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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n 29. 2020

'야구소녀' 꿈을 향한 역투

'야구소녀'는 꿈꾸는 자에게 필요한 각오를 쥐여주는 응원가다.

소년이 아니라 소녀. 영화를 보기 전부터 많은 것이 읽힌다.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에서 여성 선수의 활약을 기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전에 여자가 프로야구 선수로 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이 역시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광경을 본 경험이 전무하니까. <야구소녀>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도전적인 허구가 된다. ‘야구’와 ‘소녀’라는 두 단어 사이에 자리한 거대한 벽이 괄호 속에 숨어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누구도 기대해본 적이 없는 꿈을 꾸는 자는 필연적으로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다. <야구소녀>는 바로 그 외롭고 고독한 꿈에 관한 이야기다.

고교 야구팀에서 유일한 여자선수로 활약하는 주수인(이주영)은 구속 130km를 던지는 여자투수다. 덕분에 ‘천재 야구소녀’라 불리며 매스컴에 소개돼 유명세를 얻었다. 묵묵하게 프로 입단을 도전하고자 한다. 하지만 감독도, 코치도, 가족도 프로 입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회유하거나 윽박지르며 헛된 꿈에서 깨어나길 종용한다. 구속 130km는 프로야구 마운드에 세울 만한 루키의 조건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 중에선 드물게 구속이 빠른 투수이지만 프로 선수에게는 평범한 구속일 뿐이다. 하지만 주수인은 포기할 생각이 없다.


한때 프로야구 선수를 꿈꿨지만 프로의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최진태(이준혁)는 고등학교 야구팀 감독을 맡고 있는 은사의 도움으로 코치 일을 맡게 된다. 그리고 프로 입단 희망을 꿈꾸며 드래프트와 트라이아웃까지 생각한다는 주수인을 보고 기가 찬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주수인의 의지로 인해 점차 마음이 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코치로서 팁을 주기로 한다. 구속을 높일 수 없다면 구종을 더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130km의 구속으로는 타자들에게 얻어맞을 것이 뻔한 직구 승부 일변도에서 벗어나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을 수 있는 너클볼을 익힐 것을 제안하고, 훈련을 돕는다. 

<야구소녀>는 유리천장을 뚫는 여성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보다 다양한 관계에 관한 영화다. 제각각 가지를 친 개개인의 사연에 담긴 저마다의 마음이 얽히고설켜서 갈등과 연대의 서사로 자라난다. 여성영화의 골조에 가족영화의 벽을 두르고 성장영화의 불을 밝힌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야구 훈련을 거듭하며 프로 선수를 꿈꾸는 주수인은 어머니(염혜란) 입장에서 아픈 손가락이다. 실패할 것이 뻔한 길을 굳이 가려는 딸이 그저 못마땅하다. <야구소녀>에서 가장 큰 갈등의 축은 꿈을 밀고 나가려는 주수인과 이를 만류하는 어머니 사이에 있다. 무능력한 남편(송영규) 대신 가장 노릇을 하는 어머니는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딸의 실패를 방관할 수 없다. 딸을 사랑하는 만큼 딸의 도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 돼야 한다.


반대로 주수인의 도전 자체를 황당하게 여기고 냉혹한 현실을 일깨워주던 코치는 되레 그 꿈을 밀고 나갈 방향을 알려주는 파트너가 된다. 주수인을 향한 그의 냉소는 오래전에 맛본 실패의 쓴맛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속이 느려 프로야구 선수로 발탁되지 못한 그의 못다 한 꿈은 주수인의 현실로 투영된다. 그래서 자신이 포기한 꿈을 향해 나아가려는 주수인의 마음에서 어떤 동질감을 느낀다. 결핍을 느끼며 살아가는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지 몰라도 “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제자에게 중요한 건 납득할 수 있는 결과일 것임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수인이 갈망하는 꿈을 향해 나아가기까지 넘어야 할 적정한 허들 노릇을 하기로 한다.


이렇듯 <야구소녀>는 남성과 여성의 대결구도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대신, 캐릭터 개개인의 사연을 통해 복잡다단한 삶의 군상을 세워 넣는다. 경기 장면 하나 없이 야구라는 소재를 취한 이 영화가 생동감 넘치는 감상을 부여하는 건 인물 간의 갈등과 화해를 흥미진진하게 관전할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 적절한 사연의 뿌리를 내린 캐릭터를 제시하는 덕분이다. 주인공인 주수영을 중심으로 그 주변부에 자리한 캐릭터들의 사연이 직선적인 이야기의 줄기를 보다 두텁고 풍요롭게 보완하고 보조하는 인상이다.

한편 <야구소녀>로 연출 데뷔한 최윤태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만류와 회의적인 의견을 견뎌야 했다고 한다. 여성이 주인공인 야구 영화라 상업적인 가치가 떨어진다는 식의 평가를 듣고, 제작비를 충당하는 과정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런 면에서 <야구소녀>라는 영화의 처지가 프로팀 입단을 꿈꾸는 주수인의 처지와 유사해 보인다는 점은 한편으로 흥미롭다. 동시에 야구선수를 연기하기 위해 독립 야구단에서 실제로 훈련을 하며 야구를 익힌 이주영의 노력은 최소한 이 영화의 메시지를 훼손하지 않을 만한 수준의 진실성을 획득하는데 기여한다. 기승전결의 흐름이 비교적 명확한 서사는 일종의 직구 승부 같은 인상인데 일관성 있는 결기를 불어넣는 이주영의 표정이 서사의 볼 끝을 무겁게 만들어주는 인상이다. 동시에 주변인물들이 보이는 심리적 변화는 너클볼 같은 흥미를 더하며 직구 일변도 같던 서사에 다채로운 감정선을 불어넣는다. 


<야구소녀>는 꿈이라는 단어의 가혹함을 먼저 쥐게 만드는 영화다. 해낼 수 있다는 용기만으로 간절한 기도가 늘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담담하게 역설한다. 그럼으로써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겨냥해야 할 실질적인 의지를 되새기게 만든다. 허구적인 자아도취에 빠져들지 않는다. 만만치 않은 현실에 부딪히려면 그만큼의 각오와 다짐이 필요하다는 것을 냉정한 어조와 치열한 어투로 전한다. 그래서 희망과 불안을 함께 쥐여주는 결말부는 <야구소녀>가 지향하는 이상과 지양하는 환상 사이의 절묘한 미덕을 선사한다. 그리고 완전한 해피엔딩으로 종착하는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만들면서도 해피엔딩을 보다 응원하고 싶게 만드는 결말은 끝내 희망적이다. 꿈을 향한 역투는 그 자체로 마음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법이므로.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도전적인 발을 딛는 사람은 응원할 수밖에 없는 법이므로. 한 발을 내딛는 이의 사연은 마음을 울리는 법이므로. 누군가는 그렇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 세상의 변화는 그렇게 한 사람의 마음에 출발하기도 하는 법이다.

(네이버 영화판을 운영하는 '씨네플레이'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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