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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28. 2020

'놀면 뭐하니?' 김태호와 MC유, 부캐 유니버스

김태호 PD와 유재석의 부캐 놀이가 이룬 거대한 빅뱅에 관하여.

무대를 찢었다. 엄정화, 이효리, 제시, 화사가 한 무대에서 노래한다. 보다 정확하게는 만옥, 천옥, 실비, 은비로 구성된 신인 걸그룹 ‘환불원정대’가 선보인 음악방송 첫 생방송 무대 말이다. 마치 연말 시상식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벤트가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서 펼쳐진다. <무한도전>의 김태호 PD와 국민 MC 유재석의 재회로 일찍이 화제를 모았던 <놀면 뭐하니?>가 TV 앞에 좀처럼 자리하는 일이 없다는 Z세대까지 본방을 사수하게 만든 비결이란 이렇다.

사실 처음부터 잘된 건 아니었다. <무한도전> 이후 김태호 PD의 복귀작이자 다시 한번 국민 MC 유재석과 함께하는 주말 예능이라니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지만 릴레이 카메라라는 형식으로 출연자들이 직접 카메라를 잡고 진행하는 관찰식 예능은 대체로 산만하고 따분했다. 이를 반증하듯 8화까지의 시청률도 3~4% 수준을 겉돌았다. 하지만 유재석을 드러머 ‘유고스타’로 만드는 ‘유플래쉬’부터 비상한 관심이 모이기 시작했고, 유재석을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만드는 ‘뽕뽀유’는 <놀면 뭐하니?>가 <무한도전>의 명맥을 잇는 MBC 간판 주말 예능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신의 한 수였다.


<놀면 뭐하니?>가 다시 한번 증명한 건 김태호 PD의 능숙한 캐릭터 놀이다. <무한도전>의 초기 모델이었던 <무모한 도전>은 제목 그대로 무모한 도전을 엉망진창으로 밀어붙이는 일회성 쇼의 연속에 가까웠지만 김태호 PD 체제가 본격화된 <무한도전> 프로토 타입이라 할 수 있는 ‘퀴즈의 달인’부터 멤버들의 개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프로그램의 매력이 건축되는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유재석, 박명수, 노홍철, 정형돈, 정준하, 하하까지, <무한도전>의 전성기를 이끈 멤버들의 캐릭터가 그때부터 각기 제 역할을 찾아가며 프로그램의 방향성도 확보되는 인상이었다.


