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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Aug 24. 2020

쿠엔틴 타란티노, 언젠가 영화가 될 이름

쿠엔틴 타란티노는 늘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왔다.

쿠엔틴 타란티노, 쿠엔틴 타란티노. 거듭 발음할수록 격조 있는 쾌감이 전해진다. 결말부의 카타르시스가 기대되는, 명쾌한 기승전결을 예감하게 만드는 이름이랄까. 어쩌면 그 이름부터가 운명이었다. 만난 지 4개월 만에 헤어진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여자는 남자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홀로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에게 자신의 기호대로 이름을 지어줬다. 1960년대에 방영한 TV시리즈 <건스모크>에서 당대의 스타 배우 버트 레이놀즈가 연기한 퀸트 에스퍼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소리와 분노>에 등장하는 사생아 출신 여성 미스 쿠엔틴으로부터 빌려온 이름 '쿠엔틴'에 스쳐 지나간 인연이 됐지만 그래도 아버지이기에 그의 성인 '타란티노'를 붙여서, 그렇게 아들을 쿠엔틴 타란티노라 불렀다. 태생부터 영화보다 영화적인 운명을 타고난 이름이었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그렇게 시작됐다.


유년시절부터 만화책과 TV를 끼고 사는 소년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는 끝내 학교가 아닌 영화를 통해 인생을 개척한다. 일찍이 중학교를 중퇴하고, 10대 시절부터 나이를 속인 채 포르노 극장의 좌석 안내원으로 취직하기도 하며 다양한 일을 전전하던 쿠엔틴 타란티노는 스물한 살이 된 1985년부터 LA 세풀베다 대로에 인접한 비디오 대여점 직원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영화적 지식과 취향을 마음껏 뽐내고, 때때로 관객도 모르게 작은 영화제를 개최하며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쿠엔틴 타란티노에게는 그야말로 시네마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심지어 매장을 인수하고 싶어서 몇몇 직원들과 공동자금을 조달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제안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진짜 물음은 그 이후에 찾아왔다.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누군가의 영화를 말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영화를 만들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감독 데뷔작으로 염두에 두고 쓴 각본 <트루 로맨스>(1993)와 <내추럴 본 킬러>(1994)는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비판도 따라오는 것이었지만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게 된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직접 두 영화를 연출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규모를 최대한 낮춰보아도 제작비를 융통할 길이 없었다. 결국 판권을 넘긴 <트루 로맨스> 각본은 토니 스콧에게, <내추럴 본 킬러> 각본은 올리버 스톤에게 돌아갔다.(<내추럴 본 킬러>는 국내에서 <올리버 스톤의 킬러>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하지만 두 작품보다 먼저 타란티노의 감독 데뷔작이 관객을 찾아왔다. <저수지의 개들>(1992)은 감독 데뷔를 염두에 두고 쓴 <트루 로맨스>와 <내추럴 본 킬러>의 연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울분을 눌러가며 3주일 반 만에 쓴 이야기였다. 다양한 범죄자들이 등장하는 하이스트 무비지만 정작 사건을 묘사하지 않고, 쉴 새 없이 잽을 날리듯 쏟아지는 대사와 캐릭터의 인상으로 굴러가는 이야기는 과감한 점프컷과 허를 찌르는 플래시백으로 전 세계 평단과 관객 모두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두 번째 연출작 <펄프 픽션>(1994)으로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일찍이 거장의 지위를 확보했다.


