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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y 14. 2020

'톰보이' 나의 이름은.

'톰보이'는 소년과 소녀 사이에서 찾아낸 진짜 이름이다.

축구공을 뺏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는 남자아이들의 모습을 한편에서 유심히 지켜보는 미카엘(조 허란)은 그런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리사(진 디슨)에게 “왜?”라고 묻는다. “아니야. 그냥 넌 조금 다른 거 같아서.” 수줍은 표정으로부터 리사의 마음이 읽히는 이 답변은 한편으론 객석을 향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톰보이>는 소년 행세를 하는 소녀, 그러니까 미카엘이 되고 싶은 로레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숏커트 머리에 품이 큰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소년인 로레는 아버지의 직장 문제로 새롭게 이사 온 동네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자신을 로레가 아닌 미카엘이라 소개한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척한다. 덕분에 다른 남자아이처럼 웃옷을 벗고 침을 뱉으며 축구도 할 수 있지만 거짓말이 들통날까 두려워 소변도 마음 놓고 보기가 어렵다. 무엇보다도 여름방학이 끝나면 학교에서 만날 친구들이기에 언젠가 들통날 거짓말이 잠시나마 근심거리로 다가오지만 당장 즐거운 매일 앞에서 막연한 근심은 손쉽게 휘발될 뿐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칸 국제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감독 셀린 시아마의 2011년작인 <톰보이>는 일찍이 등장한 수작이다. 불과 3주 만에 써 내려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20일 만에 촬영을 마친 이 영화는 남자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소년 행세를 하는 소녀를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갈등과 혼란을 그린다. 대단히 사소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불과해 보이지만 성 정체성이라는 공고한 고정관념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킬 만한 물음을 안긴다는 점에서 여성의 권한이 제한된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 은밀한 감정을 주고받는 여성 간의 로맨스를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의 접점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모든 건 소녀가 소년인 척하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마치 마피아 조직에 잠입한 경찰처럼. 그건 관객을 그 인물의 공범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정말 영화에 어울리는 강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긴장감을 느끼며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썼다.” 셀린 시아마의 말처럼 <톰보이>는 미카엘로 위장한 로레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영화다. 이는 로레를 연기하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잘랐다는 조 허란을 비롯한 아역배우들이 생동감 넘치게 그 세계에 밀착한 덕분이자 그만큼 그 세계를 생생하게 포착해낸 연출력과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촬영술의 힘에 기반한 성과이기도 하다. 이런 거리감은 영화가 발생시키는 물음을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안전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10여분 간 그 아이가 소년인지, 소녀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혹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그 정체를 알고 있다 해도 얼굴을 보는 순간 여전히 의심을 품을 수 있다. 결국 나는 이 영화가 모든 이들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소년들이 남자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셀린 시아마의 말처럼 <톰보이>는 너무나 당연해서 좀처럼 의심하지 않았던 어떤 규칙에 이의를 제기하는 영화다. 다만 그것을 강요하거나 주장하는 대신 동참하길 제안하는 물음으로 제시한다. 


소년의 세계를 동경하는 로레는 미카엘이라는 이름을 지어냄으로써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남성성의 지위를 확보한다. 여자라서 낄 수 없는 축구 경기도 하고, 남자애들과 힘싸움도 벌인다. 이 모든 과정은 관객의 손에 쥐여준 물음표와 같다. 남자아이라 여길 만한 외모 덕을 톡톡히 보는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치마를 입지 않고, 남자 이름을 쓰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성전환을 이룬 로레의 모습을 통해 성 정체성과 성역할이라는 공고한 신앙의 뿌리가 흔들리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톰보이>는 마치 거울과 같은 영화일 것이다.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기반에 둔 이 영화의 물음에 관객이 남긴 답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작금의 시대가 얼마나 진보한 세계인가를 판단하는 바로미터가 될지도 모른다. 동시에 명확한 마침표를 찍지 않은 문장처럼 마무리되는 결말은 감정적 여운을 남기기보단 서사적 진행을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영화가 제시한 물음표를 보다 멀리 밀고 나가길 원한다는 인상으로 다가온다.

 

한편 비로소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발음하는 로레의 얼굴을 마주하는 결말부로부터 은근히 전해지는 희망은 셀린 시아마의 지향점이 투쟁이나 저항보다도 회복과 성장에 있음을 확신하게 만든다. 소녀의 삶은 또다시 갈등과 혼란 속에 놓일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미카엘이 아닌 로레로서 살아가는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런 의미에서 <톰보이>라는 제목은 불분명한 경계에 놓임으로써 되레 명확해지는 정체성을 솔직하게 받아들인, 진정한 자아의 이름이자 애정 가득한 호명인 셈이다.


(네이버 영화판을 운영하는 '씨네플레이'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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