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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Feb 26. 2020

'1917' 이것은 시네마다

'1917'은 관객을 전쟁터 한복판에 세우는 영화적 체험 그 자체다.

사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1917>’이라는 구절로 이 글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기생충>의 영어 제목인 ‘패러사이트’가 오스카 수상작으로 거듭 호명되며 감독상과 작품상 트로피까지 거머쥐는 ‘언빌리버블’한 상황이 전개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무나 초현실적이라 시공간이 일그러질 거 같은 기분이 느껴졌지만 분명 기분 좋은 생경함이 느껴졌다. 동시에 강력한 작품상 후보로 꼽힌 <1917>이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을 막아서는 데 실패한 빌런 같은 영화처럼 저평가되는 건 아닌가 싶은 기우도 함께 차오르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1917> 역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로서 자격이 충분한 영화다. 영화적 형식 그 자체를 비범한 캐릭터처럼 제시하는, 보기 드문 사례다.

1917년 4월 6일,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프랑스 전선에서 독일군과 대치 중인 영국군에 소속된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와 스코필드(조지 맥케이)는 조용한 들판 주변에 널브러져 잠을 자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와 블레이크를 발로 툭 차서 잠을 깨우더니 동료 한 사람과 함께 사령관을 찾아가라는 지시사항을 전한다. 몸을 일으킨 블레이크는 나무에 기대어 자고 있던 스코필드에게 손을 내밀고, 두 사람이 함께 몸을 일으키자 그들을 비추던 카메라 역시 고개를 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객석을 향해 나아가듯 후진하는 카메라를 따라 전진하는 두 군인 옆으로 티타임을 기다리며 바닥에 편히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군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예비군 훈련장만큼이나 느슨하고 무료해 보이는 풍경을 뒤로 밀어내며 전진하는 두 사람을 비추던 카메라가 비좁은 참호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서자 스크린으로 점차 전쟁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1917>은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비추는 영화다. 보다 정확하게는 4월 6일부터 7일까지, 1박 2일간의 서사를 다루는데 이야기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멀리 떨어진 아군 부대의 작전을 중단시키기 위해 사령관의 명령서를 들고 먼 길을 떠나는 두 군인에 관한 이야기다. 두 사람의 발에 1600여 명의 영국군 목숨이 달려있다. 위장 퇴각 후 후방의 화력까지 끌어 모아 영국군을 유인해 일망타진하겠다는 독일군의 전술에 관한 첩보를 받은 영국군 사령부에서는 아군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공격을 중단할 것을 명령한다. 문제는 독일군으로 인해 통신선이 끊어진 탓에 직접 명령 서신을 보내 지시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두 군인은 당장 내일 오전에 이뤄질 공격을 막기 위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을 경계하면서도 민첩하게 아군의 진지를 찾아가야만 한다. 다만 블레이크에게는 개인적으로도 간절한 일이었다. 독일군에 의해 몰살당할지 모를 1600명 중에 형이 속해 있는 것. 주저할 이유가 없는 블레이크와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스코필드는 그렇게 길을 떠난다.


그렇다. <1917>은 그렇게 길을 떠나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그 이후부터는 그 길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연속으로 점철돼 있다. 이야기 자체로만 보자면 대단히 특별할 거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를 좀처럼 평범하게 볼 수 없게 만드는 건 그 여정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남다른 영화적 형식성에 있다. 카메라를 눈에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1917>은 단 한번 눈을 깜빡이는 영화다. 2시간 여의 러닝타임이 단 두 신으로 구분된 영화처럼 보인다. 단 한번, 명확하게 스크린이 암전되는 상황을 제외하면 컷 자체가 없다. 두 개의 거대한 원테이크 신으로 이뤄진 영화라는 말이다. 물론 2시간짜리 영화를 단 두 번의 컷으로 촬영했을 리는 없다. 올해 <1917>로 오스카 촬영상을 수상한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는 65일간 진행된 <1917>의 촬영 기간 안에서 가장 길게 촬영한 쇼트가 7분가량이었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가장 길게 이어진 촬영 쇼트는 8분 30초에 불과했고, 가장 짧은 쇼트는 39초가량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1917>은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마술적인 편집 기술을 통해 완성된 영화인 셈이다. 물론 거대한 원테이크 쇼트 편집을 위한 전제조건은 동선을 촘촘하게 이어 나가는 촬영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로저 디킨스는 샘 멘데스로부터 받은 대본의 첫 장을 보고 잠시 눈을 의심했다. ‘원테이크로 촬영된, 실시간 상황처럼 보이도록 계획된 이야기’라는 문구가 적힌 대본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원테이크 신으로 촬영하겠다는 황당한 계획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일찍이 알프레드 히치콕의 <로프>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과 같은 영화가 제시한 것처럼 정교한 촬영술과 기막힌 편집술을 통해 컷의 전환이 없는, 하나의 시퀀스로 구성된 듯한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의 영화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납득했다. 샘 멘데스의 <007 스펙터>의 오프닝 시퀀스를 원테이크 신으로 완성시킨 경험이 있었던 만큼 불가능한 작업처럼 여겨지지도 않았다.


