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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21. 2020

'가짜사나이' 사나이란 무엇인가

갖은 불명예에 시달리고 있는'가짜사나이'에 대하여.

“교육생! 앞으로 모든 대답 ‘악!’으로 통일한다. 알겠어?”라고 하니, “악!”이라고 대답한다. 그 뒤로부터 교관은 종종 존댓말을 섞어가며 반말 위주로 명령을 하고 심심찮게 욕설을 해대며 주로 윽박을 지른다. 난데없이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에 숙소를 박차고 들어와 잠들어있던 교육생을 깨우고 밖으로 끌어내듯 집합을 시키더니 얼차려를 시작한다. 유튜브 콘텐츠 <가짜사나이 2> 1화에서 ‘긴급 비상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란 이렇다. 그 이후로는 훈련이라 쓰고 고문이라 읽어도 좋을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한 교육생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교관님들이 왜들 그리 화가 나있지? 다 화가 나있어요. 우리는 자라고 해서 잔 것뿐인데.” 


그러니까 말이다. 대체 교관들은 무엇에 화가 난 걸까? 편하게 자면 된다고 말해서 편하게 잠들었더니 죽을 죄를 지은 사람처럼 밖으로 끌어내 물을 뿌리고 온갖 얼차려를 시킨 뒤 흙탕물에 고개를 처박게 만든다. 처박지 않은 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가 되고, 동료 의식이 없는 이가 된다. 일단 이런 훈련이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얼마나 유용했는지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전시에 대비한 훈련을 불과 며칠 동안 가혹하게 시행한다는 것이 실제 인생에 얼마나 유효한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힘들게 고생한다고 해서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다면 세상에는 현자가 차고넘쳐야 할 텐데.

물론 <가짜사나이>를 재미있게 봤다고 해서 정색할 생각은 없다. 혹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길티 플레저였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상에 넘쳐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예의 바른 미소로 가혹한 버튼을 눌러 생존과 낙오를 결정짓는 것과 비교했을 때 <가짜사나이>는 생존과 낙오를 참가자 스스로가 결정짓는다는 측면에서는 공정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쯤으로 여겨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가짜 사나이>에 출연한 교육생들을 누가 등 떠밀어 내보낸 것도 아니다. 하나 같이 스스로 출연을 원했던 이들이고 수많은 경쟁자 중에서 선택된 이들이라 오히려 책임감이 상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시즌1 출연자들이 자신들에게 욕설을 퍼부어대던 교관들과 한 자리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그 경험이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따져 물어야한다. 과연 <가짜사나이>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봐도 괜찮은 프로그램인가 말이다. 일단 프로그램 기획자 스스로도 인지하는 프로그램의 폭력성에 대해서 짚어보자. 강압적으로 보일 수 있는 훈련 과정과 참가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에 대한 특별한 주의를 부탁하는 자막은 이 프로그램이 강압적인 훈련 과정과 고통스러운 참가자들의 모습을 전시하는 프로그램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미취학 아동의 접근을 막을 수 없는 유명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된 프로그램 스스로가 이미 어느 정도 가학적인 폭력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난 10월 19일 자 <경향신문> 온라인판에 ‘독설, 얼차려 따라 하는 아이들…”요즘 유행인데요”’라는 헤드라인으로 업로드된 기사에 따르면 <가짜사나이>를 따라 하는 어린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인성 문제 있어?”라는 유행어를 따라 하며 ‘엎드려뻗쳐’와 같은 얼차려를 시키는 것을 놀이처럼 하는 모습이 적지 않게 눈에 띈다고 한다. 유행어를 따라 한다고 해서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 지나친 기우처럼 느껴지지만 서로에게 ‘엎드려뻗쳐’ 같은 걸 시키는 아이들의 놀이까지 동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된다. 단순히 어른이 보기에 안 좋은 행동을 넘어서 그 안에서 강자와 약자의 우열을 쉽게 적용할 수 있는 놀이에 탐닉하는 아이들의 문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러니까 이렇게 무분별하게 전시되는 폭력성을 무분별하게 소비할 수 있다는 것도 표현의 자유일까? 


‘앞으로 취침’과 ‘뒤로 취침’ 그리고 ‘머리 박기’와 ‘입수’가 반복되는 과정은 훈련이라기보단 일종의 가혹행위에 가까워 보인다. 유격 훈련 중에 끝없이 이어지던 PT 체조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교관들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선제압’을 위해 교육생들에게 가해지는 폭언이 과연 그들의 갱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일까? 다 떠나서 그들이 이렇게까지 가혹한 갱생을 거듭해야 할 만큼 문제적인 인물인지 궁금해졌다. 과연 이런 방식의 훈련이 사람의 인생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극한의 전투 상황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극렬한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는 교관의 설명은 도대체 일반인의 일상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일까? 일반인이 전시상황을 가장한 특수부대원들의 가혹한 훈련을 견뎌내면 정말 새로운 사람이 되는 걸까?

<가짜사나이 2>는 전작인 <가짜사나이>의 성공에 도취된 결과처럼 보인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더 거칠고 가혹하게 대해도 된다는 자신감이 팽배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많은 지지를 받는 방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가짜사나이 2>는 유튜브에서 사라졌다. 왓챠플레이에는 아직 남아있지만 에피소드 4 이후로 다음 에피소드 업로드가 무기한 연기된 상황이다. 이유는 모두가 알다시피 프로그램에 출연한 교관들의 신상과 관련된 문제제기로 인한 결과다. 그리고 교관들에 대한 각종 추문을 제기한 건 온갖 선정적인 폭로를 일삼는 유명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였다. 일종의 황색 저널리즘에 가까운 유튜브 채널의 주장에 의해 유튜브 채널을 통해 큰 인기를 끌던 가학적인 프로그램이 지워진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결국 군기로 무장한 가혹한 폭력성을 의리와 갱생으로 포장하던 유튜브의 인기 프로그램이 사실성이 불분명하더라도 부분별한 의혹 제기를 남발하는 유명 유튜브 채널에 의해 수명이 끝나버린 상황 말이다. 그건 <가짜사나이>에 대한 지지와 비판을 떠나 이 프로그램이 현재 과도기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구축되는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해 줬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감각을 사로잡기 위해선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역치를 높여야만 한다는 진실. <가짜사나이>에 열광한 시청자들 중에선 이것이 공중파에서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프로그램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공중파니까 보여줘선 안 되는 수위가 있는 것이다. 그 수위라는 것이 적폐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중요한 구분점이 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가짜사나이>를 보며 나름의 재미를 느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을 길티 플레저 이상의 진정성 있는 가치로 여기는 이가 있다고 한다면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 것만 같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야 저 가혹한 행위가 정말 인생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갱생의 비결이 된다고 믿는다는 것인가. 그건 마치 삼청교육대가 교육의 산실이라는 말처럼 들린다고 하면 과격한 비유가 될까? 그러니까 도대체 사나이란 무엇인가. 잠을 자다가도 별안간 일어나 받는 얼차려를 견디고, 차가운 바닷물에서 긴 시간을 견디고, 땡볕에서 하루 종일 구보를 해도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남자? 정말 어렵지 않은가. 대한민국에서 사나이가 된다는 건. 결국 그래 봤자 ‘가짜사나이’ 아니던가.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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