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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r 16. 2020

봉준호 오디세이

전환점과 반환점을 돌아 새로운 정점에 선 봉준호의 세계에 관하여.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대사가 허구의 언어가 아닌 현실의 예언처럼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패러사이트!’라고, <기생충>의 영어 제목이 네 차례에 걸쳐 오스카 수상작으로 호명된 지난 2월 9일의 아카데미 시상식 말이다. 각본상, 국제영화상, 감독상 그리고 작품상까지, 오스카 주요 부문의 수상작으로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이 불릴 때마다 ‘이거 정말 상징적인데’라는 대사가 눈 앞에 자막처럼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톰 행크스와 샤를리즈 테론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와 쿠엔틴 타란티노가 청룡영화상 시상식장에 참석했다고 믿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나 싶을 만큼 비현실적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고 다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히 기분 좋은 결말이었다.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영화제인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로컬(!) 시상식’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의 낭보는 지난해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영화계에 참으로 시의적절한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봉준호 인베이젼’이라 불려도 좋을 이번 오스카 이후로 봉준호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재조명하는 동시에 <백색인>, <지리멸렬> 같은 초기 단편영화까지 주목받고 있는 상황은 마치 전 국민이 ‘봉준호’라는 극장에 함께 모여 앉아있는 듯한 착시를 느낄 정도다.


장편 연출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부터 <살인의 추억>, <괴물> 그리고 <마더>까지, 봉준호 감독의 세계에서는 늘 강력한 아이러니가 단단한 반석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평범한 얼굴로 선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들, 별 일이란 게 생기지 않을 것 같았던 공간에 대한 인식을 부수는 사건들, 그리고 다가갈수록 무력하거나 허망해지는 진실의 실체. 잔혹한 존재의 뒤를 쫓거나 사라진 존재를 찾아 나서는 이들의 간절함과 무력함이 뒤엉키는 아수라장의 희극이면서도 끝내 현실을 환기시키는 생생한 비극으로서 관객의 뇌리에 각인되는 세계.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한 단어의 장르로 규정하기 힘든 세계였다. 코미디와 스릴러 사이 어딘가를 배회하다 비집고 들어가는, 어쩌면 아이러니를 장르라 규정해야 할 것만 같은 영화를 연이어 만들어왔다.

<플란다스의 개>

<플란다스의 개>는 봉준호 감독의 세계를 쏘아 올린 첫 번째 원형이란 점에서 의미가 큰 작품이다. 대학교수가 될 날을 고대하는 시간강사로 버티며 반백수 같은 삶을 사는 윤주(이성재)는 임신한 몸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아내의 눈칫밥을 먹고사는 신세다. 남는 시간을 주로 집에서 보내는 그의 신경을 긁는 건 아파트 단지 내 어딘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개 울음소리인데 이를 참지 못한 그는 원흉처럼 느끼던 강아지를 납치해 지하실에 방치된 장롱에 가두는 데 성공한다. 그러다 뒤늦게 강아지를 제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지하실로 내려간 그는 강아지가 사라진 것을 알고, 당황한다. 그리고 갖은 우여곡절 끝에 아파트 단지에서 강아지 납치범을 쫓는 관리사무소 직원 현남(배두나)을 만나게 된다.


<플란다스의 개>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관객에게 두고두고 쏠쏠한 재미를 안겨주는 작품일 것이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아파트 지하실이라는 공간은 의외의 캐릭터에 가깝다. 수많은 이들의 일상이 공존하는 아파트 단지 아래 자리한 지하실은 아파트를 구성하는 공간일 뿐, 쓸모가 없다. 방치된 영토다. 누군가 그 공간을 차지하고, 모종의 일을 벌인다 해도 좀처럼 알 길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하실은 존재하지만 알 길이 없다는 점에서 마음껏 상상력을 펼쳐도 좋을 음험한 세계다. 동시에 지상과 지하의 대비감을 통해 정서적 거리감을 극명하게 확보할 수 있다. 그렇게 익숙하다고 여겨지는 풍경에서 낯선 행위를 하는 어떤 존재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것만으로 가늠할 수 없는 위협감과 호기심을 함께 채울 수 있다. 그야말로 의외성을 잉태하는 자궁인 셈이다.


