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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Feb 17. 2021

결혼은 미친 짓이 아니다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러브씬넘버#' 29세편과 결혼에 대한 단상.

결혼은 했지만 결혼식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릴 때마다 동일한 구간에서 물음표가 넘어왔다. “결혼식을 왜 안 하는데?” 사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절차를 생략하자는 양가의 합의가 원만해서 가능한 결론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런 물음표가 넘어올 때마다 뭔가를 해명하는 입장이 된 것만 같아 차라리 결혼식을 할 걸 그랬나 싶을 때도 있었다. 심지어 의외의 물음이 넘어오는 경우도 있다. 이를 테면, 속도위반이냐, 재혼이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냐, 등등.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 쏟아진다.


그때 처음 실감했다. 결혼식이 무엇인지. 결혼은 당사자들만의 문제인 것 같지만 막상 결혼을 준비해보면 그게 당사자들 간의 문제로만 정리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양가 집안부터 직장 동료를 비롯해 다양한 지인들까지, 혼인 당사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결혼 소식을 전하는 과정 자체가 긴 여정이다. 결혼식은 그 모든 과정의 결승선과 같다. 모두가 별 탈 없이 완주하는 것 같지만 당사자들만 아는 고충이 체증처럼 쌓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혼 준비하다가 파혼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러브씬넘버#>는 23세, 29세, 35세, 43세까지, 저마다 나이가 다른 네 여성을 주인공으로 둔 8부작 옴니버스 드라마다. 폴리아모리, 메리지블루, 성공에 대한 야망 등 각기 다른 고민에 빠진 네 여성의 사연을 통해 일과 사랑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개인적 고찰을 극적으로 아우른다. 23세와 42세 편은 MBC에서도 방영될 예정이지만 29세와 35세 편은 오직 웨이브에서만 볼 수 있다. 그리고 29세 여성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그린 29세 편은 메리지블루, 즉 결혼 전 우울증에 관한 내용을 그리는 작품으로 결혼을 고민하는 동시대 20~30대 여성들의 공감대를 자극할만한 사연을 담고 있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신부는 표정이 어둡다. 그리고는 뭔가를 결심한 듯 대기실을 빠져나와 식장을 바라보다 끝내 결혼식장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레이션, ‘내 인생 첫 일탈은 나의 결혼식에서 도망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이름은 이하람(심은우),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결혼식을 앞두고 도망가게 된 29세 여성의 이야기다. 단 한 번도 삶에서 일탈이란 것을 해본 적 없던 여자가 결혼식이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과감한 역행을 하게 된 사연을 그린다.

사실 하람은 겉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삶을 살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하람은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정석(한준우)과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다. 반듯한 인상처럼 예의가 바르고 매너가 좋은 정석은 누가 봐도 괜찮은 신랑감이다. 한편 아버지가 부재한 집에서 자란 하람에게는 알게 모르게 감내해야 했던 크고작은 부침과 구김이 있었지만 친구처럼 막역한 어머니(윤유선)와 함께 오손도손 살아오며 나름대로 극복해냈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무난하고 원만한 삶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결혼일이 다가올수록 하람의 속이 탄다. 눈덩어리처럼 커져가는 의심에 시달린다. 결혼하기 적당한 나이에 무던한 남자와 결혼을 선택했지만 그 적당함과 무던함이 점점 장점이 아닌 단점처럼 느껴진다. 딱히 취향을 주장하지 않는 정석의 무던함이 맹탕 같고, 긴장감 없이 진행되는 섹스는 지루해서 하품이 난다. 그 와중에 자신과 달리 연하의 남자와 뜨거운 열애 중인 어머니가 하람이 결혼하면 애인과 함께 남미로 떠날 것이라는 계획까지 듣게 된다. 현타가 온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던 하람의 갈등에 엄마의 빈자리를 향한 불안까지 더해진다. 결국 하람의 마음을 흔들던 갈등과 불안은 그를 결혼식장에서 뛰쳐나오게 만든다.


이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살아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결혼이 당연한 만큼 파혼할 수도 있고, 이혼할 수도 있고, 재혼할 수도 있다. 더 이상 낡은 시대의 관념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파혼과 이혼과 재혼을 계획하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다.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긴 싫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다. 한 번의 결혼식도 이렇게 번거로운데 두 번이나 해야 한다니, 그리고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감내했는데 무효로 돌려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고단하다. 


결혼을 앞둔 누구나 단 한 번의 결혼식이길 바란다. 그전에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이 결혼 이후의 행복한 삶을 꿈꾼다. 하지만 당연한 행복은 없다. 결혼을 중대사라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결혼은 장난이 아니다. 신중하게 결정하고 면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내 행복을 위해 선택해야 한다. 결혼에 적당한 때란 없다.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선택하는 것처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일 같이 마주하게 될 얼굴이 매번 사랑스러울 수는 없다 해도 지긋지긋하고 끔찍해서는 안 될 일이므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야만 한다.


<러브씬넘버#>에서 하람의 에피소드는 파혼까지의 과정보다도 파혼 이후의 과정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진다.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 결혼식을 준비하던 하람은 파혼이라는 불미스러운 경험에 직면하지만 스스로 이를 결정했기에 그 이후로 자신의 욕망에 보다 솔직해진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상대방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배려라는 미명 하에 자신을 감추는 삶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최소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없는 섹스를 하다 하품을 내뱉는 실례를 하는 것보단 보다 격정적인 흥분을 원한다고 털어놓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연한 것도 아니다. 부모님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세상 누군가가 부러워할만한 일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어야 한다. 철저하게 내가 원하는 삶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상대를 배려한다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억누르며 살아간다는 건 결국 언제 종착할지 모르는 불행의 열차에 탑승하는 것과 같다. 하람과 정석은 한 번의 파혼 끝에 서로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배운다. 나를 아끼는 것이 상대를 아끼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결혼이라는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건강한 욕망에 눈뜬다. 그러니까 결혼은 결코 미친 짓이 아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결혼이 끝내 미친 짓이 되는 것뿐이다. 건투를 빈다.


('웨이브(wavve)'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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