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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n 12. 2020

'에어로너츠' 새로운 시대를 위한 비행

<에어로너츠>는 공간감을 지우는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그 남자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기상학자인 제임스 글레이셔(에디 레드메인)는 날씨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학자들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고자 했다. 인류에게 여전히 미지의 세계였던 1862년의 하늘로 올라가 대기의 변화를 살피며 날씨의 변화를 연구하길 원했다. 그 여자에게는 아픔이 있었다. 열기구 조종사인 어밀리아 렌(펠리시티 존스)에게 함께 열기구에 탑승했던 남편의 추락사는 여전히 악몽 같은 기억이다. 그래서 만인의 차가운 시선을 받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기로 했다. 열기구를 띄워 올려 마주하던 꿈같은 현실로 날아오르길 선택했다.

‘이 영화는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도입부의 자막처럼 <에어로너츠>는 실화를 온전히 재현한 영화가 아니다. 제임스는 영화상에서 비행 경험이 없는 기상학자로 소개되지만 1862년에 세계 최고의 고도 기록을 깨기 전까지 열기구 조종사였던 헨리 트레이시 콕스웰과 함께 수차례 열기구 비행을 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어밀리아라는 허구의 인물을 제임스와 함께 열기구에 태우고 하늘로 띄워 올린다. 그 탓에 기상관측 역사에 공헌도가 큰 인물이었던 헨리 트레이시 콕스웰을 조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밀리아 렌이 극적인 효과를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인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제임스 글레이셔와 함께 열기구에 탑승한 실제인물은 아니지만 어밀리아 렌 역시 프랑스의 열기구 조종사 소피 블랑샤르라는 실존인물을 모델로 둔 인물이다. 남편 장 피에르 블랑샤르와 함께 열기구를 조종하며 비행한 소피는 어밀리아처럼 눈에 띄는 복장과 곡예에 가까운 퍼포먼스로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유희적인 방식으로 열기구 비행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밀리아와 마찬가지로 열기구 비행 중 남편이 추락해 사망했고, 소피 역시 열기구 비행 중 사고로 추락사했다고 한다.

두 인물이 실존했던 시대상도 다르다.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기상학자였던 제임스와 달리 소피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활동한 열기구 비행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두 캐릭터를 한 시대에 녹인 <에어로너츠>는 열기구 비행의 발전에 일조한 조종사의 존재감과 열기구 비행을 바탕으로 기상예보의 발전을 이끈 기상학자의 공헌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 역사임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동시에 이는 영화적 흥미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도 중요한 변주였다.


“글레이셔와 콕스웰의 업적이 놀랍긴 했지만 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선 새로운 상상력이나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열기구 비행과 관련한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읽으며 글레이셔와 함께 열기구 바구니에 탑승할 만한 새로운 적임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소피 블랑샤르라는 조종사를 알게 됐고, 그에게 큰 감흥을 받았다. 그리고 본능적인 유희를 이끌어내는 열기구 조종사인 소피와 이성적인 과학자인 글레이셔를 함께 바구니에 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캐릭터 역학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감독 톰 하퍼의 말처럼, <에어로너츠>는 사실적인 역사를 재현하는 대신 영화적인 흥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각기 다른 시제에 놓인 역사를 접합해 재구성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영화 <에어로너츠>는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결과물처럼 보인다. 세상에 산재한 수많은 이야기가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재미와 의미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로 변주될 수 있다는 것. 결국 작가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제시하는 존재라는 것을, <에어로너츠>는 새삼 깨닫게 만든다.

에디 레드메인과 펠리시티 존스의 앙상블은 <에어로너츠>가 발굴한 이야기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는다. “당신 평판은 종이에 쌓이지만 내 평판은 비명에 쌓여요”라고 말하며 선을 넘는 어밀리아와 “난 과학자고 당신은 조종사예요. 각자 할 일에 충실하자고요”라고 말하며 선을 긋는 제임스가 극한의 위기를 건너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닿지 못했던 세계로 다다르고, 끝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입된다. 이는 두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감정을 보조하는 체험 자체가 볼거리 수준을 넘어 공감각적인 체험으로 생생하게 전이되는 덕분이다.


압도적인 시각적 체험을 선사하는 촬영술과 시각효과는 배우와 제작진의 노력을 영화적 성취로 띄워 올리는 양 날개와 같다. 때때로 딛고 있는 바닥을 확인하고 싶게 만들 정도로 생동하는 비행 신의 풍광은 서스펜스와 페이소스의 감정을 사로잡는 동시에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인물들의 기억과 경험을 체감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무대로서 완벽하게 기능한다. 특히 적란운을 돌파한 열기구가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어 성층권으로 다다라 목도하게 되는 풍경은 <에어로너츠>가 신비한 영험을 선사하기 위해 마련한 체험의 영화임을 실감하게 만든다.

동시에 고공 신의 일부 주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하늘로 띄워 올린 열기구에 직접 탑승하기도 하고, 저온의 감각을 체감하기 위해 영하로 냉각시킨 스튜디오에서 연기를 펼친 배우들의 열의는 <에어로너츠>가 선사하는 공감각적 체험의 뿌리가 배우들의 헌신으로 일군 토양에 자리 잡은 것임을 짐작하게 만든다. 공기 압축 탱크에 들어가 저산소증 훈련을 했다는 에디 레드메인이나 3000피트 상공에서 열기구에 기어올라간 펠리시티 존스의 열연은 헌신을 넘어 온전히 그 세계를 받아들이고 체화하겠다는 연기적 신념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에어로너츠>는 그런 열의를 통해 띄워 올린 결과가 어떤 감각으로 다다를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영화적 체험인 셈이다. 황홀한 감각과 벅찬 감동을 다시 한번 꿈꾸게 만든다. 극장과 스크린이 선사하던, 영화라는 시간을.


(네이버 영화판을 운영하는 '씨네플레이'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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