<펄프 픽션>은 세상에 없던 영화였고, 지금도 유일한 작품이다. 얼핏 보면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세 줄기의 내러티브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처럼 보이지만 각기 다른 세 내러티브가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로 뒤엉키며 예측할 수 없는 서사 구조로 설계된 각본은 제작사를 당혹스럽게 만들면서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타란티노 특유의 플래시백을 통한 서사 구조의 전복과 재배열 방식이 빛을 발하는 작품인데 이러한 방식은 하나의 이야기 안에 다양한 층위를 구성함으로써 주인공이 여럿인 영화를 보는 듯한 흥미를 부여할 수 있다. 동시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내러티브는 서로 충돌하거나 엇갈리면서도 끝내 나선형의 구조로 이어진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에서 다시 시작할 것 같고, 처음부터 끝을 보는 이야기 같다. 존 트라볼타가 연기한 빈센트 베가는 세 줄기로 전개되는 내러티브에서의 중심인물과 관계를 맺으며 옴니버스 구조의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건 <펄프 픽션>이 소설의 챕터 형식을 통해 전개된다는 점인데 이는 대부분의 타란티노 영화가 취하는 서사 구조에서 활용되는 방식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문구점에서 검은색과 빨간색 펜 세 자루와 250매 분량의 공책을 사는 것으로 각본 작업을 시작하는데 대체로 철자법도 엉망이고, 구두점도 제대로 찍지 못한 글을 써 내려간다. 그렇게 써 내려간 최초의 각본은 시나리오라기 보단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 형식을 갖고 있는데 타란티노는 이렇게 써 내려간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나리오 형태를 완성해나간다. 그러니까 타란티노는 소설 즉 픽션을 통해 영화를 구상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영화를 시작할 때마다 감독이기 전에 작가로서 먼저 출발선에 서는 감독이라는 말이다. 질이 낮은 싸구려 종이를 의미하는 펄프를 써서 출간한 3류 소설을 의미하는 펄프 픽션은 타란티노의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모토와 같다. 물론 타란티노의 이야기가 3류 소설의 컨벤션이란 것이지, 그의 영화가 3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3류 소설이라는 하위 장르의 자양분을 악보 삼아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처럼 지휘해낸 마에스트로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저수지의 개들, 1992
펄프 픽션, 1994

<재키 브라운>(1997)은 <저수지의 개들>이나 <펄프 픽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점잖게 느껴지는 영화다. 일단 진행 중인 서사로부터 가까운 과거를 플래시백 형식으로 삽입하며 관객에게 필요한 정보를 극적으로 쥐여주거나 놀라운 반전을 선사하는 장기가 최소화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순행하는 서사를 따라가면 되는 타란티노의 영화는 범상치 않은 서사의 형식을 제시한 앞선 두 작품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평범하면서도 친절한 결과물이다. <재키 브라운>이 타란티노에게는 롤러코스터가 아닌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타란티노는 <재키 브라운>을 위해 ‘더 성숙한 영화이자 캐릭터에 더 많이 무게를 실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갖은 영화를 섭렵해온 영화광으로서 B급 영화에 속하는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에 대한 예찬론자이기도 한 타란티노는 <재키 브라운>을 익스플로이테이션의 하위 장르 중 하나인 블랙스플로이테이션 무비로 기획했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은 흑인을 주된 캐릭터로 등장시키는, 일종의 대안 영화이기도 했는데 70년대부터 대두된 이 장르의 여왕으로 꼽히던 배우 팸 그리어를 위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재키 브라운>이라는 롤 타이틀 역시 팸 그리어가 주연을 맡은 <폭시 브라운>(1974)을 의식한 결과다.


동시에 유년시절부터 타란티노를 사로잡았던 소설가 엘모어 레너드의 <럼 펀치>를 원작으로 둔, 첫 번째 각색물이기도 하다. 앞선 두 작품에 비하면 주인공은 수다스럽지 않고, 원작의 서사 구조를 최대한 보존함으로써 작가로서 큰 영향을 얻은 ‘펄프 픽션’의 대가를 위한 영화적 헌사를 바친 셈이다. <재키 브라운>은 타란티노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개중에는 수다스러운 면모를 지닌 인물이 포함돼 있지만 캐릭터 운용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두 전작이 전원 공격과 전원 수비를 표방하는 토털사커에 비유할 수 있는 백가쟁명의 영화라면 <재키 브라운>은 원톱 스트라이커 체제에 가깝다. 타란티노 입장에서 <재키 브라운>은 원작을 바탕에 둔 각색 작업을 통해 새로운 창작력을 도모하는 경험이었고, 전작보다 평면적인 방식으로 캐릭터와 내러티브를 운용하고 구축함으로써 장르적 전형성을 학습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흥미로운 건 타란티노가 <럼 펀치>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백인 주인공 재키를 흑인으로 변주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년시절부터 흑인 문화에 익숙했던 타란티노 입장에서는 지향점이라 말할 필요도 없는, 이미 다양성이 내재된 작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명확한 근거나 다름없다.


