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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Feb 04. 2021

'윤스테이' 건강한 오가닉 예능의 맛

나영석 PD의 <윤스테이>는 건강한 재미의 맛을 알려주는 예능이다.

‘모든 국민이 가능하면 집에 머물러야 하는 이 시기에, 외부 활동이 주가 되는 콘텐츠를 선보이게 되어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하루빨리 이 위기의 터널을 잘 지나, 따뜻한 봄날의 나들이가 가능하길 기대합니다.’ 지난 1월 8일부터 방영을 시작한 <윤스테이>는 조심스러운 사과문으로 양해를 구하며 시작했다. 코로나 3차 유행으로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5인 이상 집합 금지가 시행되는 상황에서 여행은 엄두도 못 내는 시청자들이 해당 프로그램을 보고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의식하고 있음이 여실히 전해진다.


이는 보다 앞서 논란에 휘말린 몇몇 예능 프로그램들의 선례를 의식한 결과처럼 보인다. 단체로 제주도 여행을 떠난 출연자들의 모습을 담은 <나 혼자 산다>와 역시 단체로 글램핑을 즐기는 출연자들의 모습을 다룬 <노는 언니> 등이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 방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고, 시청자에게 위화감을 준다는 비판에 직면하는 상황은 여러모로 <윤스테이>가 참고할만한 선례가 됐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청자를 향해 먼저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며 시작하는 모양새는 예의의 문제를 넘어 이 프로그램이 어떤 지향점을 지니고 있는지 이해를 돕는 안내서처럼 보인다. 


사실 요즘 예능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입장을 딱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인상이 종종 느껴진다. 시청자를 즐겁게 만드는 것보다 다른 데 관심이 팔린 것처럼 보인다. 시청자를 즐겁게 만들기 위한 행위보다도 자기들끼리 즐겁게 노는데 심취하는 것 같다. 보는 재미도 없는 남의 놀이를 구경하는 시청자 입장이란 난감하다. 심지어 그만큼 예의도 없다. 뭘 해야 재미있는지 모르는 만큼 뭘 하면 안 되는지 구별도 못한다. 무례하다는 것과 재미있다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끼리끼리 모여 사석에서나 할만한 농담을 공석에서 듣게 되는 불쾌함이 전해진다. 출연자의 말실수를 편집으로 거르지 못하는 건 엄밀히 말해 제작진의 실력 문제다. 예의도 실력이란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스테이>는 실력 있는 예능이 전할 수 있는 재미라는 게 무엇인지 증명하는 프로그램 같다. 


<윤스테이> 1화에서 나영석 PD가 직접 말한 것처럼 처음부터 <윤스테이>를 기획했던 건 아니었다. 윤여정, 이서진, 정유미, 박서준, 최우식까지, 다섯 멤버가 출연하기로 약속한 프로그램은 본래 <윤식당> 시즌3였다. 2020년 3월부터 촬영지로 낙점된 해외로 출국해 촬영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 유행으로 인해 해외 출국 자체가 불가능해지면서 표류하던 기획을 수정한 결과였다. 2020년 연초에 진행하려던 프로젝트가 연말까지 오픈을 미루다가 기존 계획으로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새롭게 기획한 결과가 바로 <윤스테이>인 것이다.  


전라남도 구례의 한옥 고택 쌍산재에서 촬영한 <윤스테이>는 나영석 PD가 과거에 선보인  <스페인 하숙>의 국내 버전처럼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삼시세끼>의 한 축을 담당했던 차승원, 유해진과 같은 유명 배우가 스페인 현지의 하숙집을 운영했던 것처럼 윤여정을 비롯한 다섯 배우가 전남 구례의 한옥 고택에서 숙박업소를 운영한다. 그리고 <스페인 하숙>이나 <윤스테이>에서 사건의 중심을 차지하는 공간은 대체로 주방이다. <삼시세끼>나 <윤식당>처럼 밥을 해서 먹거나, 누군가를 먹이는 일은 숙박업을 리얼리티 예능으로 승화시킨 <스페인 하숙>과 <윤스테이>에서도 핵심 과제이자 주요 노동이며 궁극적인 콘텐츠다.

나영석 PD의 예능에서 늘 중요한 화두는 여행과 식사였다. 지방 도시를 여행하는 멤버들이 식사를 걸고 복불복 게임을 하던 KBS2 <1박 2일> 시절의 룰은 <신서유기>에서도 재현된다. tvN으로 거점을 옮긴 이후에 기획한 <꽃보다 할배>나 <꽃보다 누나> 그리고 <꽃보다 청춘> 시리즈는 낯선 이국을 여행하는 이방인의 정서를 다양한 세대와 각기 다른 성별로 나누어 제시하는 여행 예능에 가까웠지만 <삼시세끼>와 <윤식당> 그리고 <강식당>과 <이식당>은 낯선 타지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거나 타인을 위해 제공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예능이라는 점에서 보다 새로웠다. 


<스페인 하숙>과 <윤스테이>는 여행에 불가결한 숙박이라는 편의를 총체적으로 제공하는 호스트의 입장을 예능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한 단계 진화된 나영석식 예능의 최신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타의 예능 프로그램과 비교했을 때 무해한 즐거움을 전한다는 점에서 이색적인 흥미를 자아내는 결과물이다. 누군가를 희화화하는 공격성과 인위적 설정을 과하게 동원할 필요 없이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하는 멤버들이 함께 명랑하게 일상을 소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 그득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건강한 즐거움이 전해지는 예능을 기획할 수 있다는 것을 꾸준히 증명하는 나영석 PD는 분명 입지전적인 예능 제작자다. 


첫 회 시청률 8%대를 기록한 <윤스테이>는 4회 만에 11%대를 상회하며 나영석 PD의 예능이 코로나 유행 속에서도 유효한 재미임을 입증했다. 무엇보다도 이런 자질은 배우들을 자연인 그대로의 캐릭터로 활용하는 예능을 기획하는 능력으로부터 기인한다. 예능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배우들이 나영석 PD의 예능에서 대거 출연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일이 됐다는 것 역시 다른 예능에서 만나기 힘든 볼거리나 다름없다. 윤여정, 이서진, 정유미, 박서준, 최우식처럼 경력도, 나이도 각기 다르지만 한 작품에서도 보기 힘든 배우들이 한데 모여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예능에 나온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보는 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비록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낯선 사람과 마주하는 여행이 불가능한 시대이지만 윤스테이에 머물며 편안하게 쉬어가는 외국인들의 1박 2일은 당장 떠날 수 없다는 조급함보다도 언젠가 떠날 때가 되면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를 알려주는 것 같다. 떠난다는 건 결국 또 한 번 머무름을 위한 여정임을, 결국 그곳에 다다르기까지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위화감보단 위로를 전한다. 건강한 웃음을 수확하는 오가닉 예능은 이렇듯 코로나 시대에도 유효하다. 그야말로 희망의 맛이다.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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