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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y 25. 2020

로맨틱, 성공적, '카페 벨에포크'

'카페 벨에포크'는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길어올린 낭만적인 로맨스물이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다. 차별과 혐오로 점철된 드라마를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것이 아들의 회사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빅토르(다니엘 오떼유)에게 오늘날이란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다. 종이와 펜으로 쓰고 그려 나가던 창조적인 세계를 믿는 빅토르의 기호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스마트폰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세상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사실 낡아가고 있는 건 빅토르의 기호만이 아니다. 그의 삶 자체가 덧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신문에 정치만평을 그리던 유명한 만화가였지만 지면이 디지털화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고, 카드도 끊겨버렸다. 부부의 세계도 온전하지 않다. 근 몇 년 사이 지속되던 아내 마리안(화니 아르당)과의 불화는 점입가경에 이르러 집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직면한다. 되는 일도, 가진 것도 없다. 그러다 뒤늦게 아들이 건넨 선물이 떠오른다. 어느 날이던 원하는 시대가 있다면 그 시대의 단 하룻밤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여행 초대장. 갈 곳도, 할 일도 없는 그를 끌어당기는 뜻밖의 중력이 생성된다.

<카페 벨에포크>는 <블랙 미러>의 세계관 속에 세운 <미드나잇 인 파리> 같다. 디지털 문명에서 도태되던 빅토르는 자신의 추억이 서려 있던 과거의 하룻밤으로 떠나길 결심한다. 물론 마술이라도 부려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고객이 원하는 시대를 배우와 세트를 동원해 완벽하게 재현함으로써 실제적인 체험을 제공하는 시간여행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초대장을 선물한 아들 덕분에 디지털 기기 따위를 쓰지 않던 시대로 하룻밤이나마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 그리고 그가 선택한 과거의 하룻밤은 디지털 기기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기회에 불과한 것만이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세대를 초월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종이 매체의 소멸을 두려워하는 문학적 선호와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음악적 취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시대에서 외국인처럼 낯선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카페 벨에포크>의 감독 니콜라스 베도스의 말처럼 취향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때때로 고리타분한 것이 된다. 동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취향은 손쉽게 고립되고, 소외된다. 그래서 자신의 취향을 방어하기 위해 누군가는 새로운 시대의 취향을 향해 손을 내밀지만 누군가는 손사래를 친다. 시대로 화살을 돌리며 새로운 것을 경멸한다. 빅토르는 그래서 소외감을 느낀다. 지금을 사랑할 수 없는 그를 사랑해줄 이가 지금에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시대를 잠시나마 비집고 들어가길 원한다.

빅토르의 오래된 추억이 깃든 ‘카페 벨 에포크(La Belle Epoque)’의 벨 에포크는 ‘좋은 시절’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이기도 하다. 그가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맞이했던 1974년 5월 16일은 오래전부터 사랑했던 여인을 처음 만난 날이다. 정교하게 지어진 세트와 절묘하게 떨어지는 조명 속에서 간혹 어설프게 굴면서도 생생하게 그 시절을 환기시키는 배우들의 연기로 마련한 시간여행 속에 자리한 빅토르는 자신이 거짓말의 세계에 놓여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점차 예상치 못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배우가 연기하는 과거의 연인에게 빠져들면서 삶의 활기를 회복하고, 생의 동력을 되찾기 시작한다. 시간이 집어삼킨 듯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카페 벨에포크>는 마치 영화에 대한 은유이자 예찬처럼 느껴지는 영화다. 세트와 배우를 동원해 의뢰인이 원하는 시대를 체험하게 해 준다는 설정은 영화와 관객의 관계에 대한 명징한 은유처럼 보인다. 세트와 배우를 동원한 노스탤지어의 테마파크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캐릭터가 그 상황 자체에 빠져들 때 관객 역시 그 감정에 몰입함으로써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미묘하게 지워지는 듯한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허구의 감정이 현실의 감정을 더욱 생생하게 이끌어내는 빅토르의 체험은 관객에게도 마술적 리얼리즘의 영화적 경험으로 전이된다. 동시에 영화 속의 영화를 훔쳐보고 있는 듯한 액자 구조 형식과 그 안팎으로 각기 흐르는 서브플롯들이 뒤엉켜 구축되는 내러티브의 옴니버스식 구성을 통해 축적되는 감정들이 적절한 클라이맥스를 이루며 영화의 메시지를 적정하게 보존한다는 점에서도 <카페 벨에포크>는 인상적인 영화다. 

간혹 특정 관계가 산만하게 펼쳐지는 인상이기도 하고, 감정적인 갈등을 낭비적으로 조장함으로써 클라이맥스의 강도를 높이겠다는 의도가 빤히 읽히는 신도 존재하는 듯하지만 결말부에서 남겨지는 로맨틱한 여운은 <카페 벨에포크>라는 제목에 깃든 고전적 낭만을 재차 떠올리게 만들 만한 것이다. 덧없이 식어버릴 감정이라는 온도 대신 함께한 세월이라는 관성을 붙잡고 천천히 끌려가던 부부의 세계가 다시 한번 감정의 불을 지필 수 있는 건 그렇게 지나온 세월이 그리 의미 없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란 성찰 덕분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다시 한번 출발선에 선다. 과거가 아닌 지금, 켜켜이 쌓인 시간의 무게로 짓눌리는 부부의 세계를 넘어 감정에 불을 붙이고 서서히 뜨거워지던 사랑의 시간으로. <카페 벨에포크>는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을 뒤돌아보는 대신 다가올 시간을 뜨겁게 맞이하길 권하는 영화다. 실로 로맨틱, 성공적인 여운이다.


(네이버 영화판을 운영하는 '씨네플레이'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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