<재키 브라운>을 잇는 또 하나의 여성 원톱 영화 <킬 빌>은 이소룡의 <사망유희>를 연상시키는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고 긴 일본도를 든 우마 서먼의 이미지만으로도 펄펄 끓는 용광로다. 일본과 중국을 아우르는 아시아 무협 액션에 대한 타란티노의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우마 서먼의 박력은 <펄프 픽션>을 촬영하던 세트에서 나눈 아이디어로부터 세워진 것이다. <펄프 픽션>에서 우마 서먼이 연기한 미아는 여성 특공대를 다룬 TV 파일럿에 출연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킬 빌>(2003)은 바로 그 대사로부터 영감을 얻은 타란티노의 흥분을 동력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를 우마 서먼과 함께 차츰 발전시킨 결과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로운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다는 사실은 ‘영화광이 영화를 만들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질문에 어울리는 답변이기도 하다. 후지타 도시야의 복수 영화 <수라설희> 시리즈를 비롯해 중국의 쿵후영화와 이소룡,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 <황야의 무법자> 등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는, 영화광을 넘어 영화폭식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타란티노의 애정과 경의를 마구잡이로 쏟아낸 듯한 <킬 빌>은 겹겹이 드리운 서브 컬처의 매트릭스를 돌파하는 경험에 가깝다. 실제로 빌 역을 맡은 데이비드 캐러딘은 “이 영화를 착상할 때, 단순히 영화 한 편을 만들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 영화를 직접 살아보길 원한다”는 타란티노의 말을 회고하며 <킬 빌>을 찍는 과정은 “그 영화에 빠져 무아지경이 돼야 했다”라고 말했다.

