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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Nov 06. 2020

'펜트하우스'  막장드라마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괴물 같은 막장드라마 '펜트하우스'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내가 졌다. 이길 수 없다. 지난 10월 26일에 시작한 SBS 월화 미니시리즈 <펜트하우스> 1화를 보며 든 생각이다. 본방을 사수한 건 아니다. 애초에 볼 생각이 없던 드라마였다. 그런데 방영 2화 만에 시청률 10%를 돌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심지어 <스카이캐슬>과 <부부의 세계>를 더해놓은 것 같은 드라마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쯤 목격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느껴져서 뒤늦게 재방송을 봤다. 그만 봐버렸다. 호기심은 고양이도 죽인다고 하던데 다행히 시청자는 죽이지 않는 모양이다.


정말 놀라운 작품이기는 했다. 그러니까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칠 바닥이 남아있다는 것이, 한편으론 무궁무진해 보인다는 것이 대단하다면 대단했다. 근 몇 년 사이 K드라마의 막장력을 갱신하며 큰 반향을 일으킨 <스카이캐슬>과 <부부의 세계>의 아성은 이미 2회 만에 추월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펜트하우스> 공식 홈페이지 작품 소개에 명시된 기획의도만큼이나 박력이 넘치는 기세랄까. ‘어떤 인간의 욕망도 절대 충족되지 않는다. 인간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끝없이 오르려 하기 때문이다!’ 끝에 붙은 느낌표 때문에 왠지 웅변하듯 읽어야 할 것만 같은 이 문장은 절대 충족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드라마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사실 이 드라마의 완성도에 대해 따져 물을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럴 의욕 자체가 생길만한 작품이 아니다. 다 떠나서 <펜트하우스>는 김순옥 작가의 드라마다. 점 하나 찍고 나타난 사람을 아무도 몰라본다는 설정으로 시청률 37%에 육박한 <아내의 유혹>을 쓴 김순옥 작가의 세계를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행위란 하등의 의미가 없는 일이다. 작품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욕망이 이미 다른 곳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런 분석은 애초에 무기력한 잉여질이 돼버린다는 의미다.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아내의 유혹> <천사의 유혹> <다섯 손가락> <왔다! 장보리> <내 딸, 금사월> <언니는 살아있다> <황후의 품격> 그리고 <펜트하우스>까지, 김순옥 작가의 세계를 지탱하는 건 복수와 욕망이다. 복수와 욕망은 필연적으로 쾌감과 긴장감을 동반한다. 김순옥 작가는 늘 극적인 쾌감과 긴장감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광폭하게 다스리는 편인데 그만큼 어이없을 정도로 간과되는 디테일의 구멍들이 곳곳에서 숭숭 드러나지만 개연성 따윈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가도 상관없다는 듯이 끊임없이 몰아치는 사건의 수위가 만만찮은 탓에 이성적인 감상 따위는 급격하게 쓸려간다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지켜보게 된다고 할까.


<펜트하우스>는 그렇게 휘몰아치는 막장드라마 공식의 절정 같은 작품처럼 보인다. 빈부 격차로 인한 혐오를 비롯해 왕따, 불륜, 납치, 살인교사 등 이 모든 것이 한 회에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이어지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놀랍다. 게다가 지독하게 노골적인 혐오와 표독한 이기심을 정직하게(?) 육성으로 내뱉는 인물들의 태도는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마음을 크게 어지럽히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동시에 그 반대편에 놓여있는 가난한 이들을 선한 존재로 미화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가난하기 때문에 더 악해지기 힘든 존재들일뿐이다. 상대적으로 덜 악하지만 절대적으로 선하기만 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펜트하우스>는 거대한 혐오 덩어리다. 인류애가 짜게 식어버린 작품이다. 마치 욕망을 가진 인간에게 모두 일찌감치 유죄 판결을 내린 작품처럼 보인다고 할까. 여기서 보다 중요하게 해석해야 하는 건 그런 드라마에 반응하는 진짜 세계의 리액션일 것이다. 이 드라마가 시청률 10%를 넘긴 건 결국 그런 드라마 속 환상에 반응하는 이들의 비율이 적지 않게 존재하는 실제 세계가 존재함을 환기시킨다. 물론 개중에는 욕하면서 보는 이들도 있다지만 어떤 식으로든 <펜트하우스>가 저마다에게 나름의 흥미와 재미를 안겨주는, 모종의 엔터테인먼트가 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포털사이트에 <펜트하우스>를 검색하면 두 개의 펜트하우스가 검색되는데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드라마 <펜트하우스>와 진짜 현실에 존재하는 펜트하우스가 그것이다. 일단 드라마 <펜트하우스> 방영이 끝나면 쏟아지는 온라인상의 기사를 보면 마치 실존인물들의 서사를 보도하듯 드라마 속 인물에 관한 이슈나 관련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내용이 수두룩하다. 이 드라마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관심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잘 나가는 드라마의 내용을 바탕으로 최대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줄거리 기사들이 난무한다. 그 아래로는 다양한 펜트하우스에 관한 청약과 입주를 소개하거나 권하는 블로그 포스팅을 비롯한 현실 세계의 욕망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짜 세계와 진짜 세계의 욕망이 기이하게 흡사하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막장드라마가 수많은 욕을 먹어가면서도 거듭 등장하는 건, 심지어 시청자를 몰아붙이듯 점점 수위를 높여가는 건 그만큼 시청자가 경험하는 실제 세계에서의 삶이 막장드라마 만만치 않게 혹독하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빈부 격차가 제곱근을 곱하듯 넓어져만 가는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분노가 켜켜이 쌓여가고 약자조차 더 약한 약자를 유린한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전해지는 세계에서 막장드라마는 극강의 엔터테인먼트가 된다. 동시에 악플을 모아 부를 축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점점 몸집을 키워가는 것 같기도 하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란 결국 마음 속에 쌓여가는 욕을 해소할 구멍이 필요한 이들에게 더할나위없이 적절한 욕받이나 다름없다.


모르고 그러는 게 아니다. 잘 알기 때문에 그러는 거다. 막장드라마를 쓴다는 건 그리고 막장드라마가 팔린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시대의 구멍을 영악하게 읽어내는 이들이 벌이는 노름판과 같은 것이다. 그 노름판 위에서 누군가는 낄낄거리며 칼춤을 추고, 누군가는 악다구니를 쓰며 판을 두들긴다. 그렇게 몰려든 이들로 매번 문전성시다. 막장드라마는 그렇게 또 한 번 성공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성공의 비결을 깨닫고 막장의 역치를 또 한 번 갱신한다. 이런 세상에서 막장드라마를 욕하는 건 그저 사족 같은 일이다. 무력한 짓이다. 그리고 어차피 드라마는 현실을 못 이긴다. 그저 악착 같이 쫓아갈 뿐이다. 결국 막장드라마 같은 현실이 막장드라마를 잉태한다. 그러니까 막장드라마란 결국 작금의 세상이 키운 괴물이다. 욕을 먹고 산다는 건 보통내기가 아닌 것이다. 막장드라마도, <펜트하우스>도.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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