<살인의 추억>에 등장하는 지하의 취조실에서 형사들은 폭력을 동원해 자백을 받아낸다. <괴물>에서 괴물의 아지트인 한강 원효대교 북단의 하수구 바닥 역시 일종의 지하 공간이다. 그리고 <기생충>의 ‘그곳’은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을 여러모로 연상시킨다. 게다가 타인의 공간에서 암약한 존재를 마주하게 되는 당혹감은 정작 집주인의 것도 아니다. 타인의 집에 머무를 기회를 쟁취하기 위한 외부인과 외부인의 투쟁이 펼쳐진다. 동시에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는 수직적인 동선은 늘 불가피한 충돌과 갈등을 야기시킨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지하로 내려간 윤주가 맞닥뜨린 불편한 진실을 함께 목격한 관객은 <살인의 추억>의 지하 취조실에서, <괴물>의 아지트가 되는 하수구에서, <기생충>의 ‘그곳’에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영화의 공기 자체를 전환시키는 역할 그 자체로 기능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내려간다’는 의미는 곧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혹은 누구를 맞닥뜨릴지 모르는 서스펜스의 유의어가 되는 셈이다. 

<살인의 추억>
<살인의 추억> 촬영장에서의 봉준호 감독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의 인물들은 하나의 거점을 중심으로 그 주변 일대를 뱅뱅 돌다가 거점으로 다시 돌아오거나 그 주변에 산재한다. 반면 <설국열차>와 <옥자> 그리고 <기생충>의 인물들은 출발지와 목적지가 되는 두 개의 거점을 두고 명확하게 이동하거나 오고 간다. <플란다스의 개>의 아파트 단지와 <살인의 추억>의 화성시, <괴물>의 한강, <마더>의 지방 도시는 영화의 주무대 역할을 하는 동시에 커다란 거점이 된다. 네 영화 속 인물들은 수많은 곳을 배회해도 끝내 일정한 공간으로 돌아온다. 그 동선에는 인물도, 공간도 큰 괴리감이 없다. 하지만 열차의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 이동하는 <설국열차>와 강원도 산골에서 뉴욕으로 나아가 다시 강원도 산골로 돌아오는 <옥자> 그리고 허름한 건물의 반지하방과 지대가 높은 대저택을 오가는 <기생충>은 대비감이 명확한 양극단의 세계로 나아가고 그 세계의 간극을 스크린에 전시하고 객석으로 중계한다. 풍경 자체가 시각적인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인간과 문명의 대결 혹은 생명과 자본의 대립 혹은 가난과 부유의 간극으로 다가오는 풍경을 통해 관객에게도 욕망과 가치가 충돌하는 듯한 경험을 안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국열차>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영화적 형식의 차별점을 느끼게 만드는 전환점이 된 작품처럼 보인다. 물론 틸다 스윈튼이나 크리스 에반스, 제이미 벨 등 유명한 해외배우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며 영어로 대사를 하는 글로벌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도 전작과는 큰 차이로 다가오는 작품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보단 이 영화의 기세와 상징이 전작들과 다른 방식으로 느껴지고 읽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설국열차> 이전까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이 사라진 존재를 구하기 위해서 혹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 우왕좌왕하며 동분서주하다 끝내 실패하는 이들의 페이소스로 맺히거나 미스터리로 흩어지는 것이었다면 <설국열차>는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 전진한다는 명확한 계획을 세우고 한 방향의 에너지를 밀고 나가 끝내 추구하는 메시지를 완수해내는 영화에 가깝다. 전작들이 어딘지 모르는 결승선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 우스꽝스러운 계획을 안쓰럽게 바라봐야 하는 영화였다면 <설국열차>는 다 계획이 있는 인물의 분투와 의지를 조마조마하게 따라가는 영화에 가깝다. 