재키 브라운, 1997
킬 빌, 2003

<킬 빌>을 논할 때 대부분의 관객은 <킬 빌-1부>(2003)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브라이드와 크레이지 88의 유혈 낭자한 결투 신을 떠올리겠지만 타란티노는 <킬 빌>을 통해 여성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다른 메시지가 있었다. “나는 젊은 여성들도 이 영화를 보길 바란다. 그들은 우마가 연기하는 브라이드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 그녀들이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 다른 영화 티켓을 끊고 <킬 빌> 상영관으로 몰래 숨어들어도 상관없다. 그렇게 하면 그 티켓의 수익을 다른 영화가 차지하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킬 빌>을 볼 수 있다면 괜찮다.” 타란티노의 말은 그가 <킬 빌>을 ‘액션’에 방점을 찍은 영화로만 보길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진다. <킬 빌-1부>에서 브라이드와 비비카 A. 폭스의 격투신은 그런 의식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복수하는 여자와 복수를 막는 여자는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정도로 살벌한 격투를 벌이는데 일순간 학교에서 돌아온 어린 딸로 인해 두 여자는 들고 있던 칼을 숨긴 채 잠시 싸움을 멈추고 아이를 안심시킨다. 서로를 죽이려던 두 여자가 어린 딸 앞에서 살생을 멈추는 순간 뜻밖의 위트와 페이소스가 함께 떠오른다. 강인하면서도 자애로운 여성성의 새로운 외형과 전통적인 내면이 부딪히는 대결적 형상을 그려낸 것이다. 이는 <킬 빌-2부>(2004)의 결말부에서 마지막 복수를 감행하고자 빌을 찾아간 브라이드가 어린 딸과 대면하는 순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킬 빌>은 결국 여성성에 대한 타란티노적 고찰과 발견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킬 빌>을 통해 아시아 무협 영화에 대한 애정을 쏟아낸 타란티노는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에 대한 애정을 쏟아낼 또 하나의 기회 <그라인드하우스>(2007)를 마련한다. 평소 타란티노의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 로버트 로드리게즈와 오래된 동시상영관 즉 그라인드하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호텔 벨보이를 주인공으로 둔 옴니버스 형식의 앤솔로지 무비를 기획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포 룸>(1995)의 연출에 참여했던 것을 비롯해 이미 몇 차례 타란티노와 영화적 합을 맞춘 바 있었다. 타란티노가 각본을 쓰고 심지어 주연배우를 맡았던 <황혼에서 새벽까지>(1996)는 범죄 스릴러와 뱀파이어 호러를 결합하며 저속하지만 통쾌한 롤러코스터의 묘미를 선사하는 B급 영화인데 이 작품을 연출한 감독도 바로 로버트 로드리게즈였다. 그 이후로 프랭크 밀러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씬 시티>(2005)의 연출을 맡은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촬영장으로 쿠엔틴 타란티노를 초대했는데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타란티노가 1달러만 받고 스페셜 게스트 감독 형식으로 영화의 한 신을 연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1달러만 받고 <킬 빌-2부>의 스코어 음악 작업을 도와준 빚을 갚기 위해서였는데 한편으로는 <씬 시티>에 사용된 고화질 HD 카메라를 사용해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즈가 각각 연출한 두 편의 영화 <데쓰 프루프>(2007)와 <플래닛 테러>(2007)를 네 편의 페이크 예고편과 함께 동시 상영하는 콘셉트로 기획한 <그라인드하우스>는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는데 B급 정서로 필름이 훼손된 흔적까지 고스란히 반영된 콘셉트로 싸구려 동시상영관에서 슬래셔 영화를 보던 체험을 오늘날로 이양하는 작업 그 자체였다. 타란티노가 연출한 <데쓰 프루프>는 제목 그대로 ‘사망을 방지하는’ 용도로 개조된 스턴트 카를 몰고 다니며 여성을 살해하는 변태 스턴트맨에 관한 영화이지만 그를 처절하게 응징하는 여성들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외설적인 대사와 자극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무의미한 대화와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감정선을 연결하며 고의적으로 후진 연출을 시도하며 돈벌이에 급급해 영화를 아무렇게나 가위질하던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 제작자들의 태도까지 영화에 반영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스턴트 액션에 대한 타란티노의 로망을 고스란히 담아낸 그릇이기도 했다. 폭력적인 카체이싱 신에서 차체가 사람의 육체처럼 찢어져나가듯 격렬하면서도 생생하게 느껴지길 원했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카체이싱 촬영만 6주를 할애할 정도였다. 스턴트 배우 출신 조 벨이 가죽 벨트에 의지한 채 자동차 보닛에 매달린 장면은 그야말로 스턴트 액션에 대한 서스펜스와 카타르시스를 원형 그대로 전시하겠다는 야심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데쓰 프루프>는 나르시시즘의 쾌감과 실패를 함께 끌어안은, 사유화된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데쓰 프루프, 2007
그라인드하우스, 2007
플래닛 테러, 2007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은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전시하는 데 탐닉하는 듯했던 타란티노의 경력에 새로운 전기를 불어넣은, 일종의 전환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에 둔 <펄프 픽션> 같은 형식을 띈 작품이기도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야심은 히틀러라는 실존인물을 등장시켜 이뤄진 바 없었던 영화적 응징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유대인 병사로 구성된 미국의 특공대가 악명 높은 나치 사냥꾼이 된다는 설정만으로도 단순 명확해지는 메시지는 타란티노다운 각본과 연출을 통해 특별한 힘을 얻게 된다. 동시에 공적인 정의를 실현하기보단 지극히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는 듯한 캐릭터들의 태도는 수정주의 서부극의 태도와 연결되는 인상이기도 하다. 다양한 캐릭터가 운용되는 방식과 각자의 영역에서 굴러가던 내러티브의 길을 좁혀나가며 클라이맥스를 집중하는 서사의 응집력은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안정적인 인상을 느끼게 만든다. 대작의 스케일이 온전히 느껴지면서도 수다스러운 대사량과 갑작스러운 플래시백을 동원하며 서사의 입체감을 확 벌려버리는 특유의 장기는 고스란히 녹아있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거짓의 역사를 영화적 쾌감으로 끌어올리는 최후반부의 응징 신은 영화가 이룰 수 있는 상상력의 너비를 한 뼘 벌렸다 해도 좋을 성취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타란티노가 믿고 있는 영화의 힘을 지극히 자신이 믿고 좋아하는 방식으로 발휘해낸, 타란티노적인 웰메이드 카니발이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는 수정주의 웨스턴에 응답하는 타란티노만의 수정주의 웨스턴처럼 보인다. 흑인 차별이 만연한 미국 남부 노예였던 장고가 흑인 현상금 사냥꾼이 돼서 혐오스러운 인종차별주의자 백인들에게 복수를 감행하는 내용은 그 자체로 현대적인 성취라 할만하다. 동시에 세르지오 코르부치가 연출한 <장고>에서 고스란히 이름을 차용함으로써 이 작품은 경건한 헌사이자 놀라운 위트라는 이중적 지위를 획득한다. 실제로 <장고>에서 장고를 연기한 프랑코 네로가 등장해 제이미 폭스가 연기하는 장고와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은 스파게티 웨스턴이 지향하는 수정주의를 이 작품이 계승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관식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동시에 백인 캐릭터들의 주무대였던 웨스턴 장르의 주인공을 흑인으로 설정함으로써 기존의 웨스턴 무비가 다다르지 못한 지평을 넓혔다는 점에서는 <재키 브라운>을 통해 재현한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특징까지 포괄하는 영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영화광 타란티노의 취향이 작품의 성취로 승화시킨, 또 한 번의 타란티노적인 증명을 완성해냈다.


