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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Sep 07. 2020

'남매의 여름밤' 가족이라는 노스탤지어

'남매의 여름밤'은 어떤 시간과 어떤 계절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다.

어릴 때만 해도 잘 몰랐다. 엄마는 그저 엄마였고, 아빠는 그저 아빠였다. 할아버지는 그저 할아버지였고, 할머니는 그저 할머니였다. 그들에게도 그저 아들이거나 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냥 거기 아빠가, 엄마가,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그렇게 그들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성장할수록 그들이 또 한번 늙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거기 있지만 늘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걸 알게 됐을 즈음 그들에게도 지나온 시절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생각하게 됐다.

시간은 관계를 허문다. 존재하는 것들의 형체를 지운다. 시간 속에서 풍화하는 존재와 함께 상실의 시간이 시작된다. 필연적으로 모든 관계는 끝내 헤어질 운명이 되고야 만다. 곁에 있어서 사소하던 것들은 언젠가 곁에서 사라짐으로써 마음으로 들이친다. 시계는 꼬박꼬박 제 자리로 돌아오지만 관계는 언젠가 멈춰버린 시간이 된다. 넘어오지 못한 시간 속에서 그 관계는 파도가 된다. 마음을 때린다. 눈이 아니라 마음에 닿는 추억이 되고 나서야 그 격랑이 뒤늦게 실감난다. <남매의 여름밤>은 바로 그 격랑을 뒤늦게 실감하는 한 소녀와 어느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벽에 걸린 작은 액자를 바라보던 옥주(최정운)는 아빠(양홍주)의 부름에 제 몸만큼 큰 가방을 메고 문을 나선다. 한낮인데도 불을 끄니 어두워지는 반지하방에서 나온 옥주 옆으로 버려진 가구들이 즐비하다. 가족은 이사를 가는 중이다. 마냥 즐거운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철부지 어린 동생 동주(박승준)만 그저 방긋방긋하다. 가족의 짐을 실은 동네 곳곳에 빨갛게 그려진 ‘X’ 표시가 이 동네의 처지를 실감하게 만든다. 그 와중에 어린 동생이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할아버지 집 커?” 가족이 향하는 곳은 바로 아빠의 아빠, 즉 할아버지(김상동)의 집이다. 심지어 남편과 불화를 겪고 있는 고모(박현영)까지 할아버지의 집을 찾아오게 되고, 할아버지 혼자 살던 집이 갑작스럽게 모인 가족 삼대로 떠들썩해지기 시작한다.

“첫 영화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윤단비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남매의 여름밤>은 감독 스스로의 말처럼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가족의 특정한 사연을 그린다기 보단 어느 특정한 가족의 삶을 들여다본다. 영화의 시작부터 결코 낙천적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듯한 가족의 처지를 염려해야 할 것 같지만 <남매의 여름밤>은 관객에게 뻔한 걱정을 안기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무던하게 이어지는 매일 속에서 사소하게 일어나고 번지는 웃음과 갈등이 변박자의 리듬으로 반복되는 일상을 바라보는 관객의 행위가 지난 경험을 환기하는 감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영화적 체험에 가깝다.