<괴물>
<괴물>의 촬영 현장

이런 변화는 <옥자>에서 또 한 번 더 너른 세계로 자리를 옮겨 반영된다. 새로운 빙하기가 도래한 지구 위를 끝없이 달리는 열차 속으로 도피한 인간들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SF 그래픽 노블의 설정이 반영된 <설국열차>는 인위적으로 설계된 무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연극적인 우화였다. 반면 <옥자>는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를 무대 삼아 보다 거대한 스케일의 동선으로 확장된 우화처럼 보인다. 단순히 더 많은 제작비를 투자한 대작이라는 점을 짚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설국열차>와 마찬가지로 <옥자> 역시 하나의 거점에서 다음 거점으로 거듭 전진하는 이야기다. 강원도 산골에서 서울로, 뉴욕으로, 공간을 거듭 점프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도시가 하나의 무대처럼 활용된다. 그러니까 <옥자>는 구조적으로 보자면 <설국열차>보다 큰 무대를 확보했을 뿐, 거듭 전진해 나가는 동선의 영화라는 점에서 전작의 기세를 이어가는 작품이란 의미다. 다만 <설국열차>가 갇힌 세계를 탈출하는 쾌감이 보다 중요한 이야기였던 것과 달리 <옥자>는 멀리 나아가 끝내 함께 돌아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정서적 위안을 남긴다.


꼬리칸과 머리칸의 거리감만큼이나 차별적인 계급으로 인간을 양분화한 세계를 그린 <설국열차> 그리고 자본주의 화신과 생명주의 투사의 대결을 그린 <옥자>는 양극단으로 분열된 세계의 갈등과 충돌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전작들과는 분명 다른 세계의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봉준호 감독의 관점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설국열차>와 <옥자>는 영화적 세계를 확장하는 전환점이자 작가가 자신의 원점을 돌아보는 반환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설국열차>나 <옥자>에서 묘사된 계층적 대비감은 봉준호 감독이 일찍이 대학 시절에 연출한 단편영화 <백색인>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백색인>의 내용은 이렇다. 공장에서 손가락 절단 사고를 당한 뒤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공장 직원이 사장이 사는 아파트로 찾아가 항의를 하며 실랑이가 벌이다 잘린 손가락을 분실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 살던 한 남자가 출근하던 중 그 손가락을 발견해 가죽 도장 케이스에 넣어 회사로 가져간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한 뒤 그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들기거나 전화 버튼을 누르는 등 장난감처럼 갖고 놀기 시작한다. 

<설국열차> 촬영장의 봉준호 감독
<옥자> 촬영장의 봉준호 감독과 스태프

<백색인>은 물질만능주의와 그로 인한 사회 양극화 현상을 미리 예견한 작품처럼 보인다. 화이트 칼라 노동자와 블루 칼라 노동자의 삶이 괴리되는 당대의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란 점에서 부와 권력에 따른 계급적 우열로 양극화된 세태를 날카로운 위트로 파고든다. 심지어 한 지역에 사는 공장 노동자와 회사원이 각각 산동네 주택과 아파트라는 주거환경의 차이 속에서 살아간다는 묘사가 더해지는 지점에서 <설국열차>와 <옥자>의 기시감은 더욱 명명해진다. 결국 <설국열차>나 <옥자>는 일찍이 봉준호 감독이 짚어본 양극화 현상이 더욱 공고해진 작금의 사회상이 우화적으로 반영된, 새로운 시대의 <백색인>인 셈이다. 동시에 이 모든 여정은 결국 <기생충>이라는 걸작으로 향하는 경유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봉준호 감독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기생충>은 원래 <데칼코마니>라는 가제로 불린 작품이었다. 두 집안의 가족 구성원이 4인 가족으로 구성된 것도 두 가족의 대칭점을 만들어내겠다는 의도가 명백해 보인다. 그러한 대칭은 결국 두 가족의 처지에서 드러나는 간극을 더욱 또렷하게 인식시키는, 완벽한 대비감을 전달하는 수단에 가깝다. 기차의 꼬리칸과 머리칸, 강원도 산골의 가난한 소녀와 뉴욕의 글로벌 기업 CEO 사이의 간극은 반지하방의 가난한 가족과 대저택의 부유한 가족에게 적용된 셈이다.