<헤이트풀8>(2015)은 미국 서부시대를 배경에 둔 <저수지의 개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타란티노 스스로가 <헤이트풀8>을 기획하는데 <저수지의 개들>을 참고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한 공간에 고립된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혐오스러운 구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누가 죽더라도 억울하지 않은 인과응보의 지옥을 연출한다는 비전을 실행하며 미국 근대사를 압축적으로 관통하는 야심작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촬영기술 면에서 독보적인 결과물이다. 과거 <벤허>(1959)를 촬영할 때 썼던 구형 울트라 파나비전 70을 사용하기 위해 카메라와 렌즈를 연결하는 컨버터를 새롭게 제작했는데 2.76:1까지 가로 비율이 극대화된 시네마스코프로 포착한 와이오밍의 광활한 설원 풍경도 대단하지만 이 렌즈 비율은 사방이 막힌 실내 공간을 넓게 포착해냄으로써 심리적 답답함을 일거에 해소시키고 다양한 인물을 한 앵글에 밀어 넣으며 인물 간의 긴장감을 손쉽게 끌어올린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실은 올해 작고한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의 오리지널 스코어로 채워진 처음이자 마지막 타란티노 영화라는 점이다. 이 작품으로 엔니오 모리꼬네는 생애 첫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
장고: 분노의 추적자, 2012
헤이트풀8, 2015

쿠엔틴 타란티노의 아홉 번째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잇는 대체 역사물이자 비교적 현대를 배경에 둔 팩션 무비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로만 폴란스키의 임신한 아내 샤론 테이트를 무참하게 살해한 맨슨 패밀리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제작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동시에 타란티노 스스로 로버트 레드포드와 스티브 맥퀸 듀오를 잇는 다이내믹 듀오라고 자부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가 출연하는 할리우드 배경의 영화라는 점에서도 관심을 끄는 작품이었다. 1969년대 LA와 할리우드를 배경에 둔 이 작품은 히피 문화의 유행 속에서 암약하던 살인충동과 배우라는 화려한 세계 너머의 실존적 고민과 같은 아이러니를 당대의 공기와 함께 짚어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회자되는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로만 기억되던 샤론 테이트를 배우로서 재조명하고, 맨슨 패밀리의 악행을 보여주는 대신 지극히 타란티노적인 방식으로 묵사발 내는 응징으로 대체한 결말부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잇는 또 한 번의 대체역사 복수극인 셈이다. 동시에 <데쓰 프루프>에서 적대적 관계로 대치했던 스턴트맨 캐릭터를 연기한 커트 러셀과 조 벨을 스턴트맨 부부로 등장시키고, 브래드 피트를 스턴트맨으로 설정한 건 스턴트 세계를 향한 타란티노의 존중을 다시 한번 느끼게 만든다.


한때 배우 지망생이기도 했던 타란티노가 배우를 그린다는 건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어쩌면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한 세계 최고의 영화광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이지도 모른다. 동시에 파편적인 플래시백을 활용하며 세 조각의 내러티브를 운영하는 서사 구조는 <펄프 픽션>을 닮았고, LA를 배경에 둔 작품이자 결말부의 카타르시스를 끌어올리기 위해 드라마틱한 감정을 응집시키는 방식은 <재키 브라운>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출연한 영화 <렉킹 크류>(1969)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샤론 테이트를 연기하는 마고 로비와 스크린 너머의 진짜 샤론 테이트가 마주하는 장면은 가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해도 좋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명장면 중 하나다. 어느 누구보다도 영화라는 세계를 적극적으로 탐닉해온 이에게만 가능한 복수극이자 누구보다도 깊게 영화를 사랑해온 이에게만 허락되는 러브레터인 셈이다. 그렇게 쿠엔틴 타란티노의 아홉 번째 영화가 세상을 찾아왔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2019

10번째 영화가 은퇴작이 될 것이라는 타란티노의 선언이 번복되지 않는 이상,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타란티노의 세계는 단 한 차례뿐이다. 마지막 마침표만이 남겨진 지금, 타란티노의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건 팬들을 위해서이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한 팬은 바로 나 자신이에요.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해 영화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 영화에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결국 타란티노의 영화를 본다는 건 영화를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비록 대단히 수다스러운 영화광일지는 몰라도 언젠가 ‘옛날 옛적 타란티노의 영화들은’이라고 회자될 영화를 동시대에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생의 감각을 일깨우는 영화적 체험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미리 만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보게 될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영화를.


(CJ ENM의 영화 채널 '캐치온' 공식 블로그에 기고한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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