반지하방에서 퇴거한 것으로 보이는 가족은 할아버지 집에 얹혀사는 처지가 됐음에도 누구 하나 특별한 구김살이 없어 보인다. 남편과의 갈등으로 인해 집을 나온 것으로 보이는 고모 역시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났는지 대수롭지 않다는 인상이다. 가난 혹은 그로 인한 불행에 대한 걱정보다도 사소하게 떠오르는 고민을 끌어안은 매일이 찾아오고 그래서 간혹 예기치 못한 갈등이 불거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버겁지 않게 해소하거나 역시나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마주하며 자연스럽게 증발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게 이어지는 매일의 일상이 쌓여가는 <남매의 여름밤>을 지켜보는 관객은 끝내 그 가족을 한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생생하다기 보단 무던하게 그 자리에 들어앉은 듯한 느낌. 감정적인 몰입을 요구하는 대신 관객의 기억에 내재된 어떤 경험을 툭툭 건드리는 듯한 인상. 극적인 사건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거듭 발견하게 되는 보편적인 감정의 공감대를 통해 관객을 향해 영화가 다가가고 관객의 호흡에 맞춰 영화가 말을 이어나가는 듯한 기분. <남매의 여름밤>은 그렇게 공감의 영화로 다가온다. 너무 사소해서 간과된 상실과 결핍이 밤하늘의 별처럼 각자의 마음속에서 선명하게 반짝이던 지난날의 어떤 계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는 <남매의 여름밤>이 옥주의 감정을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감상의 입구로 삼되 주변부에 있는 가족 구성원의 감정 역시 하나하나 부지런히 눈을 돌려 돌보고 살피는 덕분이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여름밤을 보내는 남매란 옥주와 동주라는 어린 남매만을 지칭하는 것 같지 않다. 아빠와 고모라는 남매는 옥주와 동주의 어린 남매를 보살피는 어른이지만 한편으론 남매라는 관계 안에서 온전하게 독립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티격태격하면서도 투명한 우애가 드러나는 어린 남매의 일상은 별다른 갈등 없이 맥주캔을 부딪히며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유산을 둘러싼 속내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어린 남매와 어른 남매는 저마다 그 나이에 어울리는 우애와 갈등으로 굴러가는 하루하루로 점철된 여름밤을 보낸다.

가족은 매일 같이 밥을 먹는 사이이기도 하지만 한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자는 사이이기도 하다. <남매의 여름밤>은 여느 가족 영화와 마찬가지로 가족끼리 모여 식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밥만큼이나 잠과 꿈을 묘사하는 장면이 많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가족영화다. 옥주를 비롯한 가족들이 잠에 들거나 깨는 순간은 영화에서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리고 아빠와 고모에게 각각 부모님이 등장한 꿈 얘기를 듣게 되면서도 “난 꿈 안 꿔”라고 말하던 옥주는 의외의 장소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꿈을 꾸며 스스로가 부정하던 마음 깊은 곳의 결핍과 마주하게 된다.


초현실적인 체험처럼 묘사되는, 옥주의 꿈으로 추정되는 이 장면은 가족이라는 관계가 영원 지속할 수 없기에 노스탤지어로서 영원 지속되는 관계임을 환기시킨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담담해지고, 결핍은 추억이 되지만 결코 잊히지 않아서 지속되는 영속성. 결국 아들은 어딘가 불편한 아버지를 그리며 살고, 딸은 미운 어머니를 품고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가슴속 어딘가에 박힌 ‘미련’이 된 관계로서 돌고 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머니는, 딸은, 아들은 그렇게 가족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법이다. 마치 각기 다른 가수가 부른 한 노래처럼, 그리움의 대상은 변하고 각각의 감정적 형태도 사뭇 다른 것 같지만 그 모든 감정의 뿌리는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매년마다 찾아오는 여름밤이 거듭되는 사이, 간혹 기억 한편에 묻혀있던 어떤 기억이 문득 떠올라 다음 세대에게 구전된다. 어린 시절 무뚝뚝하던 할아버지가 어린 아빠에게 했다던 장난은 어른이 된 아빠를 통해 어린 아들에게 행해지고 어느 여름밤의 이야깃거리가 된다. 아빠의 자동차에서 들었던 옛 노래를 홀로 즐기는 할아버지의 미소를 몰래 간직한 손녀의 여름밤도 여느 여름밤에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남매의 여름밤은 언젠가 흩어지고야 말 시간이겠지만 영원히 잊히지 않는, 관객 모두의 밤일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지나온 시절이 있고, 언제나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어느 계절에 문득 떠오를 어떤 그리움. <남매의 여름밤>은 바로 그 계절에 공감하는 관객을 위한 영화다. 상실과 결핍을 추억으로 품고 성장해온 모든 이들을 위해 찾아온 어떤 계절. 좀처럼 흩어지지 않는 열대야의 열기처럼 여운이 지속된다. 그 여운이 지난 계절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게 마음이 전해지는 영화가 있다. <남매의 여름밤>은 그런 영화다.


(네이버 영화판을 운영하는 '씨네플레이'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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