동시에 그것이 단순히 기술적인 도전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했다. 이러한 방식의 촬영이 결과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드는지 납득했다. 물론 촬영은 만만치 않았다. 단순히 카메라의 무빙에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연극판을 만들고, 정교한 동선을 구성하고, 배우들과 모든 스태프가 일사불란하게 정해진 합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작업이었다. 배우들과 6개월간 리허설을 하고, 전쟁터에 버금가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반경 1마일이 넘는 참호를 파고, 촬영에 적합한 카메라 장치를 개발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1917>은 영화라는 예술의 연극적인 원형에 접근하는 작업이면서도 가장 진화한 최신의 영상 기술을 극단적으로 동원한, 영화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 반영된 작품이란 점에서 흥미로운 결과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감정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이 남자들과 모든 여정을 함께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선 본능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했다. 결국 그 경험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제작 방식이 필요했다.” 샘 멘데스가 단 하나의 쇼트로 연결된 영화를 구상하게 된 건 단순히 기술적 성과를 과시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평온한 휴식을 취하던 두 군인이 전선의 경계를 넘어 언제 대면할지 알 수 없는 적의 존재를 살피며 전장의 한복판을 돌파하는 과정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이끌거나 따라잡는 카메라의 시선은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지우고 관객을 영화 속 인물들과 동일한 위치로 끌고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객석에 앉아있는 이상 좋든 싫든 스크린 너머의 전쟁터 한복판을 함께 헤쳐 나가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1917>은 1인칭 시점의 게임과도 같은 체험처럼 다가오는 측면도 있지만 그것은 결코 전쟁의 긴장감을 전하는 카타르시스로 휘발되지 않는다. 타나토스의 경계를 뛰어넘는 생의 감각으로 선명해진다.


적군의 추격을 따돌린 스코필드가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프랑스 여인과 갓난아이 앞에서 잠시 전장의 긴장감을 지운 듯한 표정을 짓는 순간, 인간성을 말살하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되살아나는 인간성의 아이러니를 체감하게 만든다. 이는 꺼져버린 영혼의 등불을 밝혀내는 듯한 감동을 안겨주는 명장면으로서 <1917>이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상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적의 추격에서 달아나 강물로 뛰어든 스코필드가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가다 자신처럼 떠내려온 시체들을 헤치고 가까스로 뭍으로 기어올라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은 필연적으로 인간이 태어나 처음으로 대면하는 숨의 감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가까스로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이에게 생존의 감각은 결국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경험으로서 생의 근원적인 지점을 돌아보게 만든다. 실제로 샘 멘데스는 이 장면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의 경계에 흐르는 강 스틱스(Styx)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혔다. 이는 <1917>이라는 영화가 관객의 피부로 와 닿는 생생한 체험을 제시하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원형에 접근하고자 하는 신화적인 탐구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비범한 양면성을 두른 작품임을 수긍하게 만든다.

더욱 흥미로운 건 <1917>이 샘 멘데스가 처음 각본가로 이름을 올린 영화이자 그의 사적인 경험이 깊게 연관된 결과물이란 사실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드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에 ‘왕립 근위보병대 1대대 알프레드 H. 멘데스 일병’에게 바치는 헌사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지칭하는 이는 샘 멘데스의 할아버지다. 17세의 나이로 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다는 할아버지는 70대가 넘어서야 전쟁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경험은 <1917>을 구상하는 방아쇠가 됐다. 다만 할아버지의 경험을 재현하는 영화를 만들자는 목표를 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전쟁영화’라는 장르로 간과되는 전쟁이라는 비극 자체를 온전히 환기시키는 체험이 되길 원했다”는 샘 멘데스의 말은 이 작품의 지향점이 상영관을 넘어선 근원적인 경험이자 성찰로 다가가길 원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1917>의 결말은 한층 더 비범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대단원이라 할 수 있는 질주 시퀀스는 가까스로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목적지에 당도한 한 인간이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로 들어서는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뒤바꾸겠다는 의지의 역주이기에 그것을 본다는 것 자체로 영혼의 울림이 전해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끝에서 결국 살아남은 이가 할 수 있는 건 또 다른 산 자를 위로하는 것임을 깨닫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결국 전쟁이란 누군가에게 형제를 잃어버리는 일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품에 안고 있던 가족의 사진을 꺼내 보게 만드는 일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총알처럼 날아드는 죽음과 상실을 견디고 살아남아 서로를 위로하는 인간의 역사였다는 것을 끝내 체감하게 만든다.

들판에서 시작해서 들판으로 끝나는 <1917>의 여정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오디세우스는 힘겨운 고난과 싸우고 역경을 이겨낸 끝에 고향에 도착한다. 오래된 서사시와 최신의 영화가 가진 정서가 남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건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수없이 많은 변화를 겪어도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의 원형이란 늘 뿌리 깊은 나무처럼 그곳에 서있는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고전적인 가치를 전하는 덕분일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근본적인 노스탤지어, 그러니까 우정, 사랑, 가족, 희생, 헌신과 같은 단어 앞에서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이야기는 언제나 위대하다. <1917>은 그런 근본적인 감정들을 감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실로 비범하다.


('ESQUIRE KOREA' 2020년 3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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