무엇보다도 <기생충>은 시각적인 대비감을 넘어 후각을 통해 빈부 격차의 간극을 체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한층 더 비범하게 진화한 세계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위장해도 결코 쉽게 씻어낼 수 없는 가난의 흔적, ‘지하철 타는 놈들 특유의 냄새’를 혐오하는 부자는 짐작조차 못하는 ‘반지하 냄새’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처지는 관객 입장에서도 실제적인 감각을 건드리는 체험으로 다가온다. 절묘하게 스크린과 객석의 선을 넘는 감각의 영화로 진화한다. 동시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예사롭지 않게 등장하는 지하 공간이 다시 한번 캐릭터처럼 활용되고, 이를 통해 더욱 명확해지는 상하 구조의 계층적 은유는 반지하집과 대저택의 거리감을 환기시키는 긴 계단을 오르내리는 가난한 가족의 이미지를 통해 한층 더 지난한 피로감으로 강화된다. 

<기생충> 촬영 현장
<기생충>

한편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의 연출 초기 단편영화인 <지리멸렬>을 떠올리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대학교수와 신문사 논설위원 그리고 검사를 주인공으로 둔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어진 단편영화 <지리멸렬>은 세 사람의 표리부동한 행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함으로써 사회지도층으로 분류되는 지식인과 고위 관료의 지리멸렬한 언행일치를 꼬집는 풍자극이다. <기생충>은 위선과 가식으로 차별과 혐오를 위장한 상류층 사회의 내면을 감각적으로 들춘다. 하지만 <기생충>은 풍자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눈을 감는 <지리멸렬>과 달리 보다 날카롭고 예민하게 그 이후의 상황을 목도하는 영화다. 계획을 세운 덕분에 상류층 가족과의 믿음의 벨트를 건설할 수 있었던 하층민 가족의 영원할 것만 같던 계획은 쏟아지는 비와 함께 완전히 무너진다. 그리고 그렇게 폐허가 된 계획과 함께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절망하는 법조차 잊은 절망과 대면한다.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사치가 되는 현실을 직면한다. 그 이후에 진행되는 극단적인 선택은 저항과 절망 그 사이 어디쯤 놓여있는 물음표다. ‘과연 스크린 너머에 앉아있는 우리는 이 세계의 간극을 좁혀낼 수 있을까?’ <기생충>은 그런 면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가운데 보기 드물게 절망적인 여운을 남기는 동시에 가장 속 깊은 연민을 품게 만드는 결말로 나아간다. 


“뭔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게 뒤섞여 있는 것들이 있죠. 어떻게 보면 악취미이기도 한데.(웃음) 그러니까 되게 심각하고 장중해 보이는 장소에 있는 사람이 뻘쭘하게 조잡한 짓을 하고 있다던가. 늘 지나다니던 논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거나, 휴일에 가서 오리배나 타던 한강에서 괴물이 활보하거나, 너무 익숙해서 생경해지는 일이겠죠. 그런 이상한 부조화를 제가 좀 좋아하는 거 같아요.”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그의 세계는 늘 그의 취향이 반영된 이상한 세계였다. 크고 작은 재앙처럼 덮쳐오는 아이러니를 감당하며 끝내 무언가를 찾아내거나 어딘가로 가 닿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스꽝스럽지만 끝내 어떤 여운으로 마음에 박힌다. <플란다스의 개>로 시작된 봉준호 감독의 세계는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를 통해 멀리 나아간 뒤 <설국열차>와 <옥자>라는 전환점이자 반환점을 돌아 <기생충>이라는 새로운 전환점이자 정점으로 다다랐다. 그런 의미에서 <기생충>은 봉준호의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일 것이다. 

<도쿄!> 중 <흔들리는 도쿄> 촬영 현장

만약 지금껏 나온 봉준호 감독의 영화 가운데 위에 언급되지 않은 색다른 면모를 보고 싶다면 <설국열차>와 <옥자> 이전에 해외에서 촬영한 봉준호 감독의 첫 외국어 연출작인 옴니버스 영화 <도쿄!>의 <흔들리는 도쿄>를 찾아보길 추천한다. 히키코모리와 지진이라는, 지극히 일본스러운 두 소재를 통해 로맨틱한 진동을 일으키는 이 작품은 봉준호 감독이 일찍이 품고 있었던 유연하고도 집요한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기회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그는 이미 산수경석 같은 가능성이 충분한 감독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세계적인 거장이 됐다. 그렇게 봉준호 오디세이의 2막이 시작됐다. 그러니까 이거 정말 상징적이다.


('1st Look' 매거진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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