이렇듯 <무한도전>이 다양한 멤버들의 개성을 저글링 하듯 운용하며 따로 또 같이 시너지를 내는 티키타카 팀플레이였다면 <놀면 뭐하니?>는 유재석의 다양한 부캐 개발로 매번 신선한 재미를 얹어나가는 원톱 스트라이커의 개인전에 가까웠다. 유플래쉬, 뽕뽀유, 닭터유, 인생라면 등과 같은 기획을 통해 유재석을 드러머 유고스타,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변신시키고, 치킨집 사장과 라면집 사장으로 만들며 ‘부캐’라는 단어 자체를 완벽한 통용어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계획대로 이뤄졌다기보단 씨가 된 말을 주워 담듯 따라가는 릴레이 경기처럼 새로운 도전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드럼 연주를 그럴듯하게 하는 유재석을 본 유희열이 다음에는 하프에 도전해보라고 농담을 하니 유재석에게 정말 하프 연주를 시킨다. 그리고 유재석이 “라면을 잘 끓여요”라고 하니까 정말 ‘인생라면’을 끓이는 라면집 사장님으로 만든다. 그리고 라면집에 깜짝 방문한 손님 이효리를 비와 함께 영입해 유재석과 함께 90년대 감성의 혼성 댄스그룹 ‘싹쓰리’로 만든다. 그러다 이효리가 이미지가 센 여성 가수를 모아서 환불원정대라는 그룹을 만들자고 하니 정말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각본이 정해지지 않은 관찰 예능이 점차 흥미로운 부캐 놀이가 되고, 보다 너른 부캐 유니버스로 확장되고, 진짜 각본 없는 드라마가 완성된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과정은 김태호 PD와 유재석의 긴밀한 호흡 덕분이다.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성실히 이행하는 유재석과 그런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태호 PD의 순발력은 유고스타, 유산슬, 유라섹, 유르페우스, 닭터유, 유드래곤, 지미 유 등 유재석의 다양한 부캐 변신쇼를 이어나가는 반석이자 기둥이다. 거기에 이효리, 비, 광희, 엄정화, 제시, 화사, 김종민, 정재형 등 다양한 인물들이 자기 이름 대신 부캐로 출연하며 점차 캐릭터 세계를 넓혀나가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능수능란한 진행자이자 다양한 부캐 출연자인 유재석은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존재 자체로 확립하고, 김태호 PD의 발 빠른 추진력과 타이밍을 아는 선구안은 프로그램 초기에 세워진 물음표를 강렬한 느낌표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놀면 뭐하니?>에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타 방송사의 프로그램과 스스럼없이 진행하는 컬래버레이션 방식에도 있다. 유재석이 직접 라면을 끓인 ‘인생라면’에서 코미디 TV의 유명 프로그램 <맛있는 녀석들>의 ‘뚱4’ 유민상, 김민경, 김준현, 문세윤이 있는 그대로 출연해서 해당 프로그램의 콘셉트를 고스란히 적용하고, 유재석이 직접 EBS의 <최고의 요리비결>에 출연해 유산슬 라면을 요리하기까지 한다. 이는 유산슬로서 KBS <아침마당>을 비롯한 다양한 타사 방송사에 출연해본 경험에 기인한 결과처럼 보이는데 EBS의 펭수가 캐릭터의 힘으로 다양한 방송사 문턱을 손쉽게 넘어버린 사례를 다른 방식으로 재현한 셈이라 해도 좋겠다. 불문율 같았던 방송사의 경계를 넘어 타 방송사의 프로그램과 협업하며 화제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다.

2019 MBC 연예대상에서 유산슬은 신인상을 받았다. <놀면 뭐하니?>는 단순히 한 프로그램의 화제성을 넘어 ‘부캐’라는 단어를 대중적으로 정착시킨 현상을 이끄는 프로그램이 됐다. <무한도전>만큼이나 대단한 상징성을 얻게 된 셈이다. 전국민적 사랑을 받는 유재석을 앞세운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접목시키고 반영하며 리얼리티 쇼의 흐름을 흥미진진하게 이어나가면서도 부캐라는 콘셉트를 토대로 새로운 예능 실험을 도모하는 방식은 김태호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신박하게 각인시킨다.


물론 냉정한 평가도 없지 않다. 이 모든 흐름이 가요제라는 굵직한 이벤트로 화제를 모은 <무한도전>의 사례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떤 면에서 유효해 보인다. 동시에 이 거창한 이벤트가 끌어올린 시청자의 역치를 이후에 어떤 이벤트로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생기는 것도 맞다. 하지만 먹히는 것을 다시 먹히게 만든다는 건 그만큼 예사로운 능력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건 처음부터 먹힌 게 아니다.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 시행착오를 빠르게 줄이는 것이 실력이다.


<무한도전>은 계획대로 성공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다양한 우여곡절 끝에서 확보한 다양한 캐릭터를 바퀴 삼아 굴려가며 재미와 의미를 함께 거머쥔 결과였다. 그런 과거를 환기한다면 <놀면 뭐하지?>는 그야말로 완전한 진화다. 그 누구도 <놀면 뭐하지?>의 어제를 묻지 않는다. 지금에 주목한다. 그리고 다음화를 예측할 수 없는 <놀면 뭐하지?>의 콘셉트는 지금의 방송계에서 보기 드문 실험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보기 드물게 새로운 현상이다. 그다음이 무엇일지 몰라서 불안하기보단 궁금해진다. 그러니까 이젠 말이 씨가 된다기보단 말하는 대로 다 이뤄지는 것만 같다. 김태호 PD의 MC유 실험은 부캐 유니버스로 팽창했다. 그야말로 빅뱅이다.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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