게 아니니까... "
 그녀의 마지막 말은, 매정하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쾅하고 닫힌 현관문처럼 그녀의 심장도 쿵 내려앉았다. 결국 또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걸었던 것일까 싶어 진희는 자책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40대보다 50대에 가까워지면서 진희가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마 아들 준우에 관한 한 통제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나 보다. 혹 그 잘못된 생각이 진희와 준우의 사이를 멀게 만들었는 지도 몰랐다. 어쩌면 진희와 상훈의 사이도.
 베란다로 가 창을 열었다. 얼어붙은 마음과 달리 햇살이 참 따스했다. 저 멀리 절룩이며 목발질하는 준우가 보였다. 목발 사용이 익숙지 않아 손목도 아파했고, 무게가 고스란히 실리는 겨드랑이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다. 그런 아들이 오늘 무거운 가방까지 짊어지고 나갔다. 아들의 고생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의 짐까지 더 지운 듯하여 진희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에는 위를 쳐다보고 손도 잘 흔들어 주더니 오늘은 끝까지 고개 한 번을 돌리지 않는다. 준우가 저기 멀리 코너를 돌아 없어진 후에도 한동안 진희는 애처롭게 그곳을 바라보았다.

  찬 바람이 들어와 어느새 썰렁해진 집 공기를 느끼며 진희는 창문을 닫았다. 주방으로 돌아와 아까 준우가 쓰러뜨린 의자를 바로 세웠다. 아들이 먹다 만 음식을 치우다가 중간중간 젓가락 자국이 남아 흐트러진 밥을 보았다. 밥은 숟가락으로 먹으라고 그렇게 말해도 지긋지긋하게 말도 안 듣는다. 지애비 따라 꼭 젓가락으로 먹지. 반찬들을 치우고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젓가락을 한데 모았다. 가지런히 놓인 젓가락에 더덕더덕 밥풀이 묻어 있었다. 참 어설프게도 붙어 있는 그 밥풀을 보니 괜스레 눈물이 났다.
 

 그녀의 눈앞이 맑게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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